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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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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높고 낮음은 정도에서의 차이를 가지는 반의 관계를 형성한다. 즉,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 지대가 존재함과 동시에 '더', '매우', '가장' 등의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체는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모든 물체가 아래로 추락하는 현상은 곧 지구가 우주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믿는다. 우주에서 가장 낮고, 더럽고, 추한 곳이 지구이므로 이곳에서 사는 이들이 이토록 고통받아야 한다고. 그것이 성별과 신분 등에서 비롯되는 차별이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이유라고. 그렇기에 반대로 우리가 올려다보는 하늘은 그토록 아름답다고. 이번 생에서 신앙으로 삶을 보살피면 죽어서 천국으로 향할 수 있다고. 천국에서는 모두가 자신이 누려 마땅한 것들을 당연하게도 얻을 수 있다고.


이 순응을 깨부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도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작중 '이단'으로 취급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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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합리적 충동과 진리 


 

라파우는 뛰어난 두뇌로 어린 나이에 대학 입학을 앞둔 인재이다. 길거리에서 생활하던 과거를 청산한 뒤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양아들로 살며 모두의 부러움을 산다.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우월함으로 남은 생을 편안하게 살려는 포부를 가진 인물이다. 어느 날 만난 석방된 이단자 후베르트에게 협박당한 라파우는 그의 천문학 연구에 참여하게 된다. 


갑자기 후베르트가 지구와 천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묻는다. 라파우는 자신이 아는 대로, 지구를 둘러싼 천체가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운동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후베르트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이 진리는 아름다운가? 라파우는 대답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각 천체의 운동은 공통의 질서가 없는, 즉 합리적이지 않은 운동을 하고 있다고. 그러나 아름답다는 주관적인 감각은 우주의 절대적 질서인 천동설과는 관계없다고. 


후베르트는 말한다. 자신은 아름답지 않은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서. 천체의 불규칙한 움직임을 꿰뚫는 하나의 질서가 존재한다면 이는 명백히 아름답다. 그리고 그것이 '지동설'이다. 라파우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며 안전한 삶을 사는 것이 옳은데도 왜 자신이 자꾸만 천문학에 마음이 끌리는지. 왜 비합리적인 충동에 휩싸이는지. 

 

이단 연구를 하는 것을 들키면 갖은 고문을 당하며 정보를 공개하고, 모든 연구 자료를 불태워야 한다. 이런 위험을 안고서도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한 문장이 돌아온다. 두렵지 않은 삶은 그 본질을 잃은 것. 

 

라파우는 지동설을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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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부터 땅으로 


 

그 무엇보다 무거운 인류의 죄를 품고 있는 이 지구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는 맹목적인 믿음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주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천국에 닿을 것이라고 믿고 현실에 순응한다. 그저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인류는 자신이 태어나면서 지은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니까. 묵묵히 나아가다 보면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밑바닥에 있기에 위를 갈망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면 현실은 진창이 된다. 우물 속에서 고개만 쳐들고 있다가는 턱끝까지 차오르는 물을 보지 못하고 잠기기 일쑤다. 그래서 지동설은 처음으로, 하늘이 아닌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땅을 보게 한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고 있다는 가설은 지구의 지위를 다른 행성과 동급으로 격상한다. 지구를 아름다운 천계의 일부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불완전하며 불합리하고, 그렇기에 더 폭력적인 이 현실이 신의 설계가 아니며, 인류가 벌받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님을 증명한다. 이 깨달음은 오히려 고통스럽다. 내가 여태까지 겪은 고난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믿는 편이 덜 억울하니까. 내가 무엇을 위해 이 모든 걸 버티고 있었는지 생각하다 보면 차라리 이 사실을 모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워진다. 지구의 밑바닥부터 드러내 청소할 생각을 하면 너무나도 막막하다. 회피에서 끝내 벗어난 이들은 자연스레 움직일 준비를 시작한다. 


마녀로 몰릴까 봐 본명으로 논문을 낼 수 없었던 여성,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구걸로 삶을 연명해야 했던 빈민, 하찮은 직업을 가졌다며 남들로부터 무시당하던 노동자. 이들이 마주하는 지동설은 역설적으로 이 별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멋진 무언가라는 걸 보여준다. 답 없는 지구를 버리고 천국으로 향하려고만 했던 생각에서 벗어나 지금 이 땅부터 뜯어고쳐 잘살아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한다. 천국을 미뤄두고서라도 삶에 좀 더 몰두하고 싶어진다. 스스로 천국을 버리고 신을 부정하기 위해 이러한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이 만든 이 세상이 지극히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하여 자신만의 종교관을 관철하는 것이다. 분명 그것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일 테다. 살아간다는 건 곧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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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폭력의 경계에서 


 

지식은 한 사람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라파우보다 더 먼 이전에서부터 계승된 천동설에의 의문은 없앨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지동설을 연구하는 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고문하던 이단 심문관 앞에서도 라파우는 굴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상대하는 건 나도 아니고, 이단자도 아니에요. 일종의 상상력이고 호기심이죠. 즉, 지성 그 자체예요. 그건 유행병처럼 확산되죠. 숙주조차 통제하지 못해요.

 

 

아무리 억압하고 길들이려 노력해도 진리로의 탐구는 필연성을 지닌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이 만화의 주인공도 한 명이 아니다. 바로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거쳐 갈고 닦은 '지知'이다.


지식, 그중에서도 과학의 핵심은 반증 가능성에서 온다는 말이 있다. 반증의 시작은 질문이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기존의 상식에 계속해서 질문하고, 의문을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자의 길 끝에 지성이 있다. 제3자의 반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건 신앙일 뿐이다. 지식을 탐미하며 신념으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은 의심하는 자신만을 믿는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사랑과 기침처럼 참을 수 없는 그 의문을 세상에 풀어놓아야 새로운 문이 열린다. 천문학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에도 이 자세는 고취되어야 한다. 왜, 이 한마디가 지성과 폭력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불합리한 현실에 침묵하는 것, 궁금해하지 않는 것도 폭력이다.


염세적으로 사는 것은 쉽다. 그렇기에 쉬운 길을 버리고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력이 더 빛난다. 실낱같은 가능성을 파고들어 진리를 발견하는 이들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지동설과 천동설, 과학과 신학의 대립에 스며든 인간 찬가를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성의 힘으로 세상을 옳게 만들 수 있겠다는 어떠한 확신을, 나아가 의지를 갖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움직이고 있다. 새삼 이 사실이 앎의 기쁨을 일깨워준다. 이것이 세계를 전환하는 타우마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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