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베끼고 무시하고 인용하기

'추구미'와 참고문헌
글 입력 2024.05.04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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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단 하나의 참고문헌도 존재하지 않는 글이 가능할까? 글쎄다. 하다못해 글자를 배우기 위해 펼친 가나다 학습지가 글을 위한 최소한의 참고문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나’라는 개별자를 다른 개별자와 구별하여 기술할 때 타인을 경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베끼기


 

개별자로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성을 침범당하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복제된 내가 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흔한 악몽이다. 복제품과 두 눈을 마주치는 순간 느끼는 구역감은 세계에서 나의 유일함을 근거로 한다. 유일한 존재라는 원본성은 출처를 밝힌 ‘인용’을 통하여 약간 상처 입은 상태로 확장되며, 출처를 숨긴 베낌은 타인의 원본성에 스며든다.

 

타인을 모방하는 행위는 원본을 감추며 고유함에 쉽게 손상을 입힌다. 2011년부터 SNS에서 ‘손민수같다/하다(타인을 지나치게 따라 하다)’라는 단어를 통해 맥락에 대한 구체적 설명 없이도 사람들은 원본으로서 자신이 입은 피해를 서술하였다. 손민수는 2010년부터 연재된 로맨스 스릴러 웹툰 〈치즈인더트랩〉에서 여자 주인공 홍설을 따라 하며 주인공을 괴롭히는 ‘빌런’의 역할로 등장한 조연이다. 홍설의 머리 스타일, 옷을 따라 하는 건 물론 그가 잃어버린 물건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그의 남자친구를 자신의 애인이라고 하는 등 홍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손민수는 웹툰 연재 당시에도 크나큰 반감을 얻었다. 주인공을 동경하고, 따라 하며 결국 주인공의 자리를 넘보기까지 하는 인물이 얼마나 독자들의 비난을 샀는가 하면, 웹툰이 완결된 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행어 시장에서 사장되지 않은 채 살아남아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고유한 개별자에서 복제의 원본임을 증명해야 할 위치에 놓이게 된 당사자로서 주로 사용하던 ‘손민수하다’의 부정적인 뉘앙스는, 베끼는 자의 입장에서 사용되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며 조금씩 변화했다. 

 

‘추구미’라는 신조어는 명사 ‘추구’에 ‘미(美)’를 더한 단어로, “본인이 목표로 하는 미적 스타일이나 이미지·감성”[1]을 뜻한다. 본받고 싶은 타인의 사고, 말, 태도, 취향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지만, ‘미’의 범주를 포함한 의미일 때 사용된다. 중년 남성 개그맨의 배려 있는 모습은 ‘본받고’ 싶고, 외적으로 닮고 싶은 여성 연예인의 배려 있는 모습은 ‘추구미’가 되는 식이다. SNS 이용자들은 손쉽게 타인의 사진을 두고 ‘#추구미’라는 링크를 사용한다. ‘추구미’를 ‘추구’하기 위하여 그가 입은 옷을 똑같이 구매하고, 패션 소품을 비롯하여 그가 사용하는 화장품, 좋아하는 책, 즐겨듣는 음악, 인테리어 소품을 파악하며 따라 소비한다. 

 

‘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동경부터 ‘이 사람의 외형을 따라 하겠다’라는 베낌까지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추구미’는 원본이 아닌 복제의 다짐이다. ‘손민수하다’가 복제를 향한 비난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미 ‘손민수’에 대한 사회의 강한 비난을 경험한 이들은 ‘추구미’로 원본을 대체하려는 욕망을 자발적(혹은 강제적)으로 거세(당)한다. ‘나의 추구미는 000이다’라고 발화 이후 ‘000을 손민수한다’라는 발화는 ‘나는 결코 000의 원본성에 도전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베낌은 추구와 동경의 영역에 포함되며 원본의 권위에 범접 불가능한 온라인상의 ‘손민수’는 ‘팬’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 추구성을 얻은 원본은 고유성이라는 권위를 강화한다. 

 

‘손민수하다’와 ‘추구미’의 공통점은 타인의 이미지를 취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개별자를 다른 개별자와 구분하는 욕구는 자신을 더 멋지고, 대단한 이미지를 가진 무언가로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의는 타인을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방식으로도 얻어진다. 

 

 

 

무시하기



‘인디 부심’, ‘홍대병’과 같은 단어들은 2016년 지상파 방송에서 풍자된 적 있으니, 아마 그보다 오래전부터 온라인 공간에서 ‘대중 취향과 다른 취향을 넘어서, 언제나 대중과 반대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단어로 통용되었다. ‘-병’은 마이너한 취향을 넘어 메이저 취향을 ‘무시’하며, 취향을 넘어서 반-대중영역을 고유하게 지키려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록 장르는 ‘A 밴드 팬 10명, B 밴드 팬 10명, C 밴드 팬 10명. 도합 13명’이라는 자조적 농담이 자주 등장할 만큼 다른 장르에 비하여 향유자의 수가 적으나, 팬들의 애정은 깊은 장르로 유명하다. 최근 아이돌 밴드 등 밴드 음악에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흔한 인용구 ‘나만 아는 밴드’라는 인용구에 추가된 여러 뉘앙스에 따라 각각의 발언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힙스터’의 정서는 대중 하위문화로 보수적인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 정신을 토대로 한 비주류 집단에서부터 시작한다. 1950년대 미국 비트제너레이션을 시작으로 반전(反戰)의식의 히피로 이어진 저항정신은 2024년의 대한민국의 ‘힙’에선 의미를 잃었다. ‘힙스터’는 특정한 의미나 정신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정치 사회적 주체로 나서지 않는다. ‘홍대병’과 동의어가 된 ‘힙스터’는 오로지 소비 행위로서만 표현되는데, 목적은 반-대중적인 이미지 추구이다. 목적이 사라지고 방향성만 남은 ‘홍대병 힙스터’는 ‘남들과 다른 것’을 추구하며, ‘남들’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구성하며 자신을 서술한다.


대중은 즐기지 않는 패션과, 남들은 잘 모르는 책을 읽고, 나만 아는 인디 밴드의 음악을 듣는다. 타인의 취향을 무시하며 얻어지는 마이너의 정체성은 베낌에 예민하다. 탈의미화된 소비는 복제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원본의 상실을 반-대중정서로 가리고 있으나 복제되는 순간 원본이 비었다는 점이 들통난다. 그렇기에 마이너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은 ‘누가 더 마이너인지’를 겨루는 행위뿐이다. 해외 인디 밴드를 듣는 이는, 해외 유명 밴드를 듣는 이를 무시하고, 해외 유명 밴드를 듣는 이는 한국의 인디 밴드를 듣는 이를 무시하고, 한국 인디 밴드를 듣는 이는 한국 아이돌 밴드를 듣는 이를 무시한다. 무시하고 무시하면서 유지되는 마이너 정체성이란 취향의 원본 상실이다. 

 

 

 

인용하기


 

베낌과 무시로 만들어진 개별자는 어느 영역에서 진정성을 획득하고 원본성을 유지하는가? 베낌과 무시로 만들어진 취향과 이미지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 기술self-description”[2]을 목적으로 한다.

 

출처 없는 베낌과 대중을 향한 무시는 ‘나’를 기술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복제자이자 반-주류에 불과하며, 자기 기술이 가능한 ‘나’는 권위 있는 원본과 대중이 된다. 그렇다면 원본 존재와 대중은 자기 기술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원본은 언제나, 어느 정도 타자의 복제다. 대중은 집단인 까닭에 고유한 자기 기술이 불가하다. 대중의 자기 기술은 언제나 소외자를 배출한다. 과연결시대에 우리는 그 누구도 원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고유한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글 시작에 앞서 ‘단 하나의 참고문헌도 존재하지 않는 글’을 물었다. 그렇다면, 모든 문장이 인용문인 글이 있다면 그 글은 누가 작성한 것이 될까?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다른 이들이 쓴 문장을 합하여 만든 글의 저자는 정말로 저자인가? 

 

이따금 인용은 저명한 학자의 권위에 기대는 일, 비판의 대상이 되기를 회피하는 일, 저자의 주장이 드러나지 않는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나 광대한 비물리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초공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물질적 타인과 관계한다. 더 이상 자기 기술이 가능한 고유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유성을 잃은 대신 과밀한 연결성을 얻었다. ‘모든 문장과 연결된 저자는 저자가 되는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전 세계에 접속 가능한 아카이브가 존재하는 현대에 원본은 원본이 되는가?’라는 질문과 유사하다. 

 

저자가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글을 읽는 것처럼, ‘나’가 ‘나’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접속이 필수적이다. 그 초공간에서 ‘나’는 베끼거나 무시할 오브제들을 꺼내 활용한다. 자기소개서가 ‘자소설’이 되면서, 자기 기술의 에세이가 허구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오로지 인용으로만 기술한다. 자기 서사는 오직 서술자라는 같은 노드를 지나친다는 공통점만을 가진다. 모든 문장을 인용한 글에서 모든 문장이 가진 공통점이 한 저자로부터 베껴졌다는 사실과 같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문장을 베끼고, 베끼지 않을 부분을 무시한다. 저자의 고유성의 발휘되는 지점은 베낌과 무시다. 인용으로 연결된 헐거움은 물리적 실체의 부재에서 나온다. 각자의 방안에 자폐적으로 존재하며 서로를 인용하는 기술로 자기 서사를 쌓는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원본성은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는 우리의 신체뿐이다. 

 

안담 작가는 〈작가-친구-연습〉에서 작가 친구에게 인용당하는 연습을 통해서 타인을 응시하기 위한 ‘바깥’의 공간과 떨어진 신체에서부터 인용 불가성을 이야기한다. ‘나’라는 원본성은 타인을 응시하기 위한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과, 타인을 응시하는 ‘타인-아님’의 신체가 필요하다. 그렇게 물리적 공간에서 ‘나’의 원본성을 확인한다면, 그 원본성을 설명하기 위한 자기-기술은 신체 역학의 영역에서 가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육체를 어떻게 글로 옮길 수 있을까. 그것은 글의 모든 문장의 출처 자기 자신인 글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것과 같다. 

 

‘나’에서 출발하여 ‘나’에게 닿는 자폐적 서술이 글자를 ‘쌓아 두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자폐성이, 모두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복제의 존재와는 무엇이 다를까. 베낌과 무시를 골라내는 순간에만 원본으로서 고유성이 발휘된다고 한다면, 이 글의 모든 문장에 어떠한 각주를 달아두어야 할까. 결국 ‘나’의 자기 기술이란 평생 문장에 달아둘 출처를 찾아 헤매는 여정이며, 나의 글쓰기는 인용문으로만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이다.

 

 

각주

[1] 서울경제(2024.1.21.), ‘[신조어 사전] 추구미’

[2] 유은성(2021.09.15.), ‘아카이브, 혹은 자기기술 시대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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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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