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유사 비평가의 유사-비평 큐레이션

글 입력 2024.05.1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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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장르는 도대체 누가 정하는 것인가? 국문학을 전공하거나 문예 창작을 전공하면 알 수 있나? 저자에게 자신의 글을 정의할 수 있는 자격이 얼마만큼 있나? 큐레이션 글을 고르는 것보다, 초고를 쭉 써 내려가는 것보다 제목을 정하는 데에 더 긴 시간과 노력과 고통과 고난과 분노와 좌절이 필요했다. ‘비평’이라기에 전문적이지 않고, ‘칼럼’이라기에는 ‘나’가 너무 크다. ‘에세이’라기에는 ‘나’의 비중이 작다. 여기저기 자문을 구해본 결과, ‘비평적 에세이’, ‘비평 에세이’, ‘인문 에세이’, ‘사유 에세이’, ‘이 정도면 비평’, ‘이건 에세이다’와 같은 다양한 답변이 등장한다. 이 지면에서 글의 장르적 속성에 대해 논할 이유는 없으니, 유사 비평가의 괄호 불허의 유사-비평이라고는 정의를 내린다. 유사-비평이 평론, 칼럼, 에세이의 위계 속에 어디쯤 위치하는지까지 따지고 들다가는 평생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 유사의 이름 아래 자연스럽게 외면한다. 프로패셔널한 글쓰기가 나라는 주관성을 지워내 객관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취득한다면, 이 유사-비평의 글쓰기는 나라는 주관성에서 시작한다. 그렇지만 내가 아닌 ‘나’들에서 끝나기를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에세이와는 또 다르다. 정말 다른가? (답변 거부)

 

 

 

#아마추어로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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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비평가로 쓰기 – 아마추어리즘 비평'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긍정적 접근을 토대로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찾으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아마추어는 ‘프로 이전의 준비 영역’이라는 의미를 넘어 비평의 행위성을 중심으로, “창작자의 의도에 무지”함에서 출발하는 비평적인 것에 “더듬어 가는 비평작업의 행위성에서 쟁취한 수행 이후의 자격”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유사 비평가는 “앎 사이에 미세한 거슬림을 손끝으로 감각하고, 뒤틀림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자신의 무지를 전제로 읽는다. 그리고 유사의 영역에서 약탈하여 전유에 성공한 이론을 이용하여 사이보그적 이종어(異種語)로 쓴다.” 그러나 실제 아마추어의 작업물의 질이 낮고 볼품없다는 사실 또한 지워낼 수 없다.


아마추어의 “직관에서 출발한 이론의 각주와 인용”에 대한 문제의식은 ‘베끼고 무시하고 인용하기’에서도 이어 확인할 수 있다. 초연결시대에 타인을 경유하지 않은 고유한 자기 기술이 가능한가라는 문제의식을 ‘손민수하다’와 ‘추구미’를 통하여 분석하였다.

 

 

 

#유사 비평가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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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관한 세 가지 질문'


‘독서는 좋은 것이다’라는 진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다.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하여 ‘독서가 왜 좋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에 대한 답변을 유추한다. “왜 우리는 독서가 좋다고 생각하는지, 도대체 왜 좋은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실제 독서 경험 전반을 되짚는다. 제인 오스틴,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들은 발간 당시 ‘여자나 아이들이나 읽는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현재에는 세계 문학전집에 속한 고전이라는 권위를 획득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진정한 독서’가 아니라는 웹소설, 웹툰, 만화책 혹은 책의 내용을 요약한 유튜브 영상 등은 독서인가? 그 독서는 좋은 것인가?

 

로맨스 웹툰을 비평적으로 분석하며 읽는 행위와 철학 고전을 한 문장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끝까지 읽어나갔을 경우, 어떤 독서가 ‘진정한 독서’에 가까운가? 그렇다면 정말 독서는 좋은 것인가? 독서는 왜 좋아야 하는가?


허구의 영역에서 ‘책’을 하나의 생물종, 즉 인간에게 기생하는 생물로 묘사하는 ‘책이라는 기생-종(種)의 생존 전략에 대한 우화’도 함께 읽어보길 추천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무엇을 책이라고 하는지, 책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그래서 책을 읽는 행위인 독서에는 무엇이 해당하는지, 애초에 독서란 무엇인지, 내가 참이라고 믿었던 모든 명제에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신자유주의 탈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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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투스가 자기 계발 신화와 만날 때'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이 사회소셜네트워크(SNS)에서 오남용되는 이유를 신자유주의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로 해석하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종교의 신화에 빗대어 설명하였다.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아비투스는 사회계급적 위계 속 구조로서 존재하고, “개인은 구조를 얻을 수 없다.” ‘노오력’과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로 개인이 개인을 착취하는 구조가 구조적 불평등을 인지하는 시각을 가린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으로 달린 댓글에서 언급된 ‘온전한 자기 계발’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온전하지 못한 자기 계발을 하고 있어서 고갈·탈진된다. 온전한 자기 계발은 기쁜 것으로 온전한 자기 계발을 추구해야 한다’라는 논리 자체가 다시금 구조의 문제를 개인에게 치환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이지 않겠느냐고 답변하고 싶다.

 


 

#노동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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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이 된 감정, 사유화된 모욕, 죽어가는 노동자'

 

서이초등학교 2년 차 교사 A씨가 학부모들의 과한 민원에 시달리다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부여된 과도한 소비자 정체성에 대하여 논하였다. ‘감정 노동자들에게 부여되는 업무에서 ‘나’의 자아와 직업적 자아를 구분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한가?’, ‘소비자 정체성이 부여된 사람들은 정말 ‘모욕할 권리’를 구매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다.

 

감정 노동을 서비스 영역에 포함한 기업에 의하여 노동자는 직업의식이라는 이름 아래 자아를 분리하기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모욕감은 “직업의식의 부재가 아니다.” 모욕은 노동자를 사회에서 배제하는 역할을 하며, 모욕이 사유화되며 구조적 문제는 노동자 개인과 고객 한 명의 문제로 축소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노동자는, ‘나’는 죽어간다.

 

 

 

#여성주의/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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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애나 러스에게 빚진 새로운 여성 신화'


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에 SF 여성 작가들 사이에서 시도된 ‘페미니즘 유토피아’ 사고 실험을 주제로 하여, 조애나 러스의 《여성 남자The Female》(1975)과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유명한 창작 뮤지컬 〈해적〉을 논하는 글이다.

 

페미니즘 SF 소설에서 실험된 성별과 젠더가 인물의 서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러스가 SF 소설을 통해 다뤘다면, 2020년대 한국에서 뮤지컬 〈해적〉의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각각 여성/남성 배우가 여성/남성역을 모두 소화하는 모습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가능한 모든 멀티버스 환경 속에서 ‘여자’가 어떠한 여성성을 부과받는 모습을 다룬 소설과, 실제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여성 인물과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여성 인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차이로 성별에 따라 부과된 인물 플롯(신화)이 기존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 따라 조형되었다는 걸 여실히 느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관련하여 ‘도끼’를 무기와 해방의 관점으로 읽은 여성 중심 작품을 소개하는 ‘눌린 자국을 가진 채로 도끼를 든 여자’도 함께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조애나 러스의  《여성 남자The Female》 번역본이 한국에서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 여전히 아쉽다.

 

 

 

#지방 2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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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도 이름이 있다'

'지방에도 취향이 있다'


서울 공화국, 서울 중심주의, 서울-지방 이분법 속에서 지방민으로서 긍정적 지방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시도로 기획하였다. 비-서울 공간이라는 지방, 그리고 지방‘들’ 중에서 또 다른 위치를 점유하는 ‘광주’ 두 층위를 고려하고자 했고, 당사자로서 개인적 경험을 곳곳에 드러내는 글이 되었다. 광역시이지만 ‘시골 애’로 소개되었고, 전라도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서울에 살지 않음’을 ‘나의 능력 및 노력 부족’으로 읽던 과거 그리고 현재에 대한 고백이다. ‘지방/시골’로 뭉뚱그려진 채 이름을 잃어버리고 문화예술 접근성과 질적 격차에 대한 논의가 손쉽게 열등감으로 표현되곤 하는 사회에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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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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