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모든 영화는 글에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각본을 읽는 건 영화의 제작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SF 신작 영화 <상자 속의 양> 시나리오북은 시나리오 전문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을 담은 칼럼, 등장인물 설정, 스토리보드, 컬러 화보까지 수록되어 있다.
<상자 속의 양>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AI 휴머노이드 사업을 운영하는 'RE birth'에서 보낸 광고를 본 부부는 아들 카케루를 다시 만나기로 결정하고 아들의 사진을 골라 제작을 주문한다. 아들과 똑닮은 휴머노이드와 만난 후 일상은 이전과 같이 굴러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앞의 휴머노이드는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만 상기하고 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떠올리면 늘 '가족'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괴물>이나 <걸어도 걸어도>, <어느 가족> 등에서 혈연보다도 진한 관계를, 배역들의 침묵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그의 시선은 이번 작품 <상자 속의 양>에서도 여전하다.
다만 이번에는 휴머노이드라는 SF적 설정을 통해 그 익숙한 질문을 조금 더 낯선 방식으로 건넨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가 아이를 대신할 존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설정은 얼핏 보면 미래 기술에 대한 이야기지만, 끝내 작품이 보인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다.
영화를 먼저 본 사람이라면 시나리오북은 단순히 장면을 활자로 옮긴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느끼게 된다. 영상에서는 배우의 표정과 침묵, 카메라의 움직임이 감정을 대신하지만 시나리오에서는 그 빈자리를 문장이 채운다. 장면이 왜 그렇게 이어지는지, 인물들이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끝내 말하지 못했는지가 대사와 지문 사이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영화를 보며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하고 지나쳤던 순간들이 시나리오에서는 인물의 감정선과 함께 정리되어 있어 작품을 다시 이해하게 만든다.
원래 시나리오는 과장된 문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문장 사이의 여백으로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 남겨진 사람들이 이를 견디는 방식, 그리고 다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등이 그렇다.
작품 속 휴머노이드는 인간을 위협하거나 기술의 발전을 경고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과 기억을 비춰보는 거울에 가깝다. 죽은 아이와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존재가 과연 그 아이를 대신할 수 있는지, 기억만으로 가족은 유지될 수 있는지, 인간다움은 무엇으로 완성되는지와 같은 질문들은 이야기 내내 반복된다.
하지만 작품은 어느 하나의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답을 찾아가도록 기다린다. 이러한 열린 결말과 해석의 여지가 바로 고레에다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시나리오북이라는 형식이 반가웠던 이유는 영화에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창작의 흔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시나리오뿐 아니라 감독의 그림 콘티와 제작 과정을 담은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한 편의 영화가 어떤 고민 끝에 만들어졌는지를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글을 쓰거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도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영화는 완성된 결과물이지만, 시나리오는 그 결과물이 만들어지기 전의 구상과 선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시나리오북을 읽는 일은 영화를 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편의 영화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처음부터 다시 따라가는 경험에 가깝다. 장면 사이에 숨겨진 의도와 인물의 감정, 감독이 관객에게 보내고 싶었던 질문들을 문장으로 마주하고 나면 영화 역시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결국 이 책 역시 영화의 부속품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