[PRESS] 우리는 늘 선을 넘지 (1) - 2023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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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때, 유예의 시절에, 나는 나를 가슴 뛰게 한 많은 공연을 기꺼이 기억의 무덤 속으로 넘겨 보냈다. 충분히 희미해진 뒤에, 말하자면 독자에게만큼 내게도 작품이 비실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글을 쓰기 위해서.”
- 책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中
지난달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9박 10일간의 꿈만 같던 여정이 끝나고 나는 한동안 영화에 관한 글을 쓰지 못했다. 몇 주간 극장에 가지도 않았다. 그것은 내가 영화라는 매체에 완전히 질려버렸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경험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한동안 가까이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에 가깝다. 영화 앞에서 무력해진 나를 일으켜 세울 시간이 필요했다. 목정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유예의 시절에, 나는 나를 가슴 뛰게 한 많은 영화를 기꺼이 기억의 무덤 속으로 넘겨 보냈다. 충분히 희미해진 뒤에, 말하자면 독자에게만큼 내게도 작품이 비실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글을 쓰기 위해서.
영화제에 갈 때마다 무아지경에 빠져 영화를 보는 건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 전주에서 나는 무언가 새로운 차원의 무아지경에 눈을 뜬 것 같았다. 가슴을 뛰게 하는 멋진 작품을 많이 만났다는 뜻이다. 영화 <로제타> <아들> 등을 감독한 다르덴 형제의 신작 <토리와 로키타>부터 고다르 감독과의 20년 전 인터뷰를 담은 <고다르 감독에게 묻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1967년산 걸작 <살인의 낙인>, 엔니오 모리꼬네와 세르지오 감독의 아름다운 호흡을 담은 다큐멘터리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세르지오 레오네: 미국을 발명한 이탈리아인>에 이르기까지.
19개의 영화를 보는 동안 19개의 세계가 내 안에 천천히 자리 잡고 있었다. 8편의 다큐멘터리와 8번의 GV. 2편의 고전 영화와 한 번의 골목상영. 나는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넋을 잃고 화면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다가도 금세 마음이 풀어져 백치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내게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 증오와 사랑, 분노와 고독을 일깨워 준, 전주에서 만난 모든 영화에 감사하다.
본 글에서는 전주에서 관람한 19편의 작품 가운에서도 나의 깊은 곳에 가 닿았던 영화 여섯 편을 소개하기로 한다. (참고로 ‘우리는 늘 선을 넘지’는 2023 전주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이다. 전주영화제는 독립/실험영화의 최전선에 놓인 작품들을 지지해 온 바 있다)
<고다르 감독에게 묻다>, Godard Is Here
처음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를 보고 느꼈던 당혹스러움을 잊을 수 없다. 갑작스러운 화면 전환과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지는 전개. 알 수 없는 대사를 남발하는 배우들 하며 카메라 너머로 말을 건네오는 인물까지. 이토록 제목에 충실한 영화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점프 컷과 핸드헬드가 난무하는 이 영화에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는 당찬 목소리의 진 세버그와 아름다운 파리 시내의 전경을 담은 카메라의 시선은 단연 빛난다. 무엇보다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범죄와 사랑에 쫓기는 주인공의 외줄 타기를 지켜보는 건 그 자체로 흥미롭다.
이후 접한 <비브르 사 비>(1962)는 고다르 감독을 다시 보게 한 분수령 같은 작품이 되었다. 12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주인공 나나가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을 보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그녀(들)의 상처 입은 영혼을 가만히 어루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클로즈업 신이었다. 나의 시선을 특히 오래 붙잡았던 건 영화의 제11장을 보면서였다. 나나가 카페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사랑이 유일한 진리 아닌가요?”라고 묻는 나나에게 “그러려면 늘 진실한 사랑이어야 해요”라고 답하는 낯선 이는 고다르 감독의 초상과도 같은 인물이다. 읽는 것이 직업이라는 이 낯선 남자를 보면서 고다르 감독을 떠올린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 <고다르 감독에게 묻다>는 2002년 1월 한국인과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두 명의 감독 지망 청년들이 고다르 감독의 작업실을 찾아가 그를 인터뷰한 기록물이다. 고다르 감독만의 독특한 영화적 사고와 작업 방식,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고다르 감독은 영화 <비브르 사 비> 속 낯선 남자와 닮아있다. “영화의 미래는 과거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 고다르 감독과의 대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무성 영화를 이야기하는 지점이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못하다”는 말에 이어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근래의 영화들이 ‘말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역설의 상태에 놓였다는 것. 무성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말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고다르는 말한다.
조르주 멜리에스, 찰리 채플린, 오즈 야스지로, 버스터 키튼 등 은막의 시대를 장식한 거장들의 영화를 떠올리고 있노라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비브르 사 비> 속 나나의 대사 “사람은 자주 조용히 침묵 속에 살아야 해요. 말을 할수록 그 말의 의미가 사라져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영화는 사유의 도구”라고 말한 고다르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생각한다. 영화의 미래는 정말로 과거에 있나? 그렇다, 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지언정 나를 사유하게 한 많은 영화가 과거에 머물러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문성경 평론가가 말한 대로 영화에 기록된 고다르의 구술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우리(의 생각과 사유)를 자극한다.
<조용한 이주>, The Quiet Migration
마른하늘에 운석 하나가 떨어진다. 이를 알아차린 사람은 주변에 없어 보인다. 운석이 떨어진 곳이 인적 드문 시골 마을이기 때문일 것이다. 쿵!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관객의 시선을 대번에 사로잡는 오프닝은 운석이 떨어진 자리를 말없이 응시할 뿐이다. 주변은 한없이 고요하고 소들은 느긋하게 (다시) 풀을 뜯어 먹는다. 두 번째 운석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영화에서 운석은 운석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카를을 상징하는 모티프로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는 조용히 막을 연다.
영화 <조용한 이주>는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된 카를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농장에서 (자신을 입양한)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카를은 이제 막 스무 살을 앞둔 건장한 청년이다. 아침 일찍부터 소를 돌보거나 농장을 관리하는 등 무미건조한 일상을 이어가는 카를의 표정은 늘 덤덤하다. 그의 지나친 담담함이랄지 무표정에 어린 고독의 기운은 비단 그의 지루한 농장 생활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닐 테다. 묵묵히 제 일을 해나가는 카를의 손길과 형식적인 대화만이 오가는 가족 식사 자리. 심지어는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이 있는 친척들의 모임. 카를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에는 디아스포라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조용한 이주>를 보면서 자연스레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가 떠오른 이유다.
영화 <조용한 이주>를 지배하는 정서는 책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의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덴마크와 한국 그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카를. 『부글거리는 기분』 서문에서 윤아랑 작가는 이런 말을 한다. “(...) 그래서 대개 긍정한다는 건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된다. 부정하는 것이 무언가를 지우고 어디선가 빠져나오는 일이라면, 긍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직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덴마크로 입양되어 온 카를에게 있어 ‘덴마크인으로서 정체성’을 긍정하는 건 부정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자신을 평생 돌봐 온 양부모가 있고 몸을 뉘고 잘 아늑한 시골집이 있을지언정 그는 자신을 (온전한) 덴마크인이라고 보지 않았을 것 같다. 왜냐면 긍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직시(해야)하는 일일 테니까. 그러나 카를은 (반쪽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는 처지다. ‘덴마크인으로서 정체성’을 부정하는 순간 자신이 발붙일 곳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입양인의 정서적 혼란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느끼는 이물감(혹은 이질감). 나는 이곳에 맞지 않는 조각이라는 느낌. 뿌리가 없는 (것 같은) 상태. 그러니까,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한편으로 이 영화는 초현실적인 측면에서 하루키의 소설과 닮아있다. 감독이 직접 “무라카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GV에서 언급하기도 했는데 영화에서 나타나는 두 개의 달이 그 대표적 상징이다. (하루키의 『1Q84』 속 두 개의 달은 크고 밝은 노란 달과 작고 일그러진 초록 달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영화 <조용한 이주> 속 두 개의 달이 크기와 모양과 색깔 면에서 완전히 똑같은 까닭은 카를(의 내면)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덴마크인과 한국인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을 오가는 카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인 것이다)
책 『1Q84』에서 주인공인 덴고와 아오마메는 자신들의 원래 세계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세계는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즉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구성물인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것. 덴고와 아오마메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거대한 여정에 발을 들이게 되고 <조용한 이주> 속 카를은 (비록 정신적인 차원에 그치긴 하나) 그토록 바라던 한국행을 이루게 된다.
<살인의 낙인>, Branded To Kill
그러니까... 이 영화는 조금 (많이) 이상하다. 첫 문장을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상식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1967년 작품 <살인의 낙인>은 쌀밥 냄새에 성욕을 느끼는(...) 하나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나다는 야쿠자 세계의 삼인자로서 조직의 주요 인물을 다른 지역까지 호위하거나 지시에 따라 특정인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는다.
킬러들의 과장된 대사와 행동, 비현실적인 액션 장면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우선 눈에 띄는 건 하나다의 기상천외한 암살 방식이다. 요컨대 세면대 배수관을 통해 총을 쏜다든가(이 장면은 짐 자무쉬 감독의 1999년 작품 <고스트 독>에서 오마주 된다) 창밖으로 날아가는 대형 풍선에 몸을 실어 탈출하는 식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암살에 실패한 적이 없던 주인공이 우연한 사고로 좌절되는(나비가 등장하는 이 장면은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1967년 작품 <고독>에서 오마주 된다. 앞서 언급한 자무쉬 감독의 <고스트 독>은 <고독>의 많은 장면을 오마주하기도 했다) 장면은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구석이 있다. 다만 이런 (어이없는) 시도들이 단순히 관객의 폭소를 자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도리어) 경탄과 탄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이 영화의 놀라운 성취 중 하나다.
앞서 언급한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떠오르는 건 두 영화가 순전히 제멋대로인 이유도 크지만, 그에 앞서(혹은 그로 인해 탄생한) 훌륭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살인의 낙인>이 선보이는 장르적 파괴와 해체는 (점프 컷과 비연속적인 이야기의 나열 등으로)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와 그 결을 나란히 한다. 감상자에 따라 괴작과 수작을 오갈 것 같은 문제작을 찍어낸 두 감독은 각각 프랑스(장 뤽 고다르)와 일본 누벨바그(스즈키 세이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스즈키 세이준에 영향을 받은 영화 감독으로는 쿠엔틴 타란티노, 짐 자무쉬, 왕가위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박찬욱과 봉준호, 류승완, 김지완 감독이 그의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박찬욱 감독은 그의 평론집 『박찬욱의 오마주』에서 “세이준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술과 음악, 그리고 촬영과 조명의 우수성은 언제나 감탄을 자아낸다”고 찬사를 표하기도 했다. 영화 <살인의 낙인>을 두고서는 “빡빡한 스케줄이 아니었다면 미연에 방지되었을 엉뚱함이 있다. 즉흥성의 아름다움이다. 다음 숏을 어떻게 찍을지를 배우나 스태프들이 미리 알면 감독의 권위가 생길 수 없다는 이유로 스토리보드를 절대 안 만든다는 세이준이고 보면 일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지 뻔하다. 주도면밀, 심사숙고, 노심초사의 환경에서는 절대로 이 영화의 말도 안 되는 진행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올드팬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살인의 낙인>은 제작 당시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었다’며 영화사 사장에 의해 개봉이 중지되고 세이준이 영화사에서 해고되는 수난까지 겪게 만든(세이준은 이에 따라 10년간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전무후무한 작품이다. 2001년 세이준 본인에 의해 <피스톨 오페라>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자신을 “오락영화 감독”으로 소개한 바 있는 만큼 세이준 감독의 <살인의 낙인>은 (영화에 담긴 철학적 담론을 제하고서라도) 끝내주는 오락영화임이 틀림없다. <살인의 낙인> 이후 한동안 영화계를 떠났다가 1977년 복귀한 감독이 이다음 발표한 <슬픈 가을 이야기>(1977), <찌고이네르바이젠>(1980), 아지랑이좌(1981) 등도 언젠가 극장 스크린에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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