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피드백 모임] 나는 찾고 있다2

김인규 에디터를 생각하다
글 입력 2024.02.2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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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프라인 모임, 4번째 조 : 김인규, 노세민, 서상덕

 

 

전편 계속.



세민이에 대해 실컷 이야기했으니, 이번 지면은 인규의 몫. 모임에 앞서 인규는 나지막이, 허나 묵직하게 말했다. 언제나 그의 말 어딘가에는 단단함이 베여 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의 분명함 같은, 그 부리부리한 눈동자에 걸맞은 무언가가. 아 물론, 나는 그가 자기 자신을 틈 없이 이견 없이 믿고 있노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눈동자에서 내가 읽은 분명함이란 무엇이었을까. 두 가지 대립항 사이에서 글 쓰는 나의 자아는 또 다른 쪽으로 뻗어질 제3의 길을 모색한다. 질문을 멈추지 않아, 나는 찾고 있다.


우리는 가장 애호하는 책을 서로에게 선물하면 어떠할까, 그가 넌지시 제시하였고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선물했다. 내 사상의 뿌리이자 시원, 하지만 더는 필요 없어진. 인규는 내게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세민에겐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선물하였다. 한편 세민은 선물할 책을 가져오지 못해 그 다음 모임에 전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라는 이름의 책이었다. 그에 얽힌 무지막지한 이야기들은 이상의 링크로 대체.


인규는 물었다. 당신은 나의 글 전반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으로 바라보느냐고. 내가 답하였던가, 대단히 사랑받을 만한 글을 쓰노라 여긴다고. 따순 문체 고운 활자들, 누구나 가까이 여길 만한 다복한 마음씀 그 안에 남실거리어니. 활자를 빚어내는 자, 어제도 오늘도 열심이시라면 아마 이해하려나. 형식은 내용에, 양식은 본질에 후행한다. 내용과 본질인 영감, 즉 닭이 먼저라는 말씀. 태어나기를 가열하게 희망하는 영감은, 그것이 안착될 만한 근사한 양식을 먼저 요구한다.


양식은 영감으로부터 태어난다. 허나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갈증으로부터 태어나는 응답. 영감이라는 모호함은 깐깐한 둥지를 찾은 비로소 자신을 허락하고, 그 위에 허물리듯 내려앉아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다. 근사한 양식이란 영감 그 자신이 어울려들 만하고 뿌리내릴 만한 대지. 영감이 그 자신을 최대한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글의 대지를 나는 사랑한다. 허나 어느 사람아, 그 글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될 수 있느냐고 내게 묻진 말아. 결코 논리 해부하여 이해할 수 없으나 속절없이 감각되는 이것, 근사함을. 그런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답이란 집요함이자 치열함, 이해되지 않는 것들뿐일 테니까.


근사는 최선으로 가깝다는 뜻이라, 근데 어디서 어디로, 어데 이르러 가까울는지 답으로 확정하여 당부할 수 없음이란 기쁜 우리 막막함, 벅차오르는. 나는 질문을 멈추지 않아. 그대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대 글의 다복한 차분함으로도 나를 속일 수 없어, 그 이면에 있어야만 했을 치열함을. 문장은 멋스럽고 문단은 구조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그의 글, 따순 문체 고운 활자들의 이면에 필연히 존재했어야 할 치열함을 나는 생각한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의 차갑고도 따뜻한 찬사란 걸, 이해하겠지 그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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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즈음 우리의 모임이 피드백이라는 목적에 있어 충실한가 생각할 적에, 아주 유쾌한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그것이 유쾌한 것은 모종 대안이 이미 내게 감지되어 있는 까닭. 그러니 마음껏 의문, 피드백이라는 단어의 의미 범위를 줄이고 넓혀가며 그것을 요목조목 바라본다. 우리가 나눈 그 기나긴 이야기란 무엇이었지. '그대 글을 보았소, 이것은 좋았소, 이것은 아쉬웠소, 다만 나는 부러웠소.' 부러웠소, 우리는 각 다른 자기 자리에 서서 마음껏 서로를 동경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넓은 의미에선 피드백이라 불릴 것임을 이해한다. 허나 좁은 의미로서도 그러한가, 첨삭하는 듯이, 비평 혹은 비판하는 듯이, 엄정하게 하였던가. 여러 가지 관점을 떠올리며, 끌어대어 분석하는 듯이 해부하고 톺아보았던가. 아마 아니, 우리는 오롯이 누리고 즐기기만 한 것 같다. 나는 유쾌하다.


우리는 유쾌했다. 웃음이 사방 바람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허나 나는 그 유쾌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른다. 다만 바람이 불고 있었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이 손잔등에 난 잔털의 보드라운 떨림을 통해 감각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서도 이미 느끼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 감각에 젖은 채 얼마든지 영혼이 날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바람 가운데에 서 아주 잠깐만 자유할 수 있었던, 우리네 단상에 절묘히 일치한다.


나는 잠깐만 자유했다. 한편 나는 무제한적 자유를 바라지 않아. 전편 말하였지. 내 기대를 묶어두는 까닭은 그것이 지나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내 염세가 자라나게 된 바는 저홀로 기대가 자주, 또 커다라이 슬퍼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즉 내 염세는 내 기대를 따라 자라는 그림자인 것이다, 친구들아. 얼마나 커다란 것이더냐. 그런즉 내 자유란 얼마나 어려운 것이겠더냐. 나는 스스로 구속되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그대들 곁에서 자유했다. 그건 내가 곧 사랑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힘차게 나아가는 글이 먼저 드러내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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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 글을 읽게 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나를 걱정하지 말아. 나는 내가 아주 행복하게 될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언젠가 이해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커다라이 기대할 줄 알며 그것은 영영 꺼트릴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아주 훌륭하게 염세할 줄을 알아, 마침내 내 영혼 안에 깃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대와 염세, 사실 그 외 무엇이 되었건, 인간 정신에 대해 나는 중립상태를 요구한다. 온 글과 글 이전의 정신이 지향하고, 스스로 독하게 지시하는바. 양립항이 팽팽히 대립하며 만들어내는 긴장 하의 중립 상태를 사랑한다. 교착화된 전선 戰線, 팽팽한 대립의 긴장감 하에서만 나는 나로부터 자유하다.


말하자면 염세의 운무가 기대를 잠식하고, 다시 맹렬한 기대감이 염세를 태워버리는, 일진일퇴하는 이 끝없는 투쟁 상태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이처럼 제한적으로 자유하고 온전히 유쾌하다. 적어도 내 염세가 이제는 나의 소유이기에, 나의 사상으로부터 몸체로 전이되었기 때문에 내 이성은 안녕하다. 쉬운 말인즉 더는 이성의 고됨으로 쥐어짜 열심으로 행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닌, 하품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되어있음이다. 나는 먹고 마시고 숨 쉬고 걷는 듯이 염세한다. 저 알아서 뛰는 심장, 불수의근 不隨意筋 처럼. 마찬가지 살아가는 모든 순간 덜컥하며 기대해버리게 되는 듯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고 의지로부터 자유하게.


나는 인간의 믿음, 그 자체만을 놓고선 신뢰하지 않아. 믿음의 신실함만으로 가타부타하지 않아. 믿으려는 자의 마음을 이해할 뿐 허나, 언제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답이다. 하여 뜨거운 모든 것을 불신한다. 나는 뜨거울수록 차가움을 원한다. 내가 무언가 덜컥 믿어버리지 않기를 원하고, 무언가 강렬히 갈망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기를 원한다. 내재화된 자기비판과 경멸, 전의식화 前意識化 된 자가 변증을 희망한다. 오판과 의지로부터의 자유, 나의 무애 無碍. 내 삶엔 오답이 너무 많았어, 나의 모조리 뜨거움으로 인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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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참, 내 글이 또 미궁 속으로 빠지기 시작하는군. 지시 대상이 모호하고 그에 대한 나의 태도는 더욱 모호하다. 이게 내 글을 안갯속으로 밀어 넣어왔다. 실은 말이지 나도 알고 있어 그대야, 내 글이 모호해지는 까닭을. 그건 내가 어느 한 가지 의미를 미리 붙잡아 유념 속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조리 부정해왔기 때문이다. 에잉- 쯧, 이것조차도 모호하군. 내가 이걸 충분히 전달할 수 있더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허나, 아니 어쩌면 그러므로, 나는 찾고 있다. 내 글이 근사해질 날이 오리라. 언제나 못마땅하여 나는 안도한다. 적어도 내가 아직은 멈추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규는 이제 나를 향해 곧장 물어왔다. '나는 당신의 글이 지니고 있는 짙은 해체주의에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그대는 온통 부정하며 해체해 나가고 있고, 나는 그대를 나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해체는 해체에 머물러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 그런 당신의 사상은 어느 의미에 그 뿌리를 두는가.' 그의 따스한 목소리 너머에 있는 카랑카랑한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가리키고 있었다. 두 가지 극단이 병립할 때 생겨나는 긴장감과 구조적인 진실함을 보았다. 신뢰할만한 것.


그는 내게 질문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대는 무엇을 믿는가, 무엇이 그대의 의미인가. 나는 찾고 있다. 이미 그 의미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 분명한 믿음 같은 것이 내 사위를 두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잃어버리었다. 어쩌면 그것을 영영 찾지 않아도 좋을 것만 같을 때가 잦다, 내가 그 안에 살고 있으니. 허나 나는 찾고 있다. 글 쓰는 사람인 이상, 그래 네 말마따나, 우리는 끝내 의미 위에 우뚝 서야만 한다. 오답일지언정.


그래 오답,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그럼에도 모든 사상은 허약하나마 한 가지의 최종 명제와 논리적 대지에 뿌리내려야만 한다. 밟지 않고 서 있을 수 없고, 서지 않고 펼칠 수는 없기에, 이것은 필연이겠지. 에이, 싫어라. 그럼에도 우리는 흔들리는 돌 위에 서서 자신을 펼쳐내야만 한다. 오답,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우리는 활자를 파먹고 사는 지렁이 같은 존재인 하에, 더욱 가까이 붙어댈수록 아무것도 가리킬 수 없는 기쁜 사람들이다. 언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아무것도 쉬이 쓰이지 못하는 짱짱한 구속감, 팽팽한 장력에 긴장하는 철제 와이어의 서슬퍼런 소리. 오답에 대한 두려움과 필연적 감각이 평형을 이루어 나는 아무것도 얼른 생각해내지 못하곤 해. 나는 자주 멍청한 사람처럼 존재한다.


허나 나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내 안에 있고, 부정치 못하는 방식으로 그것의 필연성을 감각하나, 다만 아직 깨닫지 못하였을 뿐이다. 나는 찾고 있다. 허나 나는 나를 발견해 나갈 뿐, 내 바깥에서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질문은 이미 충분했으되, 그저 대답을 잃어버린 까닭에. 이제 나는 뻘 위에 멀리 흩뿌려 놓은, 밤 머리 위로 아득히 쏘아낸 사금 조각을 헤매고 있다. 다만 내가 쓰는 일이란 찾아가는 것, 이 안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있어, 찾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 우리는 지치지 않을 뿐이다. 얼마든지 힘겨워하면서도 그것을 채 놓지 않으려 드는 사람의 심줄 궂은 고집을 나는 사랑한다. 마지못함과 오기, 의기와 신실함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집념을 사랑한다. 나는 그러한 사랑으로 이 속을 까뒤집고 안을 헤집으며 찾고 있다. 우리는 지치지 않을 따름이다.


나는 나의 분명함에 말미암아, 내 안에 너무도 단단하고 유연한 대지가 있음을 안다. 내 사상이 그 매끈한 허리로 하여 얼마든지 허물릴 나약함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나는 그 두 다리 끝으로 전해지는 굳건한 반작용을 느끼고 있다. 바로 그 대지는 어디인가, 대지는 곧 믿는 바 의미. 가장 단단하고 확신으로 가득 찬 영감이라,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어야만 하며, 그리 된 우리의 대지. 나는 그들이 나를 이해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신념의 대지를 파괴하고, 수없이 떠나온 사람들이다. 무릇 글의 지혜를 탐닉하는 자라면,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제 삽으로 퍼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으리라. 그래야만 하리라.


***


힘찬 글 분량 조절 대실패. 세민아 네 피드백은 내게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치지 않는 따름이다. 인규야, 네가 던진 질문을 며칠 곱씹었다. 나는 아예 까마득한 것과 바깥의 것을 찾기보다는, 이미 이 안에 존재하고 그 안을 살아가는 나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오답인 정답, 암암리에 겨뉘인 바 소기 의미란 무엇인지. 그건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부정해온 탓에. 그럼에도 나는 손쉬운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전히 쉽게 태어나는 것을 믿지 않는다. 양 극단을 모조리 거치고 난 다음에야 열리는, 무하한 변증의 행로를 지향한다. 조금 모호한 것이, 아무래도 메타적이구나.


나는 인간의 믿음 그 자체만을 놓고선 신뢰하지 않아. 그리고 이 표독한 시선은 나에게 가장 적나라하다. 뜨거움에 말미암아, 오답이 너무 많았던 내 삶. 오래도록 나 바라온 것은 오판과 의지로부터의 자유, 나의 무애. 기대와 염세가 개중 마찬가지로 그러하듯이, 뜨거움에는 상응하는 차가움을 요구한다. 그리곤 양가적인 태도를 최대한도로 드러내 버린 다음,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모순 앞에 허물리는 무력함, 소강하는 감정. 어느 한 쪽 변에 대한 집착이 무력화된 다음, 중앙으로 추락하듯 소실하는 감정선, 마침내 변증법적 합이라는 제3지대로의 길이 열리리. 역설을 통해 태어나는 의미의 구조적 정합성, 내 지향점이 이것이긴 한데, 어째 답이 충분한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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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찾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명확히 감각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직 말할 수 없으나,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이미 믿음의 영역을 한참 지나쳐버린, 지나치게 굳고 빠른 나의 상상, 나의 영감, 내 영혼의 감각. 내 말은 오직 나의 영감을 밝혀나가는 작업이요 과정 속의 것. '자기 안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아', 말마따나 나의 영혼은 지나치게 빨리 모든 것을 예감하기에. 언어는 언제나 한참 뒤의 현상이었다. 적어도 내가 명확히 부름 받고 정확히 이해받기를 원하는 한! 


이것으로 너희에 대한 나의 감상을 마친다. 넘쳤으면 넘쳤지, 결코 모자람이 있지는 않으리라. 참 우리 말이 많았다. 족히 네 시간은 떠든 것 같은데, 세민이가 먼저 장례식장을 향해 떠나고 난 다음에도, 잘 볶인 마라샹궈를 먹으며 나눈 이야기들이 더욱 많았다. 우리 사이에 무수한 말이 있었을 뿐 개중 아무런 사랑의 헌사가 없었으나, 나는 이것이 얼마나 알찬 사랑의 열매인지를 알았다. 그것이 부끄러움에 한사코 제 얼굴의 본심을 가리려 애쓴다 할지라도, 나는 연역적 관점에서 그것의 필연성을 느껴버리었을 것이다. 


비가 내린다. 나는 데미안을 편 채로 엎어두고 글의 첫머리와 꼬리를 쓰고 있다. 비가 발굽소리를 내고 영감은 처마 아래로 흩어지고 있다. 온 듯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나의 영감, 나는 바쁘고 달뜨고 애가 닳고 초조하여 기쁘다. 나는 누구나 할 줄 아는 것처럼 기쁘지 못하건마는, 누구도 나처럼 기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한편 세민이는 지금쯤 장례식을 빠져나와 억세진 비 위로 튀어 오르는, 자신의 혼란한 감정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고, 인규는 오산행 빨간 버스의 열세 번째 차창에 기대어, 빗방울로 불투명해진 차창을 긋는 비의 궤적을 따라 하염없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기쁨이란 다만 그에 못지 않아 견딜 만한 슬픔을 매달고 온다는 것을 우리는 차갑게 안다. 그건 우리의 시간이 너무 유쾌했던 탓, 우리는 필연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그것은 다만 아무것도 아닐 뿐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세 명의 얼굴을 보아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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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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