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슬픔의 후에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인규씨에게
글 입력 2024.01.2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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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인규씨가 내게 이 책을 권한 것에 이유랄 게 있다면은, 아니, 그 이유야 내가 영영 모르는 것입니다만, 내가 멋대로 해석해보려 든다면은, 그건 내게 가득 차 넘실거리는 슬픔의 뉘앙스에 자연스레 그 까닭을 들이댈 터입니다. 나는 내 글에 그 지독한 것이, 그 이전에 내 삶에 잔뜩 묻어 있음을 잘 알아요. 털어버리고도 싶으나 가끔은, 그건 너무 아까워 일단 움켜잡고 있습니다. 딱히 그것 말고 이 손에 쥐일 수 있는 것도 없는 까닭입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 이제의 나는 그다지 슬프지 않습니다. 다만 기억에 오래 있어, 가깝고 익숙할 뿐이에요. 어머니 된장찌개 같은, 슬픔이란 내게 있어 딱 그 정도의 익숙함. 타향 여기 도회지의 밥상, 그 뒤편에는 비싼 임차료에 상응하는 값싼 식재료의 민낯을 가리기 위해 응당한 조치들이 취해질 테요, 조미료의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내 마른 입과 불모의 혀끝에, 어머니 된장찌개는 그저 익숙함 그뿐입니다. 허나 그 정도의 익숙함, 더는 입을 간지럽히지 못하는 내 낡은 된장찌개는 입 대신 눈가를 쿡하고 찌를 마련일지도. 


나는 그다지 슬프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잃어버린 것을 찾고 싶어요. 허나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그게 참 묘연한 일이지요. 차라리 한없는 슬픔 속에 있을 적에는 길이라도 선명하였으나, 감각이 일러주는 그 길, 지금은 그저 가만합니다. 바람이 멎어버렸어요, 나는 아직 길을 다 찾지 못했는데 말이죠. 뜬금없는 생각이 떠오르는군요, FPS 게임을 해보았습니까. 캐릭터가 총에 맞으면 총알이 날아온 쪽의 화면이 붉게 점멸하곤 하는데, 딱 그 비유를 억지로 가져와 보고 싶어집니다. 


차라리 한없는 슬픔 속에 있을 적에는 어디에서, 어디로부터 도망쳐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길은 그 반대편으로 향해 있는 것이었지요. 본능이 가리키는 방향, 쓰라림의 반대편으로. 나는 길을 찾고 싶었으나, 슬픔에 밀리어 더듬대던 그 가야 할 길이 끊기어 버렸습니다. 나를 인도하는 손길과 나를 밀어대던 고통이 멎어버렸어요. 그렇다면 기쁨인가, 나는 요즘 이것을 골몰합니다. 


기쁨인가, 슬픔이 끝나버린 빈자리에 자연스레 기쁨이 밀어 차는가. 찬 공기가 더운 공기를 밀어내듯이, 찬 바다가 더운 바다 밑으로 내리깔리듯이, 그렇듯 순환하며 자연스레 그 빈자리를 채워대는 것인가. 나는 영 의심스럽습니다. 더러 고요한 평화와 그에 기인하는 행복감을 누리고는 있습니다만, 이게 그 질긴 슬픔의 대가, 그만하던 슬픔에 상응하는 기쁨, 그러므로 보답인지를 모르겠어요. 나는 아직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의문이 남았습니다. 질문이 남았습니다. 그토록 오랬던 문답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최초 내 글 이전의 긴 상념은 슬픔으로부터 출발하였고, 그러므로 글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었으며, 모든 글은 그 머리부터 꼬리까지, 지금껏 써낸 것들과 아직 채 써내지 못한 것, 상념 속에 똬리를 트는 것에조차 구석구석 모조리, 슬픔과의 이별을 지향해왔습니다. 마침내 이별하기를, 글 속에서 나는 행복을 꿈꾸어 왔습니다. 미덥진 않지만, 마치 기도가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나를 인도하리라 믿어봄이란 어려움인 것처럼, 불안하지만 그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의 마음 즉, 불온한 희망으로. 그러다 어찌저찌 나는 지금에 도착했습니다. 슬픔과의 이별이 꼭 행복한 시작이라는, 그런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생각될 만한가. 드디어 내가 이 질문에 도착합니다. 


그럭저럭 나는 살만합니다. 살만한 인생이에요. 살만함, 그것은 내심 좋고 못내 흥미로운 것이라기보단, 겨우 타협해볼 만한 것. 살만함, 완전한 긍정도, 완연한 부정도 아닌 중간 상태. 이 모호함이란 인간과 인간의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고로 슬픔의 후에, 거기서부터 곧 기쁨인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 있어, 아직 찾지 못한 게 있어, 나는 갑갑합니다. 


하여튼 나는, 아직도 길을 찾으려 듭니다. 찾을 필요가 사라졌으니, 찾지 않으면 그만이련만... 차라리 이 덧없는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저 받아들이고 지금을 누릴 수 있다면, 카르페디엠, 그럼 나는 마침내 무하한 사람이 되어, 방랑자와 집시, 바람이 적은 사람들처럼, 바람처럼, 그저 이리저리 흩뜨리이듯 자유로이 해체되어갈 수 있을지도, 바람에 점차 삭아 풍화될 수도, 그러므로 닮고 닮은 끝에 인파 속에 녹아 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허나 나는 계속 길을 찾고 있어요. 정말 간절합니다. 그러니 글을 쓰지 않겠습니까? 글 하나에 들어가는 비효율적인 시간을 고려해보면, 그건 반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 됩니다. 최근엔 사랑과 사랑스러움, 그리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허나 내가 애초 하려 했던 이야기가 이게 아닌데, 나는 문단 속에 길을 잃었더랍니다. 어설프게가 아니에요. 완전하게 길을 잃어버렸죠. 마치 문을 열면 두 개의 문, 그 중 하나의 문을 어렵사리 열면 또 두 개의 문, 나는 쌓아온 문단이 열어젖히며 일단 우직하게 나아온 문 너머에 길을 잃었습니다. 새하얀 방, 백지로 점철된 그 기하학적 미궁 속에... 그러므로 완전히. 


나는 그다지 슬프지 않습니다만, 길을 찾고 싶어요. 정말 간절합니다. 지금도 허락된 모든 순간에 상념은, 낡은 전동기를 돌리대며 꾸르럭 꾸르럭 문장들을 생산합니다, 꾸줄꾸줄 땟물이 타는 문장들을. 그리고는 모든 것이 일각 一刻 이내에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나는 지켜만 봅니다. 안타까움을 느낄 단계는 이미 지나버렸어요. 그것이 피해 볼 길 없는 촘촘한 외다리인 이상, 안타까움이라는 감정마저도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시간의 문제, 한 개인을 영영 점유해버릴 것 같이 끈질기고, 그저 막연한 궁리만을 낳도록 하는 모든 의뭉스런 감정들마저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량한 위로의 논리가 싹을 댈 만한 문장이 아닙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 하는 낙관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잡을 수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허적함과 서늘함입니다. 익숙한 체념, 그리고 더는 작동하지 않는 위기의식. 


나는 그 혼란 속에 그저 서 있습니다. 갈피를 잃어버린 길 위에, 아주 벌러덩 누워 있습니다. 허나 적어도 내 삶이 내게 마지막 기쁨인 까닭은, 이런 귀치 않은 것과 불길함에 가까이 더불 수 있다는 것, 사실 그것 말고는 딱히 없습니다.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은 것들에 부러 행복으로, 환희와 기쁨, 가장된 그 기쁨이나 혹 필요에 의한 환희로 가닿을 필요가 없는, 나의 익숙한 체념입니다. 앞서 말한 시간의 문제라는 것이 가리키는 것은 이것이지요. 나는 불안한 모든 것과 불길한 모든 것들의 친구입니다. 다만, 비정한 친구라는 게 문제이지요. 


*


아 이 글, 정말이지 질투가 나서 못 읽어주겠더군요. 슬픔을 과장없이 드러내고 담백한 표현들로 담아내다니, 근사하게. 근사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빼앗아버린 그의 훌륭함 앞에, 나는 가림 없는 질투를 쏟아댑니다. 그것은 동경이지요, 나는 동경과 질투가 맞닿아 있는 것에 별다른 유감이 없습니다. 거리낌이 없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한 인간의 마음은 산뜻하고 안전한 것으로만 구성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것을 떠올리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동안에, 실은 이 안으로 밀어 넣는 동안 나는 무언가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찾고 있습니다. 


나는 찾기 위해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만, 꾸준하고 미련하고 무식하게, 아, 간만에 수치가 범람하는군요. 하마터면 나는 지금 쓰고 있던 글을 모조리 찢어버릴 뻔했습니다. 이 글의 차분한 태도와 맵시 있게 포장된 활자들이 내게 가림없이 말했어요, 너는 네가 그토록 경멸하고 부정해오던 바로 그 무언가이다. 나는 단언과 직설적인 화법을 싫어합니다. 적확하지 않은 지시, 성급하게 선언되는 아포리즘들. 짧은 망설임으로 태어나 희미한 보론만으로 선언되는 것, 내용이 아닌 태도가 그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려 드는 것들, 즉 의도와 상관없이 구조적으로 진정성이 결여된 것들을. 물론 내가 쓰는 처지가 되고 나서야, 애초 그걸 모조리 피할 길은 없었다는 것을 수치와 반성으로 자각하고 있긴 합니다마는... 나는 본디 완고하고 타협이 잘 안 되는 사람이었으나, 어느새 내가 부정하던 것이 되어 있었어요. 아 못마땅합니다. 아, 가슴 터지도록 분하고 못마땅해요. 그래서 나는 기쁩니다. 고통만큼 정직하고 왜곡으로부터 자유한 것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닌가, 단순 피학증인가. 


나는 내 글이 아름다워지기를 치기 어리게 소망해왔습니다. 아름다운 글을 열렬히 사랑하고, 그것만을 온 진심이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미학, 그 모호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름다움을 향한 상승작용을 막지 않고 두었습니다. 그게 나를 활활 태워주기에, 그 뜨거움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반드시 겪게 마련이었던 것, 자기혐오도 나를 관통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 글과 태도가 무엇이 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체념인가, 적확한 것으로서는 아니, 그럼에도 의지인가, 여전 의뭉스러움으로써 아니. 신나게 해체된 상태. 나는 찾고 싶습니다. 아아, 그래서 질투가 났습니다. 눈부시더군요. 



최대한 장황하지 않게, 간명하게 쓰고 싶었었는데 솜씨는 부족하고, 못마땅하고 또 못마땅합니다. 책이 나를 찌르고 드러내 버리는 것, 옆구리를 찔리어 기어나오는 외마디 비명 같은 고해. 길게 쓰는 것은, 짧게 쓸 능력이 없는 사람의 어찌할 수 없음이라는 걸 이 글은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지난번 우리 오프라인 피드백 모임에서, 여러분이 내게 준 칭찬에 대해 내가 기실 부끄러움을 느끼던 까닭과 정확하게 일치하는바. 나는 뭔가 길게 써내고는 있는데, 동어반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근 2년 동안 이러고 있었으니, 이건 2년 만큼의 진심입니다. 그 무게감에 대한 해석은 각자에게 놓여 있을 터. 나는 설명하고 설득하는 데에 어려움과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 그럴수록 설명은 길어지고 각주도 길어지지만, 그렇기에 그 불가해함과 어려움을 2년 만큼은 알고 있는 셈입니다. 


아, 진짜 내가 쓰던 글을 다 갈아엎어 버리고 싶어졌어요. 이건 찬사입니다. 나는 언젠가부터 극치의 마음을 부정적인 낱말들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내가 느끼는바, '최고'나 '가장'이나 이런 납작한 낱말들은 세계를 흐르며 실컷 인용되고 있어, 내 가슴의 뜨거움을 아주 조금만 담아낼 수 있었기에... 말 그대로 욕하면서 읽었습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비속어를 소리 높여 내지르면서 말이죠. '와- 미친- 돌았네-' 이런 것, 이해하시려나요. 

 

내 쓴 글을 순간 버리고 싶어졌어요. 이미 예정된 실패로 내가 가고 있다 생각하며 글을 써왔더랬지만, 어쩜 그것은 자신의 기대와 그 좌절에 대해 미리 걱정해대는, 유약한 자기방어적 본능. 이렇게나 격렬한 수치와 부정이 아직 가능하더라면, 그 이전까지의 미미한 것들을 연기 煙氣 , 애틋한 연기 演技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도 내 글과 그 이전의 사상을 웬만큼은 경멸하고 있지만, 가장 좋은 경멸은 이런 경멸입니다. 무력감을 주는, 압도적인 것. 이 상태에서만이 태어날 수 있는, 커다란 충격과 쇄신을 내가 몇 번은 겪어본 까닭일 텝니다. 

 

허나 애초, 내가 어린 때 찾던 것이 이런 책이었는데... 한창 방황하던 어린 날에 나는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더랬습니다. 내 안에 무수히 피어나는 감정 그 혼란의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을 만한 무언가, 기준 혹은 준거, 또는 지혜를 찾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찾지 못하였어요. 그 이유를 나태에다 두진 않겠습니다, 운이 없었다고 해야 옳겠지요. 그 다음 수순의 행보는 지금까지의 삶입니다. 치기와 낭패 사이, 어리석고 애틋한 오고 감.


내가 어린 때 찾던 것이 이런 책이었는데… 그저 수려함이나 화려함이 아닌, 차분하고도 강력한 낱말 낱말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한데 모여 어우러지는 구조적 일체감. 나를 쉬이 무릎 꿇리는 것, 이 책이 내 모든 사색이 시작되기 전에 내게 왔다면 어떠했을까. 준비된 이해력이 부족했을지언정, 그마저 이 책이 내게 가르쳤을 터. 나는 사모하는 구절이 사람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요. 또한 너무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을 텝니다. 무언가 잃어버리지 않았거나, 적게 잃어버렸을 텝니다. 그리 경멸하지 않아도 되었다거나, 적어도 해온 것처럼 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나는 내게 충격을 주기 위해 너무 많은 경멸을 자행해왔어요, 내가 잃어버린 게 무엇일까요. 어쩜 너무 늦게 온 것, 그저 아쉽습니다. 이게 감상평 요약이에요.

 

**


그러나 오래된 경멸이 과잉감정을 산산이 때려 부수고 나면, 언제나처럼 본디 체념적 염세로 돌아옵니다. 격랑이 잦아든 해역처럼, 잠잠해진 가운데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그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다르다. 그의 슬픔은 훌륭함과 고됨이고, 나의 슬픔은 어려움과 모순입니다. 아이 참, 또 모호하네요.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이다."



그러므로 보론, 그와 내가 공유함으로써 완전히 동의하는 유일한 지점은 이것입니다. 굳이 슬픔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이해와 공감의 영역에 대해서도 이 태도를 고수합니다. 불신, 몸소 겪은 것만이 곧바로 말과 표정으로써 공유되고, 그마저도 왜곡되거나 호도되기 일쑤였음을 오래 보아왔습니다. 내 마음으로서 먼저 그러했어요. 혹여 이것이 그저 나만의 수상함이거나 모자람인가, 딱히 그리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내가 겪어온 슬픔. 


그의 생애를 몰라 쉽게 뱉어져선 안 될 말이겠지만, 느낀바 그의 슬픔은 타인에 대함이었어요. 오독일지언정 이 감상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게, 작가 자신의 슬픔이랄 것이 서사의 형태로 드러난 바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지면을 할애하기에 부끄러워서 작가가 빼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 책만 놓고 보자면은 그의 슬픔은 온통 다른 이를 향하고 있고 위하고 있고, 그럼에도 그 안에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함과 치밀함을 통해서. 자신의 온몸으로 느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람의 단절성을 이해하기에, 그의 타에 대한 슬픔은 훌륭하고 고된 것인즉 노력의 산실로 다가옵니다.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한편 나는 지독하게 리얼한 사람이에요. 그건 위선을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아주 격렬히 싫어해요. 그래서 위선 비슷한 것에 대해서도 경기를 일으키지요.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게 내 인생을 내내 어렵게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내가 고매한 정신을 갖고 있는가, 아니,  나는 자주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몸소 겪어 아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감하지 못합니다. 가끔 울고 싶어지는 밤이면 무작정 공감을 남발하고 싶을 때도 있으나, 그건 내게 허락되지 않아요. 그리하여 타인의 슬픔에 무감한 편입니다. 내 몸으로 우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대가 아프노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공평하게 내게도 그리 대해주지요. 


그러니까 내 슬픔은 순전히 그 책임을 나에게 두고 있으나, 그건 내 선택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리얼하거나 완고하고 분명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건만,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렵군요. 참으로 어려워요. 나도 동주처럼 진정성 있게 다정하거나 벌거벗은 가슴으로도 순수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위선을 싫어하나, 가장 솔직한 것으로 내가 표현되기에는 제약조건이 너무 많습니다. 나의 차가운 위로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 닿지 않았고, 비정한 슬픔과 냉정함은 사람들에게 배신과 충격, 아픔이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허나 분명 더 정확한 언어가 있을 테요. 내가 온전히 나로서 가되, 그대들에게 마침내 닿을, 모종의 경로로 이어진 문장의 길이. 나는 찾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

 

 

불법인용이 아닌가 두렵습니다만, 저자가 인용한 장승리 시인의 시, <말> (무표정, 문예중앙, 2012) 일부를 또다시 뜯어서 여기 가져옵니다. 가장 솔직한 나로서 사람들에게 가는 법, 아무리 치열하게 생각하고 자책으로 해법을 찾더라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 대가는 경멸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주고, 내가 나에게 또 한 번 끼얹어주는. 허나 자기 경멸을 대가로 바쳤다 하여, 나의 진정성은 담보됩니까. 뜨거운 외침으로써, 절로 그 진실함이 확증됩니까. 나는 모르겠습니다. 혹여 담보된 진정성에도 불구, 누구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내 마음은 그렇노라, 이제 충분하노라 외치고 싶으나, 나는 그걸 승인해줄 수가 없어요. 인가 처리가 안 됩니다. 늘 답답하였고, 그래서 나는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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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이제의 나는 그다지 슬프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몸소 겪은 것을 토대로 하여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었음은 나의 기쁨. 그러나 내가 이 책처럼 슬픔을 노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무력하게 합니다. 내 슬픔이 사라진 것은 내 정열이 사라진 뒤. 왜냐하면 내 슬픔은 내 정열에서 피어나는 것이었기에. 나는 슬픔을 말려 죽이고 싶었기에 뒤주에 가두었으나, 열매를 말리느라 뿌리까지 솎아버리게 되었음이란… 그 사이 함께 사라진 것이 내 정열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슬픔의 후에, 그럭저럭 살만한 삶에 도착하였으나 나는 아직 찾고 있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지금 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내 북극성이 되어주진 않을 거에요. 내 모든 사색이 시작되기 전에 왔더라면 모르겠으나, 이미 감내하며 살아온 시간이 있기에. '단 한 권의 책이 그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는 인생은 얼마나 안타까운가',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내 식대로 오역하는 것으로 그 까닭을 증보합니다. 대신하여 이 책은 기억 속에 온전히 기록해두고 떠납니다. 언제라도 손 닿을 만한 곳에 두려고 합니다. 책상을 정리해야겠군요.  


그대는 이 책의 종장을 덮으며, 책꼬리 뒤로 무슨 상념에 빠지었습니까. 다시 반듯하게 정렬한 책의 정면에는 어느 사내의 뒷모습. 나는 패배의 기억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감정에 바래지 않는 게 없던마는, 오래도록 간직되는 수치였으면 좋겠군요. 그게 내가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나를 더 아름답게 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슬픔의 공부라, 내 것으로는 구도 求道를 그 답으로 택하겠습니다. 다음 우리 만날 적엔, 그대의 답을 들려주십시오. 그대에겐 슬픔이 무엇인지를.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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