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물고기처럼 눈을 뜨고 잠을 자는 사람들 [영화]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 <우리가 눈을 뜨고 잘 때>
글 입력 2024.05.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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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넬레 볼라츠 감독의 〈우리가 눈을 뜨고 잘 때(Sleep with Your Eyes Open)〉를 보았다. 눈을 뜨고 잠을 잔다니.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모호한 표현과 건너편에서 수조 안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인물의 모습이 담긴 스틸컷의 몽환적인 매력에 이끌려 예매한 작품이었다.

 

영화는 브라질에 머무르는 세 명의 중화권 인물들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남자친구와의 이별 후 혼자 브라질에 여행을 온 카이는 숙소의 고장난 에어컨의 선을 끊어버리려고 시장에서 우산 장사를 하는 중국인 푸앙에게서 펜치를 빌린다. 그러나 그것을 돌려주려 가게를 찾았을 때 가게는 이미 텅 비어버린 상태였고, 어쩌다 올림픽 기념 엽서가 한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선물로 받게 된 카이는 엽서 뒤에 적힌 샤오신의 일기를 보며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기 시작한다.

 

브라질 여행객인 카이와 브라질 외국인 노동자인 푸앙, 브라질에서 부유하게 사는 이모의 집에 거주하는 샤오신은 같은 공간에서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을 공유한다. 세 사람은 살아온 배경도, 나이도, 언어도 다르고 서로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직접 만나본 적도 없는 사이다. 그러나 현지에선 그저 ‘포르투갈어를 할 줄 모르는 아시아인’일 뿐인 그들은 물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처럼 쉽게 섞이지 못하는 외부인으로서 같은 것을 경험하고 같은 것을 느낀다.

 

카이는 박물관 안내원과 버스 기사에게 일본인으로 오해를 받는다. 푸앙과 동료 중국인 노동자들은 같은 건물에 사는 남자가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엔 절대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다. 샤오신은 린 이모와 이모 밑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건물 1층의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누군가가 창밖으로 던진 수박 한 통이 바로 옆에서 큰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것을 목격한다.

 

좋게는 ‘익숙하지 않음’으로, 나쁘게는 ‘의도적인 차별’로 말할 수 있는 일련의 경험들은 그 구체적인 내용에 차이가 있더라도 세 인물에게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꾸준히 인식하게 하는 공동의 경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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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감각은 특히 머무른 시간이 긴 자에게 더욱 강한 독이 된다. 푸앙은 자신의 고국인 중국은 변화가 없는 브라질과는 다르게 매일 빠르게 변해가고 있어서 돌아가면 집을 찾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며 동료 노동자들에게 습관처럼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동료들은 푸앙에게 브라질로 떠나온 이후 오랫동안 중국에 가보지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아느냐며 되묻는다.

 

푸앙은 떠나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국에 대한 정체성을 계속해서 잃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문화에서 여전히 외부인 처지를 벗어날 수 없다. 어느 어두운 밤 상어가 헤엄쳐 다니는 새까만 밤바다에 작은 튜브 하나를 들고 뛰어든 푸앙은 어느 쪽에도 선명하게 속하지 못하는 현실 속 이민자들의 슬픔을 대변하는 인물이 된다.

 

넬레 볼라츠 감독은 이러한 이민자들이 눈을 뜨고 잠을 자는 물고기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결코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존재.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매 순간 익숙지 않은 규칙을 따르려 애쓰지만.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존재. 그리하여 결코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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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소통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오해’와 ‘이해.’ 고작 하나의 음운 차이에도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두 단어 사이를 오가며 영화는 접점이라고는 중국계라는 것이 전부인 샤오신과 푸앙, 푸앙과 카이, 카이와 샤오신을 점선으로 잇는다. 이모 집에서 지내던 샤오신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푸앙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푸앙은 샤오신이 남긴 엽서를 번역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배우며, 카이는 샤오신의 엽서에 있는 사진으로 사라진 푸앙을 찾는다.

 

 

"What time is it in your zone?"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푸앙은 해변에서 다시 만난 카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기와 같이 중국어를 쓰는 중국인인데도 카이에게 마치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고 묻는 듯한 푸앙의 말은 아마 이 세상 모든 외로운 디아스포라가 듣고 싶어 했을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언어나 생김새만으로 ‘너는 이런 사람이야.’와 같은 섣부른 판단과 분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통해 다양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너는 그런 사람이구나.’와 같은 사려 깊은 이해와 유대로 나아가는 것. 언젠가는 영화 속 해변에서 새파란 파도가 하얀 모래들을 머금고 들어오고 구름이 하늘 위를 떠다니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날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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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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