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피드백 모임] 당신 곁에 서서 - 예언자를 읽고

상덕씨에게
글 입력 2024.01.25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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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슬픔의 후에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인규씨에게>에 대한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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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마음을 전하는 방식도 있다는 것을 덕분에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이전의 글에서 아트인사이트를 ‘얼마든지 안아줄 수 있는 누군가의 품’, ‘언제나 나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백지’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하셨던 문장이 상덕씨에겐 과장이 아니군요. 자신의 글의 형태를 ‘길 잃음’ 혹은 ‘포기’라고 종종 표현하시지만 상덕씨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특권이자 능력이라고 저는 거듭 힘주어 말합니다. 다들 상덕씨를 놀라워하고 그 만남과 대화를 기꺼워하는 것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상덕씨가 가지고 있는 덕분이겠죠. 예컨대 이런 글. 한 호흡으로 쉬지않고 달려나가는 글. 스스로에게는 고민이겠지만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글의 분량. 그리고 형식적 아름다움에 대한 치열한 고민.


사유란 것은 압축적이고 함축적으로 요약될 때 가치가 배가되기도 하지만 그 자신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분량을 할애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길을 잃고 끝도없이 뻗어나가는 형태의 글)은 버릴 수 없고 글을 쓰다보면 누구나 언젠가 거쳐가야 할 고민이자 과정이라는 점을 생각합니다. 그것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지나치게 자기검열을 하는 편이거나 그 스스로 사유의 부실함과 빈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겁니다. 아아 저는 전자에 가까운 편이라(혹은 그렇게 믿고싶은 편이라) 방금도 자연스럽게 앞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고 앞으로 돌아가 같은 문단을 5번이나 읽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글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함에 대한 고민과 이런 나의 긴 글 따위 아무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줄리 없으니 어떻게든 줄여내고 싶다는 욕심이 두 문단만에 부딪히는군요. 상덕씨의 고민을 조금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 어떤 방향으로든 한 호흡에 끊임없이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은 사실 굉장한 재능이라, 재편집하는 냉철한 마음과 구조적으로 재단하는 기술을 갖춰낼 수 있다면 보다 압축적이고 경제적이고 매력적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글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저는 마음대로 품어보곤 합니다.


그래서 풀려나오는 사유의 달음질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하는 당신을 보며 저는 그 끝이 어디인지 더 쪼개고 나누어 끝까지 풀어놓아보자는 의견을 건넸었죠. 상덕씨의 글을 오히려 가능한만큼 훨씬 더 긴 형태로 나누어 풀어놓음으로써 인식가능한 형태소의 단위로까지 분해하는데에 성공한다면 얽혀있던 의미들은 문단별로, 문장별로 보다 선명해지고 그걸 재배열하기만 하면 된다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저는 발산과 수렴, 풀어놓기와 편집하기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전에 미리 너무 작은 단위로 편집하기 시작하느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 때문에 충분한 설명의 부재로 문장과 문장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에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나 상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이 기회에 돌아봅니다. 아 지금도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으나 얼마나 많이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내렸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각각 반대의 연습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일까요? 이 피드백 모임에서 상덕씨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저는 헤실 웃음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이미 지난 모임이 끝나고 한차례 밥을 먹었기 때문에 그것은 익숙함과 편안함이기도 했으나 분명 그 이상의 어떤 기대가 함께 흘러나온 것이었겠죠.


그러니 오늘은 이렇듯 당신의 형식을 빌려봅니다 글이란 건 언제나 내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으니까, 그 형식을 빌려 표현하면 당신과 당신의 글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요. 완전히 같을 수 없으나, 완전히 같아야한다고 생각지도 않으니 나의 단어와 문장을 꺼내 더듬더듬 말해보겠습니다 이전 우리가 만난 피드백 모임에서 서로의 글을 읽고 각자의 방식과 문체대로 다시적기를 해보자는 의견을 내주신 적도 있으니 이건 그 방식의 일종이라고 봐도 될까요.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대화에서 저의 글쓰기 방식을 몇 번 나눴듯이 저에게는 하얀 화면 앞에 키보드를 쥐고 섰을때는 끊임없이 자기검열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글을 쓸 때는 쉬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편이므로, 저에게는 상덕씨처럼 쓰는 일이 쉽게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읽고 쓰는 일을 통해 평생 해야하는 일은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것이라 믿기에 써봅니다. 어쩌면 이런 행위는 제가 당신에게 건넨 책의 핵심주제와도 닿아있을지 모릅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그 책은 어떤 의미로든, 그러니까 슬픔에 관해서든 그 태도에 관해서든 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책입니다.


 

***

 

제가 당신에게 그 책을 건넨 이유는, 그리고 좋아하는 책 교환이라는 빌미로 다른 여럿에게도 그 책을 건넨 이유는 내가 슬픔이었고 언젠가 그 책이 나에게 정확히 도착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최근에 'Project당신(슬픔, 연민, 그리고 예감에 기대어)'을 통해 다른 에디터님을 만나고 쓴 글에서 밝힌 것처럼, 저는 슬픔을 통로로 다른 누군가의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누군가 나를 찾아내주기를 항상 바래왔습니다. 상덕씨가 스스로 경멸이자 지지부진함이라고 표현한 그것들에서 저는 어떤 가능성과 예감을 찾아낸 것은 아닌지, 책을 건넨 이유를 조심스레 반추해봅니다. 물론 이렇게 짧은 지면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그리고 제가 감상평 <슬픔의 후에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인규씨에게>를 읽으며 미소를 흘린것도 그 가능성에 작은 답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만 앞으로 들을 대답이 더 많고, 우리가 나눠야할 이야기들이 아직 더 많이 남았다고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감상평을 남겨주신 그 책, 제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은 책이자 제 인생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아직은 제가 두려워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그저 말없이 내밀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환했던, 상덕씨가 저에게 선물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저도 꺼내는 것이 도리겠지요. 당신 사상의 뿌리였으나 이제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던 그 책, <예언자>를 다시금 펼쳐봅니다.


우리가 만남을 했던 그 날은 저에게 다른 여러 일정도 있었던 터라 이틀이 지난 후에야 저는 이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날도 같은 날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177 페이지 분량의 책이니 그리 짧지는 않지만 제가 단숨에 읽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책을 읽고난 지금도 나는 아직 당신의 세계에 이것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반추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만난 상덕씨와 상덕씨의 글에서는 아직 이 <예언자>와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으니, 다음 만남에서는 그 연결점에 대한 이야기도 마저 듣고 싶습니다.


저 역시 뻔하고 답없는 위로를 쉬이 늘어놓는 ‘힐링에세이’계열의 책이나, 이미 널리 알려져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동어반복에 가까운 좋은 말들을 늘어놓는 ‘자기계발서’류의 책을 너무나 미워합니다. 때로는 그에게 주어진 지면이 아까워 회수해버리고 싶고, 그런 책들의 판매성적이 좋은 것을 보며 안타까움과 질투가 얼룩진 마음으로 스스로의 글을 돌아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도 어쩌면 여러 가지 주제-사랑, 결혼, 아이, 베풂, 먹고 마시는 것, 일, 기쁨과 슬픔 등-에 대한 저자의 간단한 생각과 아포리즘을 나열한 책일텐데 왜 이 책은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먼저 설정-형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할 겁니다. 이 책은 예언자인 알무스타파가 이곳 올펠레즈에 와서 열두 해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날.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생에 관한 다양한 진리를 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언자도 함께한 시간동안 사람들에게 가진 애정이 작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전하게 됩니다. 만약 이 내용들을 작가가 개인의 생각을 나열하듯 구성했다면 심리적 반발감이 생겼을 테지만, ‘예언자’라는 설정을 통해 그러한 이야기를 꺼낼만한 사람이라는 당위성 즉, 권위를 부여하고 질문과 대화의 형식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만들어두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나는 비록 예언자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이는 아니고 기껏해야 광장에 함께 모인 관객이겠지만 그 분위기에 휩쓸려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효과 정도는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내용은 사실 작가가 쓴 것이더라도 이러한 간단한 설정을 통해 독자로부터 심리적 완충재를 확보한 것이겠죠.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방식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걸로 충분한가? 저는 다시 생각합니다. 내가 이 책을 가치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단숨에 읽어버린 것이 고작 작가가 설정한 책 속 예언자라는 설정에 기대어 책 속 내용을 정말 진리라고 인식했기 때문인가? 저의 기저에 깔려있는 비판적인 사고와 차가운 냉소는 고작 그 정도에 속아 넘어갈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이 책을 좋다고 느낀 것은 결국 그 안에 담긴 인식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겠죠 . 이 이야기들이 상덕씨의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구성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에 담긴 아이디어들은 충분히 누군가의 세계를 구성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OO에 대하여’라고 아주 단순하게 주제를 구획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재미는 없더라도 사실은 가장 가독성이 높고 전달력이 높은 방식이므로, 그 안의 내용이 정말 유의미하고 가치있는 것이기만 하다면 독자들의 심리적 저항감을 완충시켜줄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장치만으로 오히려 더 쉽고 강렬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이 책은 싸구려 포장지로 화려하게 감싸기만 한 무엇과 다르게 감출 필요도 없이, 최소한의 기술로 정직하고 강직하게 내던지는 직구 같은 책인 겁니다.


소설가 박민규씨는 ‘아침의 문’이라는 작품으로 2010년 이상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다소 신파적이고 클리셰적인 결말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해서, 박민규 작가의 작품론을 써주신 김영찬 평론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탄생과 희망이라니. 이것은 너무 빤하고 상투적인 신파가 아닌가? 그러나 박민규라고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상투(cliche)를 무릅쓴다. ..중락... 어쩔 수 없이 이 결말이, 희망이 없음에도 희망을 얘기하려는, 또 그러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어떻게라도 얘기하려는 안타까운 의지의 표현으로 읽히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릎씀의 윤리다.”

 

 

무릎씀의 윤리. 때로는 뻔하고 클리셰적인 선택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는 논지의 평가였습니다.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고 효과적이기에. <예언자>라는 책의 형식적 미학을 동일하게 부를 수는 없으나, 제가 이 책을 이야기하며 박민규 작가의 소설과 그 비평을 떠올린 것은 이 책에도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될까요. 이 책에서 차용한 것은 너무 빤한 구성방식이지만, 예언자라는 간단한 형식으로 저항감을 약간 완충시켰을 뿐인 글이지만, 그 내용이 강렬하고 가치있는 한 복잡한 형식이 없었기에 오히려 적절하고 간명하게 저에게 닿을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지난 모임에서 저는 한나 아렌트를 언급하며 마이너스 정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학부시절 수업에서 교수님께 들었던 터라 자세하고 깊이있게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논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문학작품을 통해 정치적인 성향을 표명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나의 작품은 정치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고 나는 작품을 통해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라고 주장하는 작가들조차도 사실은 정치성을 띄지 않겠다고 표명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정치성을 가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입장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조차 ‘어떤 입장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제가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별다른 형식을 갖추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형식적 미학, 이 표현이 과하다면 적어도 어떤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에세이의 형식으로 전달해주신 편지-감상문에 대한 답이자 주셨던 책 <예언자>에 대한 저의 간단한 감상평을 담았지만, 저는 이 글을 상덕씨의 글쓰기에 대한 강한 관심과 노력의 표현으로써 써내려갔습니다. 상덕씨의 글쓰기에 대해 감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흔적을 쫓아 따라써본 글쓰기는 마치 하고싶은 말을 속시원하게 토해낸듯한 개운함과 길을 잃은듯한 혼란스러움이 공존하는 색다른 경험이군요. 어쩌면 이 글은 제가 당신에게 건넸던 책에서 배운 것. 평생 다가가려 노력해도 타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것이겠으나 그걸 포기하지 않으므로써 가치를 가진다는 것.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누군가가 서로의 곁에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는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하는, 제가 당신에게 그 책을 건넨 보충설명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우리 모임-오프라인 피드백 모임-에 대한 조금 이른 소회이자 앞으로의 기대를 담은 글이기도 할 것입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이곳에 언급되지 않은 세민님의 글도 기대가 되는군요. 같은 말을 함께 적으면서요. 이 글이 읽으시는 분들도 우리 세 사람의 성장을 기대해볼만한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는 글을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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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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