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의 소설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를 놓고 지난 두 편에 걸쳐 이야기했던 것은 남자와 여자의 '연극' 그리고 그들의 '최초의 기억'이었다. 이미 첫 번째 글에서 이 소설을 구조화와 도식화의 자세로써 분석하는 일이 퍽 무용할 것이라는 예감을 밝혔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내가 분석해놓은 것들이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해를 도왔을지 모르나 이제는 허사가 되고만 것이다. 무녀가 나를 노려보며 춤을 추고 있다. 처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렇기에 이 글도 쓸 수 있음을 깨닫는다. 끝을 알면서도 걸어가는 마음으로 쓴다. 나는 이 글을 마치기 위해 무녀의 눈이 필요하다. 그녀의 눈을 뽑아 그 눈으로 소설을 읽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우루가 카메라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독백은 혼란스럽게 끝났다. 그런 다음 팽팽한 북의 가죽을 긁는 숨소리가 들렸는데, 내 것 같았다. 오후 네 시 침대에서 눈을 뜬 나는 내 존재를 규정하는 기억이 모두 사라졌음을 알았다. 그러나 내면의 바다는 한없이 고요했다. (...) 우리가 최초로 시계를 보았을 때, 이미 바늘은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세계와 우리들 자신이 정확히 오후 네 시에 창조된 것 같았다. 이전의 우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 이 소설의 도입부가 독자에게 혼란을 안겨주는 지점 역시 '연극'과 '최초의 기억'이라는 범주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남자 혹은 여자의 연극 속 독백이 진행되다가 (그러한 연극이 일인극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연극이 끝났을 때, 배우는 자신이 배우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연극 간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또 하나의 연극이 시작되는 순간은 오후 네 시라는 설정과 함께 제시되며, 배우의 역할을 맡게 된 여자는 자신의 숨소리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기억, 이를테면 남자 교사와 사랑을 나누었던 소녀의 정체성 또는 어머니가 목 졸라 죽였던 아이의 정체성과 같은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신'이 새롭게 창조되었음을 감각하는 연극이 시작되었기에.
이때 제1장이 소설 전체를 관류하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무녀의 시선이라는 불분명한 프레임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에 있다. 여자가 오후 네 시의 연극 속에서 배우가 되었듯이 남자 역시 동일한 조건 속에서 배우가 되었다는 것이다. 누구의 연극 속에서? 무녀의 연극인가? 작가의 연극인가?
그리고 팔다리를 여전히 덜덜 떨어 대면서, 무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깜짝 놀랐던 것이, 그녀의 목소리가 확연히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자리에 있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리고 어떤 이름. 나는 그것을 듣는 순간 내 이름임을 알았다. 그때까지는 한 번도 들어 본 기억이 없었으나, 그 순간부터 그것은 내 이름이 되었다.
누구의 연극이라 하더라도, 삶은 연기 없는 연극이다. 연기라는 전제가 주어지지 않은 연극은 연극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배우는 자신이 배우임을 모른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는 일은 그 자체로 태어나는 일이며, 태생이 아니라 난생이다. 어머니라는 최초의 여인과 시선을 공유할 수 있었던 이유도, 무녀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매개하여 일순간에 남자와 여자의 연극을 동시에 가능케 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삶이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과 하나의 연극이 삶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오직, 난생이다.
여자의 기억의 방향성은 순행이기에 여자는 24쪽에서 "내가 찍는 건 죽은 동물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마저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거나 죽음과 함께 머무르지 않는다. 죽음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죽음을 찍는다.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죽음을 찍는다. 죽은 동물을 찍는다. 개를 찍는다.
"그러면 이름이 우루인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요?"
"당신은 여행 중이니까."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것도 맞긴 하지만, 당신은 아무래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 것 같군."
"그게 누구죠?"
"그건 우루, 당신이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이지."
"그렇다면 혹시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
"우루, 당신은 그 사람에게 가지 않아. 그 사람을 찾지도 않아. 그 사람과 마주치는 거지. 그래서 그 사람을 알아보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어. 내 말을 믿어."
여자는 자신이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이자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 사람을 찾아가는 행위, 즉 하나의 연극이 다른 연극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과 마주치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독자는 저녁의 바닷가를 달려가는 죽은 개를 본 적이 있다.
"너는 기억한다고 믿지 못하는 것뿐이야. 그게 아니라면 기억하지 못한다고 믿는 거겠지."
"죽은 동물이라면...?"
"춤을 춰 봐. 그게 너야."
"죽은 동물이라면...?"
"한 마리 염소와 한 마리 개. 둘 다 검은 것이라야만 해."
"검은 염소와 개는 어디서 오죠...?""춤을 춰 봐. 그게 너니까."
내가 기고한 첫 번째 글에서 나는 이미 여자의 '춤 추기'와 '글 쓰기'라는 두 행위를 구분하여 그 의미를 연극의 개입으로 확장시킨 바 있다. 나는 "여자는 자신의 안에서 발화된 그 무엇, 내면의 말, 해독하지 못하는 말을 통해 자신을 태우며 춤을 춘다. '춤 추기'에서는 여자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했다면 '글 쓰기'에서는 남자의 이야기로 확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독자는 계속해서 이러한 이야기의 총체가 '남자가 기획한 연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와 같이 설명했으며 무녀의 권유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에 놓여있다. 그것이 남자의 연극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일지라도 그속에서 배우가 일으키는 전복이란, 남자의 연극을 자신의 연극으로 환치하기 전 오롯이 자신의 정체성에만 집중하는 춤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태우며 자신을 투사하는 존재란 이런 것이다. 기억한다고 믿지 못하면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믿는 것,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찍는 것, 연기 없이도 연극을 구현하는 것.
남자는 무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이름이 무녀에 의해 최초로 명명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는 것이지만 남자는 단지 기억을 잊었던 것이며 그 기억을 찾아가는 존재로서 역행이라는 방향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남자는 무녀가 알려주는 이름이나 그외의 언명 같은 것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 소설의 골조를 이루는 첫 번째 연극이 남자에 의해서 시작된 것임을 기억하자. 어린 시절 내내 학교뿐 아니라 집 밖으로는 전혀 나가지 않고 살아왔던 남자아이가, 자신의 기억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아이를 사랑하는 이야기. 성인이자 교사의 시선에서, 미성년 여자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관장하는 무녀는 31페이지에서 열세 살 소녀를 향해 자기들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한몸이자 영원한 부부라고 말했던 성인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후 무녀는 남자에게 말한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이미 죽은 짐승의 영혼이겠군.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사실 몸이 없어. 정령은 계속 당신을 보려 하는데, 당신은 끊임없이 시선을 투과시켜 버리는군. 당신은 있는데, 당신은 보이지 않아. 그건 당신이 당신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의미야. 누군가의 몸이 당신을 버리고 갔어. 누군가 당신을 잃었어. (...) 당신은 슬프군. 슬픔이 당신 자신이야.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슬픔을 주지. 당신은 실패해. 이름을 주거나 이름을 받는 일에.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받는 일에. 그게 아니라면, 살아가거나 혹은 살게 하는 일에."
그렇다. 연극이란 이런 것이었다. 이름을 주거나 이름을 받는 일.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일. 살아가거나 살게 하는 일. 그러므로 살아있는 남자와 죽은 짐승을 중첩시키는 것은 물론 남자의 연극과 여자의 연극이 서로 개입했다는 것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떻게 어린 남자아이가 성인 교사가 되어 연극반을 만들었는지, 이미 어머니에 의해 살해된 여자아이가 어떻게 남자의 연극 속에서 살아 숨쉬는지, 어떻게 생자가 사자와 시선을 공유하는지, 어떻게 연기가 없는 연극이 가능한 것인지, 어떻게 최초의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의문을 갖는 순간에 그것은 이미 의문이 아니다. 무녀의 말처럼, 그럴 순간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33페이지에서 남자는 무녀에게 결코 변화시킬 수 없는 과거 혹은 미래를 굳이 안다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의미가 있을까 하고 의문을 던진다. 즉, 남자의 연극을 기획하는 일 혹은 여자의 연극을 기획하는 일이 과연 사랑에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 의문에 답을 제시할 이유는 없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바닷가를 달려가는 개조차 그 이유를 안다.
불가능한 사랑. 불온한 사랑. 스스로 실패한 사랑. 폐허를 유발한 사랑. 그리고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사랑.
그것이 두렵다고 나는 말했다. 아마 그래서 너도 이름이 불리기를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무녀에 의해서 불리는 이름이 곧 너의 원래 이름을 집어삼켜 버릴 테니까, 그러면 너는 무녀에 의해서 규정되어 버리는 셈이니까. (...) 기억이 사라지기 전의 과거는 정말로 우리에게 속해 있었을까? 아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것, 과거 혹은 전도된 미래라고 불리는 그것은,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여전히 연극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가? 남자의 연극이나 여자의 연극이나, 이 소설 속 연극의 주제는 단 하나다. 연극이 바로 그것이다. 이생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나면 이생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릴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일조차 무의미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무녀가 나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우리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불가능한 꿈을 꾸어야 한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어디론가 나아가야 한다. 마치 우루처럼.
그것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나는 어느 날 문득 당신이라는 최초의 기억을 품고서 연기 없는 연극을 한다. 나는 사랑을 한다.
마치 내가 일생 동안 그 하루를 살아왔던 것처럼. 내 일생이 오직 그날 하루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태어난 이후 매일매일, 오직 그 하루를 반복해서 조금씩 다르게 살아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