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붕붕 벌 봄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가라 - 연극 비Bea

글 입력 2024.02.2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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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at’s probably why I’m a nurse, care assistant, even more than Sandra. Just hard to put it on a CV, you know.

 

mick gordon - bea 중 레이먼드의 대사 중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드러난 표상을 통해서 이해되지 않는다. 소설의 어떤 한 문장을 위해 쓰인 수많은 페이지처럼, 한순간 극적으로 배출된 감정과 마음은 어디에 적혀있는지도 모를 수백만 개의 페이지로부터 비롯된다. 한 문장의 장면의 감동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의 장면은 작품의 시간, 공간, 등장인물을 뛰어넘는다. 이것이 마음이 현상학의 방법론에 자주 머물러야 하는 이유, 시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행위에 늘 실패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감각기관을 가졌다. 눈과 귀, 코, 그것을 처리하는 뇌 모두가 한 사람의 영역에 갇혀있다. 그것들은 늘 시공간에 묶여 표상만을 관찰하며, 유쾌하고 불쾌한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자기보존에 집착한다. 만족을 얻기 위해, 너무 큰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우리는 나의 영역에서만 머물러있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타인과 관련된 일부만을 받아들인다. 나를 포함해 이 순간에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삼키기 좋을 만큼 이로 씹고 삼킨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보여준 한 줄의 언어를 내가 아는 철자로 어색하게 알아맞히는 것뿐이다. 계속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는 늘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에 완전히 공감하는 것에 실패한다. 하지만 그 아슬아슬한 교류 속에서, 인간은 충분히 사랑하고 미워하고 살아간다. 서로가 부족한 도구를 가진 인간임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한 이해 속에서도 다른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 얼굴을 사랑할 수 있다.

 

 

(Mumbling.) Windy walks with Bumble Bea. Over the hill and down to the sea.

 

mick gordon - bea 중 bea의 대사 중

 


오늘 리뷰할 연극 Bea는 공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8년째 가망 없는 투병 생활 중인 베아트리스(이하 비), 자폐증 누나를 둔 레이먼드, 좌절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캐서린으로 셋이다. 이제는 고통만을 느낄 수 있는 베아트리스가 레이먼드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의 자살조력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내용 전부다. 하지만 이 작품의 포인트는 안락사가 아니라 공감에 있다.

 

작품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마돈나의 'Ray of light'가 이 작품의 주제가 인간과 인간의 공감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이먼드가 처음 비를 만났을 때,-현실의 그녀는 힘없이 누워 중얼거리는 것만 할 수 있다.- 비의 내적 자아는 이 노래를 틀고 춤을 추고 있었다. 작품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레이의 등장은 그녀에게 한 줄기 빛처럼 새롭게 다가온다. 후에 비가 말했듯, 레이는 여러 이유로 인해 그녀의 새로운 빛이 될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공감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대표적으로 레이는 누워있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쾌활하고 수다스러운 비의 진짜 모습, 그녀의 내적 자아와 대면한다. 관객들은 작품의 중간이 돼서야 그녀가 고통만 느낄 수 있는 힘없는 상태라는 것을 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서, 그녀는 이 노래의 가사에서 나오는 'zephyr'가 무엇인지 묻는다. 레이는 처음에 답변하지 못하다가, 비가 어머니의 조력자살을 하려는 직전에서야 자신이 그 단어를 찾아봤음을 밝힌다-레이가 계속해서 단어를 찾는 행위는 이 작품에서 상당히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보통 그것이 산들바람으로 표현되지만, 때로는 자동차이기도, 때로는 그리스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한다.

 

레이의 이 답변은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짐작하겠지만-이 작품의 장면 장면과 일치한다. 우선 '산들바람'은 어린 시절 붕붕 벌과 같이 쾌활했던 진정한 비를 멀리 날게 하는 것이다. 비는 어린 시절부터 벌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노래를 불렀으며, zephyr의 의미를 설명하는 레이의 앞에서도 이 노래를 부른다.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레이와 비의 관계는 이렇다. 레이는 비를 이해하고 그녀가 날 수 있도록 함께 흘렀다. 이러한 레이의 이미지는 봄을 실어나르는 신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그는 에로스의 탑에 프시케를 옮긴 신이기도 했다.

 

레이는 동시에 그녀에게 욕망의 존재를 일깨워 준 존재기도 하다. 그는 처음에 그녀의 욕망을 대리한다. 그녀의 드레스를 대신 입고 춤춰줄 뿐만 아니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선물하고 함께 그 세계에 빠져든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의미를 찾아 레이가 정정하는 부분도 주목할만하다. 그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흔한 이름인 '버스'와 같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을 연기할 때, 레이는 자신의 위치와 비의 위치를 같은 자리에 둔다. 그래서 그녀의 욕망을 일깨우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하지만 비는 이미 욕망을 느끼지 못한 '끝난 상태' 였고, 이 사실이 그녀의 삶을 '물리적으로' 끝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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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know what my problem is Mrs. James? I’m too sentimental – always have been – and you have to keep your distance in my line of work. Feelings. Your woman Blanche is right about that, they compromise everything. “I have always relied on the kindness of strangers.” Still. (Shaking his head, his mind boggling.) Blanche Dubois. What a fucking cow!

 

mick gordon - bea 중 레이먼드의 대사 중

 


여기까지 읽었을 때, 레이가 완벽한 공감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레이가 완벽하게 그녀를 이해하고 그 옆에서 늘 좋은 존재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레이에게는 자폐증 누나 산드라가 있다.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한 그는 부모의 관심을 얻기 위해 비행을 저지르고 감방에 갇힌 전적이 있다. 감방에서 자살을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의 신발을 보면서 신발끈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그를 간호사, 요양사, 산드라 누나 이상의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산드라 누나가 버려지듯이 들어가 있는 요양원에는 가지 못했다. 그가 산드라에게 가지는 감정은 복잡하다. 그는 한평생 누나의 수발을 들어줄 정도로 깊게 사랑하지만, 누나에게 빼앗긴 부모님의 사랑, 자신의 삶을 망쳐버리고 자신의 헌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마음맹 누나로 인한 상처가 그 안에 켭켭히 쌓여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재현할 때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정신병에 걸린 언니 블랑셰를 떠나지 못하는 스텔라를 동정한다. 그리고 낯선 타인의 친절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의존적인 블랑셰를 비난한다. 하지만 이러한 증오만큼이나 거대한 애정이 그 이면에 존재한다.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블랑셰에 대한 스텔라의 사랑은, 그의 직업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비-아마도 누나 산드라가 투사된-에 대한 깊은 공감과 사랑과 일치한다.

 

나는 레이의 삶에 블랑셰와 같은 누나의 존재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게이라는 성적지향을 포함해- 산드라를 '자기자신'처럼 생각했다고 생각한다. 그 뜻은 반대로, 비 와도 하나처럼 느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 자유를 갈망했던 자신의 경험이 섞이고, 다시 죽지 않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일깨우고 싶어하는 비의 갈망이 다시 섞인다. 게이인 레이가 비에게 구강성교를 한 장면은, 감옥에 갇힌 자기 자신을 해방하는 것인 동시에 요양원에서 죽은듯이 사는 누나의 욕망, 살아있는 감각을 해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작업은 실패로 돌아간다. 남은 것이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살인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마주했을 때, 레이는 비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그는 좌절하지 않기 위해 비 모녀를 미워하는 것처럼 블랑셰에 대한 모욕을 하고 퇴장한다. 그것이 그가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의 교류는 봄을 알리는 산들바람의 신처럼, 그녀를 비로소 자유롭게 한다.

 

 

BEA: The apple tree.

MRS. JAMES: The apple tree.

BEA: She was a grand old lady.

MRS. JAMES: Yes she was.

 

mick gordon - bea 중 끝부분

 


레이먼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경험의 조각을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 그 불완전한 이해만으로, 우리는 숨쉬고 교류한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은 어떨까? 독자마다 내 생각에 다른 의견을 내겠지만, 나는 과학적 언어로 기술하건, 대단히 정서적인 언어로 기술하건, 자식은 부모의 조각이락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가 유전자의 복제본이기도 하고, 한 세계의 가장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존재다. 타인과 달리 그들은 분리되어있지 않다. 이미 같은 존재다. 그래서 더욱 서로를 상처입히고 사랑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때로 어떤 이들은 완전히 분리시킬 정도로 그 연결고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캐서린과 비는 끝까지 함께 한다. 캐서린과 비의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할머니 같은 사과나무'다. 비는 아주 어린 시절 이 나무에 올라갔다가 엄마를 약올린다. 캐서린은 그녀가 너무 걱정되어서 화를 냈는데, 그녀가 화를 내면 낼수록 비는 웃으면서 더 위로 올라갔다. 딸이 웃자 왠지 캐서린도 웃었고, 서로 걱정되는 동시에 함께 웃었다.

 

이번 연극에서 금간 벽 사이로 등장한 사과나무는 너무나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어린 아이는 높은 사과 나무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그 위에서 깔깔 웃는 비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비의 모습과 상당히 일치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사과나무가 생생한 과실을 달은 모습으로 묘사되고, 할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은 의미심장한다. 이 기묘한 간극은, '죽음 보다 더 끔찍한 것이 많은' 현실을 그들 나름대로 소화하기 위한 마음의 방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가 쾌활하게 웃으면서 달려나가는 모습은, 어쩌면 비의 환상일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의 끔찍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밝기 달려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희망, 죽고 나서야 침대를 벗어날 수 있는 비의 마지막 희망을 누가 꺾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죽음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 아니 우리 마음의 연약함, 아니 우리 마음의 힘을 묘사한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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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서 충분히 녹여내지 못했지만, 연극 Bea에는 셀 수 없는 디테일로 가득하다. 섬세한 단어의 사용, 단어를 통해 연쇄되는 장면, 등장인물의 섬세한 표현은 레이먼드가 충분히 이력서에 표현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 역시 묘사에 표현에 실패하고 있다. 이러한 각본의 디테일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는 감탄스러운 수준이었다.

 

각본의 번역도 매우 매끄러웠다. 다만 이 작품에서 언어의 뉘앙스를 너무 섬세하게 사용하는 탓에, 한 회차의 감상으로는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앵간한 사람들에게 모두 추천하고 싶은 연극이지만, 제일 좋은 것은 극본도 읽고 N회차 감상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연극이고, 개인적으로 요즘같은 시대에 이런 작품이 주기적으로 올라왔으면 좋겠다. 흙 속의 진주처럼, 그 찬란한 빛을 조금이라도 발견한 사람은 그 빛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땅을 파고 흙을 몇번이나 닦을 것이다.

 

작품에 이동이 많지 않아 많은 연출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날짜를 세는 귀걸이가 달려있는 감옥같은 방과 한순간에 넓어지는 마당과 사과나무의 배치일 것이다. 그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또 방문해서 감상하고 싶은 작품이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부디 말씀드리는데 후회하기 전에 예매하길 바란다.

 


[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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