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용기의 펌프가 쏘아 올린 극복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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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먼 땅에서 혼자 살아가는 삶은 지속적인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벌써 지구 반대편 호주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딱 세 달이 된 지금. 이방인으로서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감지했던 모든 것들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먼저, 지금껏 세 달이 넘게 해외 생활을 하며 나와 나의 생활을 정의하고 그 특성을 정리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고 자란 곳에서 멀리 떨어져,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배우며, 그간의 고정관념을 깨고자 다짐한 사람. 여행도 공부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어 하는 막학년의 열정 넘치는 학생'. 하지만 이건 누구보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주관적인 시야에 기반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내 자아를 반영하기보다 이상적인 자아에 대한 기술이 더 가까울지 모른다.
세 달간 생활해보니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타인과 사회에 의해 여러 각도로 비치고 또 정의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치 무지개처럼. 물론 만난 기간과 시점에 따라 보이는 면이 상당히 다르겠지만, 적게는 한두 번, 길게는 매주, 더 지속적으로는 세 달을 꼬박 현지 외국인들과 함께하면서 더 느꼈다. 남에게 보이는 자아의 스펙트럼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크다는 걸 실감했다.
그 실감이 극에 달했던 공간은 바로 이곳. 학교생활에서 꽃을 피울 수도, 병에 걸릴 수도 있는 '팀' 활동이다. 소위 팀플이다. 한국에서 그랬듯 이곳에서도 나는 언제든 적극적으로 팀 활동에 참여할 의지가 샘솟는다.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싶고, 만족스러운 성취를 원한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이 강한 의지와 동기가 그저 '유학생'이기 때문에 때때로 남들 눈에는 희미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팀플을 할 때 갑자기 이들의 논의에서 제외되는 걸 때때로 느끼곤 한다. 이들이 말을 매우 빨리해서 단순히 못 말아듣거나, 혹은 내 참여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이들이 의견도 묻지도 않고 바로 일을 진행해버린다는 등의 케이스다. 그리고 그 이면의 이유는 내 언어 실력이 그들만큼 되지 못해서, 굳이 내 의견까지 묻기 귀찮은 이유가 더 큰 것 같다고 느낀다. 아니,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자면 그들에겐 유학생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사소한 배려조차 귀찮은 일이 될 수 있다.
처음에는 억울했다. 너희가 생각하는 멍청하게 앉아만 있는 유학생이 아닌걸. 그저 남들이 이끄는 버스에 올라타 자판 몇 번 두드리고 성적을 날로 받는 그런 도둑질은 내 인생에 없어. 오히려 버스나 비행기를 끌면 끌었지 단 한 번도 그저 누군가의 기여에 냉큼 올라타거나 자취를 감친 적은 맹세코 없다.
보통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막힘없이 소통이 가능하면 낯선 타인이라 할지라도 몇 번 만에 소위 친해지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지속적으로 만나더라도 상대에 대한 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지 않으면 상호작용의 수준은 피상적인 것으로 머물게 된다. 그저 상대가 완전히 소외받지 않을 수준으로만 고개를 끄덕이고 애써 미소를 짓는 그런 수준을 보이니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나와 그들이 공통분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은 언어의 종류만 다를 뿐 웃고, 울고, 박수 치고, 때로 무너지는 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오히려 반대의 관점에서 나는 그들에게서 공통점 - 이를테면 아침에도 부지런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오는 그 정성, 피곤하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어보는 최소의 성의 - 를 찾으며 작은 발견에도 즐거워했다.
이렇게 큰 공통점과 차이점을 바탕으로 나와 그들을 살펴보며, 굳이 남들의 시선에 주눅들 필요가 전혀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사실 나의 경우 대학 생활을 앞서 5년 넘게 했기에, 신입생인 호주의 에이틴보다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 다양한 구성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 배경과 내적인 동기, 내면을 전혀 몰랐다. 따라서 원래 하던 대로 언제나처럼 자신감 있고 당차게 내 의견을 개진하면 되는 것이다.
이 생각까지 도달하는 데는, 그 자리에서 놀랍게도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세 달 동안 쌓은 데이터와 생각들 덕분이다. 모든 논리가 정리되자마자 목소리를 냈다. "얘들아, 잠깐."
이들이 먼저 나에게 의견을 묻지 않아도, 역으로 내가 물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게 멋지다고 생각해. 너희들 의견은 어때?', '난 이걸 찾았어. 여기에 이렇게 적용하면 좋을 것 같아. 너희도 동의해? 동의하면 추가할게'.
공자 말씀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가르침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남들이 나에게 먼저 묻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고 스스로 손을 내밀고 목소리를 내보는 실천. 이 실천이 쌓이면 결국 내가 쏘아 올린 용기의 펌프는 날로 커져만 갈 것이다. 다행히도 이들은 제 제안과 의견에 웃으며 응답했고, 발표 시간에도 무사히 내 몫을 챙기며 "아이 럽 유어 아이디어"라며 나름 러블리한 리액션도 얹어 이들을 능청스럽게 대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외 생활을 하며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만나보니 경험이란 극복의 역사라는 걸 실감하고 있다. 두려움이라는 내면의 한계를 극복해 보는 것. 이로써 더 씩씩하게 내면의 가치를 확장할 수 있는 것. 단순히 무언가를 먹고, 입고, 어딘가를 가고, 인증샷을 찍는 것은 진짜 경험이라고 말하긴 부족하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열광하는 소비의 역사겠지. 그러니 나의 자력으로 어떤 한계를 극복해 본 적이 있느냐, 그것이 진정한 경험이라고 느낀다.
팀플에서 다른 현지 학생들에게 나름 억울한 시선을 받으니 그간 내 기쁨과 의지가 되었던 다른 친구들에게 더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됐다. 언제 어디서든 호주와 한국의 문화 차이를 질문해도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는 루크, 매일 아침 안부를 물어보며 사소한 일상을 매번 궁금해하는 에이든, 매번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팀플에서도 꼭 나를 챙기는 제이다, 그리고 언제든 마음을 터놓고 인생 얘기를 할 수 있는 절친 기숙사 친구들까지. 이 밖에도 두려움보다 즐거움, 환희, 감사함을 안겨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더 많다. 극복의 역사를 통해 이들의 귀중함이 가슴 깊숙이 느껴진다.
사람은 꼭 역지사지를 경험해야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마주하며, 세상에 대한 나의 촉수는 보다 선명해졌다.
용기의 펌프가 쏘아 올린 극복의 역사는 이제 어디를 향해 꼭짓점을 찍을까.
[신지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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