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청춘의 파편이 담긴 뮤지컬, '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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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렌트>가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내년 2월 25일까지 공연된다. <렌트>는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살아가는 젊은 예술가들의 생활을 솔직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1996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후 젊은 관객층으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해 연극 부문으로 퓰리쳐 상을 수상하고 토니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평단에서도 크게 호평받은 바 있다.
<렌트>가 초연된 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90년대에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보던 젊은 관객들은 이제 중년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연은 해를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젊은 관객의 호응을 얻으며 청춘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이 오랫동안 꾸준히 젊은 관객에게 사랑받아 온 이유는 무엇일까. <렌트>와 청춘의 접점을 이모저모 살펴본다.
<라보엠>에서부터 이어진 보헤미안 정신
<렌트>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보헤미안 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 <렌트>의 근간이 되는 작품인 오페라 <라보엠(La Bohème)> 역시 직역하면 '보헤미안들'이고, <라보엠>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앙리 뮈르제의 소설 제목은 『보헤미안의 생활 전경(Scènes de la vie de bohème)』이다. 두 작품 모두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본래 집시를 일컫던 '보헤미안'이 이 두 작품이 창작되던 19세기 말에는 이미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로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렌트>와 <라보엠> 사이에는 100년의 시간이 있다.<라보엠>이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의 예술가들 이야기라면 <렌트>는 20세기 말 미국 뉴욕에서 살아가는, 이른바 '엠티비 세대'로 대표되는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소설에서 오페라로, 다시 오페라에서 뮤지컬이 되며 많은 부분이 바뀌었어도 보헤미안 정신만은 그대로 이어졌다. <렌트>의 인물들 로저, 마크, 미미, 조앤, 모린, 콜린, 엔젤은 불안정하지만 이상을 좇고 금기에 도전하며 사회 규범에 저항하는 보헤미안들이다.
보헤미안이 특정한 연령만을 포함하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사회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때론 즉흥적인 결정에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은 일반적으로 젊음의 특성이다. 그래서 보헤미안 정신은 청춘과 쉽게 연결된다. 실제로 <렌트>와 <라보엠>의 인물들 모두 대부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20대이다. <렌트>가 유독 젊은 관객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청춘의 파편을 그려내다
많은 뮤지컬이 비장한 운명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인물은 비극의 한가운데 또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서 노래로 자신의 고뇌를 표현한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절절하게 펼쳐지기도 한다. 뮤지컬 특유의 이러한 비일상성은 관객을 작품에 매료시키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그리 비장하지도 않고, 하루 중 가장 많이 하는 선택은 점심 메뉴 고르기나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결정하는 것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렌트>는 전형적인 뮤지컬과는 결을 달리한다. 뚜렷한 기승전결도, 단독 주인공도 없이 여러 인물의 일상을 보여주며 전개되기 때문이다. 물론 <렌트>도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다룬다. 하지만 그리 비장한 방식은 아니다. <렌트>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복수나 금지된 사랑의 쟁취가 아니라 재개발 반대를 위한 공연,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 같은 일들이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 가장 크게 긴장감을 조성하는 건 80년대에서 90년대 사이 서구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은 현실의 질병, 에이즈다.
극중 엔젤의 죽음은 큰 사건이지만,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에이즈로 인한 주변 사람의 죽음은 당시 젊은 예술가에게는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겪는 삶의 크고 작은 고난은 엔젤이 죽는다 해서 마법처럼 해결되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잃어도 나머지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 기승전결보다 수많은 파편으로 구성되는 현실의 삶을 <렌트>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1990년대 미국 젊은 세대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영한 이 작품이 비슷한 나이대의 관객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영원한 서른 다섯 살, 조나단 라슨
<렌트>가 세월을 타지 않는 작품으로 여겨지는 건 극작가인 조나단 라슨의 영향도 크다. 사실 뮤지컬은 극작가의 이름보다 넘버나 배우로 기억되기 쉬운데, <렌트>는 예외적이다. 이 작품을 만든 조나단 라슨은 <렌트>의 브로드웨이 개막 하루 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으며 자기 자신의 이름을 작품과 함께 관객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일찍 찾아온 죽음이 그 이름을 지금까지 살아 있게 해준 셈이다.
<렌트>는 모르는 채 영화 <틱, 틱...붐!>으로 조나단 라슨을 알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본래 <틱, 틱...붐!>은 조나단 라슨이 <렌트>를 만들기 전 기획한 공연이다. 라슨이 죽은 이후에야 친구들이 뜻을 모아 무대에 오른 이 작품에는 라슨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다수 담겨 있다. 작품 속에서 무명이지만 언젠가 영혼이 담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말겠다는 꿈을 가진 젊은 예술가는 자연스레 라슨을 떠올리게 한다. 그 모습은 <렌트>의 인물들과도 닮았다.
<틱, 틱... 붐!>을 <렌트>를 만들기 전 라슨의 자전적 이야기로 본다면, <렌트>가 라슨의 수많은 불안 속에서 완성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멈추지 않는 시침 소리에 맞서며 불멸의 명작을 만들었지만, 정작 첫 무대를 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은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청춘의 상징 같다. 이제 라슨은 영원한 서른다섯의 모습으로 친구들과 관객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2023년, 한국 관객과 <렌트>
어느덧 한국에서 아홉 번째로 무대에 오르는 이번 <렌트> 역시 젊은 관객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2023년 한국과 1990년대 미국 뉴욕은 문화도 정서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불안정한 삶과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만큼은 <렌트>의 청춘과 2023년 한국의 청춘 모두 공유하는 것이다.
기후 위기와 환경 문제를 보면 미래에 우리가 먹고 마시고 숨쉬는 것조차 지금처럼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나의 삶을 보장해줄 것은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무언가를 소유하기가 어려워 늘 빌리거나 공유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늘 적지 않은 돈이 든다. 이런 상황에 놓인 젊은 관객이 불안 속에서도 '오직 오늘뿐'이라고 노래하는 <렌트>의 인물들에게 열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 <렌트>가 달리 보일지도 모른다. 집세를 내지 않겠다고 외치는 마크와 친구들보다 집세를 받아야 하는 베니의 입장에 더 공감하게 될지도. 하지만 그런 날이 와도 새로운 젊은 관객이 객석을 채울 테다. 가진 건 없지만 낭만을 품고, 사회의 모든 틀을 거부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렌트>는 그들을 기다린다. 그렇게 이 작품은 언제나 동시대 청춘과 공명하며 계속해서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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