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그녀에게서 훔쳐 간 것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2.1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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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필연적인 생을 살고, 사랑하며, 죽음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청춘의 달콤함을 만끽하기도 하고, 고여있는 물웅덩이 같은 정체된 시기를 겪기도 한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은 매 순간 우리와 얽혀있으며, 떨쳐낼 수 없는 것들이다.


나는 오늘 인생을 분절하는 진은영 시인의 시집 <훔쳐가는 노래>를 읽으며 여러 가지를 훔쳐 가기로 했다.

 

 

 

사랑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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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 「오필리아」 中


이 시집에서의 ‘사랑’은 ‘죽음’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사랑을 뜻한다. 「오필리아」 시의 제목인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인 <햄릿>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당시 연인이었던 햄릿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겪는 인물이다. 이 작품 속에는 극심한 충격과 슬픔에 잠긴 오필리아가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게 되는 비극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오필리아’는 작가가 말하고자 한 ‘사랑’과 ‘죽음’의 연관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인물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를 살해한 이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연인 햄릿이란 거대한 비애. 그러한 슬픔 속에서 결국 투신이란 선택을 하게 되는 인물이 오필리아다. 이처럼 ‘사랑’과 ‘슬픔’ 혹은 ‘사랑’과 ‘죽음’은 우리 몰래 하나의 그릇 안에서 천천히 섞여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사랑’과 ‘죽음’이 함께 존재하고 있을 때, 우리는 생을 인식하기도 한다. 「훔쳐가는 노래」의 시구 중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눈의 흰 입술들처럼/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를 살펴보자. 이때 ‘눈의 흰 입술들처럼’에서의 ‘입술’은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여타 시에서 시인이 ‘입맞춤’을 연인 간의 사랑으로 다루었던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죽음’을 상징하는 ‘장례행렬’과 ‘사랑’을 상징하는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이 함께 존재함과 동시에 ‘살아 있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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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를 애도하는 행렬과 마치 그들에게 고맙다 위로를 건네는 눈의 입맞춤. 사랑은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모습을 드러낸다. 오히려 죽음이 드리웠을 때 사랑은 폭설처럼 쌓인다. 생전 사랑했던 순간이 내 목덜미 위로 무겁게 내려앉아 후회라는 또 다른 이름의 사랑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사랑이 없다면 누구도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진은영 시인은 나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경계선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게 한다. 사랑과 죽음뿐만 아니라 세상의 절반을 분리하면서도 공존하는 시각을 내보인 것이 바로 시 「세상의 절반」이다. “세상의 절반은 붉은 모래/나머지는 물//세상의 절반은 사랑/나머지는 슬픔//붉은 물이 스민다/모래 속으로, 너의 속으로” 이처럼 시인은 ‘붉은 모래’와 ‘물’로 분리하였음에도 ‘붉은’ ‘물’이 ‘모래’ 속으로 스민다는 모호한 경계를 통해 나누어져 있는 것을 융합하기도 한다.


 

해변으로 떠내려간 심장들이

뜨거운 모래 위에 부드러운 점자로 솟아난다

어느 눈먼 자의 젖은 손가락을 위해

 

「오필리아」 中

 


어느 눈먼 자의 젖은 손가락을 위해 뜨거운 모래 위에 부드러운 점자로 솟아난 심장들이 수놓은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죽음’이었을까. 뭐가 되었든 사랑은 죽음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죽음은 사랑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안다.

 

 

 

청춘과 후회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中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에서는 아름답게 시작하려는 순간 과다하단 이유로 강제적으로 떨어져 버린 열매를 보여준다. 이때 열매가 전부 떨어져 앙상하게 남아 ‘쓰러진 흰 나무들’을 발견하고서야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한다.


이 시집은 대체로 과거를 돌아보는 시도를 한다. 시 「이 모든 것」 중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청춘은 글쎄…… 가버린 것 같다”나 「후크」에서 “어린 시절의 도망치는 푸른 꽁무니를/…/나의 과거가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흰 물개처럼 온순해질 수 있다면/…/그저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다면, 나의 피터팬//…/너무 오래전에 배에서 내렸어요”, 「그런 날에는」에서 “왜 마음은 어린 날 좋아했던 음료수병 같지 않을까/아무리 아껴 마셔도 투명한 바닥을 드러내던 그거/마지막 한 방울의 아쉬운 미학을/내가 다 기억하고 있는데”처럼 말이다.


「후크」에서는 어린 시절, 과거의 자신을 염원하지만, 현재 자신은 <피터팬> 이야기 속의 네버랜드로 향하는 배에서 너무 오래전에 내려버린 상태다. 또한, 화자는 <피터팬> 속의 동심을 상징하는 어린아이나 피터팬, 팅커벨이 아닌 후크 선장을 통해 자신이 청춘과 현실의 괴리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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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청춘은 후회와 함께한다. 그때 이렇게 해볼걸.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일을 해볼걸. 그렇기에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아직 시간이 남은 청춘들에게 ‘조심할 수 없는 시기’를 보내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하세요. 그냥 좋아하는 만큼만 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무엇에 매혹되었는지 찾아내는 게 중요하고요.”


*


시인은 사랑과 죽음, 청춘과 후회, 그리고 인생 같은 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시집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 「그리하여 어느 날」의 마지막 연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어떤 메두사의 머리로도/쏟아지며 흘러내리는 순간들을/정지시킬 수 없음을/너는 굳어가는 눈동자로/그 순간, 영원히 보게 된다” 우리는 청춘, 사랑, 슬픔, 후회 등 이러한 것을 살아가는 동안 영원히 보고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순간이 흘러가 버리는 것을 우리의 의지대로 멈출 수 없다.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이 시집의 책 제목이자 시인 「훔쳐가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이 시속에서 화자는 가난한 아가씨가 가진 모든 것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가씨의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훔쳐 가려고 한다. 그 주머니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아가씨의 모든 것을 원하고 대가로 사랑을 주겠다 한다.

  

진은영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학 때 이화문학회에서 시를 썼어요. 그 무렵 농수산물 수입 개방이 되면서 거리에서 바나나가 보이기 시작할 때였어요. 바나나를 놓고 네 줄짜리 사랑 시를 썼는데, 합평 시간에 선배 언니가 ‘그러니까 이 시가 농수산물 수입 개방을 비판하는 시구나’ 그러는 거예요.… 나는 사랑 노래를 들려줬는데 그 사람은 내 시에서 다른 걸 훔쳐 간 거죠.…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연애할 때도 그렇잖아요. 나는 사랑을 줬는데, 상대는 부담으로 느끼기도 하잖아요. 인간관계 안에서 언제나 발생하는 사건인 것 같아요.”


내 주머니에서 무엇을 훔쳐 갈지는 상대의 몫이다. 혹은 상대의 주머니를 뒤적였는데 무엇이 잡힐지는 미지수다.


나는 진은영 시인에게서 무엇을 훔쳤을까. 시인은 이 시집에서 다른 노래를 들려주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그녀의 주머니에서 훔친 것은 ‘이 순간 사랑과 죽음이, 청춘과 후회가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아는 것’‘정지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하릴없이 보고 있지 않고 지금에 충실할 것’이다.


그러니 외치고 끝내보겠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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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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