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토는 똑똑하지만 평범한, 일반적인 고등학생이었다. 남들처럼, 세상엔 왜 그리 선량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악인이 많은지 그리고 고통받는 피해자들에 대해 법은 왜 보호해주지 못하는지 분개하는, 그런 일반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단 말이다.
그러다 라이토는 우연히 데스노트를 줍게 된다. 단번에 데스노트의 규칙을 이해한 그는 의심 반 진심 반으로 뉴스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는 유치원 납치범의 이름을 적어본다. 역시나 누군가의 장난이었겠거니 여기던 와중, 그 납치범이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속보가 들려온다.
여기까지만 놓고 봤을 때, 라이토에게 이입되지 않을 자신이 있을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이입도 잠시, 라이토는 범죄자 심판을 통한 정의 실현의 목적을 정당화하는 데 맹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정의 구현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엘(L)과 수사팀이 나타나자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라며 수사팀을 데스노트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죽여버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라이토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이입'과 '경계'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를 바라보는 관객은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토는 여기서도 멈추지 못한다. 이제 그는 자신 자체가 '정의'라고 믿는 지경까지 이르고야 만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관객 모두는 알고 있다. 그는 모두가 보는 TV에서 자신을 욕보이게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분개하며 엘(L)을 죽일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는,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줍기 전 혹은 직후에 향했던 분노의 방향은 적어도 악행을 저지르는 범죄자와 그들을 방치하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라이토는 자신의 정의 구현을 방해하는 '모든 존재'로 그 분노의 방향을 잘못 돌려버리고야 말았다.
그렇기에 그에게 그러한 심판의 권리가 우연히 쥐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쩌면 그는 이미 타락의 길로 빠져버리게된 것일지도 모른다. 라이토는 자신이 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똑똑하기에 사신인 류크가 라이토 자신을 인간의 심판자로서 선택한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은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한다.
라이토는 그 근거로 자신이 행하는 심판을 추종하는 집단들이 자신을 '키라(Killer)'라고 칭송한다는 사실을 든다. 때문에 라이토는 심판에 대한 정당성이 자기 확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관객은 알고 있다. 그것의 실체는 불행이라는 것을 말이다.
뮤지컬 <데스노트>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잔인한 부분으로 여겨졌던 장면은 라이토와 그의 여동생 사유가 가수 아마네 미사의 콘서트를 다녀온 후 벚꽃이 흩날리는 벤치에서 사유가 부르는 넘버 [나의 히어로] 장면이었다. 미사의 열렬한 팬이었던 사유는 콘서트가 너무 좋았다며 자신의 오빠와 함께 벚꽃이 핀 공원 벤치에 앉으며 공연이 줬던 감동에 대해 나누기 시작한다.
무대 위에는 벚꽃 나무 한 그루와 벤치가 놓여 있고, 밤하늘을 수놓은 은은한 조명과 함께 벚꽃 잎이 흩날리면서 서정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사유는 콘서트가 정말 좋았지만, 콘서트에서 미사가 키라를 칭송했던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라이토에게 얘기한다.
라이토는 동생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사유는 '어떤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도 키라의 잣대만으로 그 사람을 죽이는 건 옳지 않다'라며, 진짜 히어로는 따로 있다고 얘기한다. 라이토가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의 오빠, 즉 라이토라고 말하면서 곡은 시작된다.
사유에게 오빠는 정의롭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고 심지어 다정하기까지 한, '히어로'처럼 빛이 나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래서 사유는 오빠를 순수하게 신뢰한다. 하지만 관객과 라이토는 이미 알고 있다. 동생 사유가 가장 싫어하는 존재와 가장 사랑하는 존재 모두가 결국 라이토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유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오빠가 키라일 것이라는 사실은 절대 알지 못한다는 이 정보의 불균형이 엄청난 비극을 부추기는 동력이 된다.
사유는 자신의 오빠를 칭찬하고자 오빠와 정반대의 인물일 거라 확신하며 키라를 언급했지만 사실 두 인물 모두 라이토이기에, 사유가 라이토를 히어로라고 치켜세울수록 라이토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는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이토를 히어로로서 치켜세우는 사유의 밝은 곡조가 실은 라이토에겐 '장송곡'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분홍빛 벚꽃이 흩날리는 무대 위에서, 라이토는 동생의 신뢰라는 가장 따뜻한 빛에 의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가장 어두운 심연 속에 고립되고 만다. 그때 라이토의 눈빛은 허공을 바라보며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그때 라이토가 멈출 수 있었다면 그게 최선의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토에겐 일종의 매몰 효과, 즉 이미 이제껏 이렇게 해왔으니 더 이상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일까? 그는 사유가 무의식적으로 건넨 제동장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더욱 본격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화하기에 이른다.
라이토가 철저히 수단으로 이용하는 존재는 바로 '아마네 미사'와 그녀의 사신 '렘'이다. 라이토는 미사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이용한다. 즉, 라이토는 미사와 유사 연애를 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얻는다. 하지만 그에게 미사는 인격적인 연인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본명을 알게 해주는 '사신의 눈'을 가진 강력한 기능적 무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라이토에게 사랑은 심판의 권력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데, 이 지점에서 라이토는 인간의 감정을 유희에 불과한 것으로 바라보는 사신 류크와 궤를 같이한다. 류크에게 인간의 사랑이 우스꽝스러운 유희이듯, 라이토에게도 타인의 애정은 이용 가치가 다하면 폐기될 소모품에 불과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심판자'라는 사신의 지위를 택한 라이토는, 결국 사신보다 더 차가운 사신성(死神性)을 획득한다.
반면, 사신 렘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숭고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자신의 수명을 두 번이나 깎아가며 라이토를 돕는 미사의 맹목적인 희생은, 사신인 렘의 마음을 움직인다.
인간의 수명에 개입하면 소멸한다는 사신의 절대적인 금기를 깨고 미사를 위해 엘(L)의 이름을 적는 렘의 선택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기까지 하는 가장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헌신이다.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렘의 최후는, 사랑을 도구로 생존을 이어가는 인간 라이토의 비겁함과 대비되며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결국 라이토의 몰락은 지략의 실패가 아니라, 타인을 수단화한 대가로 얻은 필연적인 고독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심판자에게 남은 것은, 그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는 서늘한 심연뿐이다. 그렇게 그는 가장 눈부신 순간에, 가장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이유빈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저는 이 작품의 '데스노트'라는 넘버를 종종 듣곤 하는데
그것만 듣고 라이토가 마냥 선한 역할인 줄 알았어요, 아니었군요..??)
특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장면이
가장 비극적이고 잔인한 장면으로 여겨지셨다는 부분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그 장면에서의 라이토라는 한 사람을 대립적인 두 개의 이미지로 표현해주신 덕분에
데스노트라는 작품이 가진 매력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문단이 라이토의 눈빛에 대한 묘사로 끝나는 것도 너무너무 좋았어요.
제가 마치 공연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요즘 느끼는 건데, 뮤지컬들은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을
비인간들의 입으로 외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래서 더 와닿는 것 같고요.
데스노트도 사신이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극이라는 점이 재밌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데스노트'를 애니메이션이 나온 직후엔 잘 모르다가 시간이 많이 지났을 때 우연히 본 이후로 빠진 케이스인데요! 제가 전공이 철학과이다보니(TMI지만ㅎㅎ) 매체를 볼 때마다 저는 의도된 철학적 메세지가 있는 작품보다는, 그걸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묵직한 메세지를 은은하게 풍기는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뮤지컬 '데스노트'는 만화 '데스노트'를 단시간에 압축적으로 보여줘야 해서 개연성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뮤지컬 노래들이나 한국 버전의 뮤지컬 '데스노트'만의 무대 디자인이 가진 강점(ex. 선을 통해 경계를 표현)들이 탄탄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에 말씀하신 부분 중에 비인간들의 입을 통해 '인간성'을 표현하는 작품 중에 제가 또 좋아하는 작품이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인데요.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한국 창작 뮤지컬입니다. 2027년에 하기도 하고 디즈니플러스에 영상화가 있으니 기회가 되시면 한번 보시는 것을 추천드려봅니다 ㅎㅎ
특히 사유가 '어떤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도 키라의 잣대만으로 그 사람을 죽이는 건 옳지 않다' 라고 말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제가 일전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 중 한 단락이 떠올라 조금 길지만, 공유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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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간다는건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성숙해진다는 것은 내가 멋대로 설정한 절대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고 들어 어렴풋이 아는 것이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언제라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옳고 그름, 필연, 당연, 숭고함으로 이름 붙였던 것들이 그냥 견출지에 써서 아무렇게나 붙여둔 것임을, 어떤 이름을 새로 써서 덮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머리로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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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토는 유빈님 말마따나 정의라는 오만을 부리는 '성숙'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랄까, 원작 애니를 보면서도, 뮤지컬을 보면서도 사실 라이토를 보며 저런 오만한 모습이 나에게도 있지 않은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부조리한 현실을 보며 그런 세상을 바꾸고 싶은 건 이해가 가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세상을 바꿀 유일한 심판자의 권한을 얻게 되는 순간 그 누구도 오만해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네요. 라이토는 자신을 넘어서 확신에 가득 찬 인물이었기에 키라가 됐지만요.
오늘도 부조리한 현실과 무력한 나 사이에서 발버둥치는 날이네요. 감사합니다.
미사의 헌신과 렘의 희생은 그런 기괴함의 접점을 보여주는 것 같고, 라이토가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며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게 되는 과정도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인간성을 잃어갈수록 점점 더 고독해진다는 점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인 것 같아요.
좋은 글 덕분에 이전에 봤던 <데스노트>를 다시 곱씹어 보게 되었고,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해요:)
저는 호러나 그런 장르물은 좋아하지 않는데요(겁이 많아서), 대신 이런 정신적 기괴함에 대해서는 좀 단련돼 있는 편이다보니 이런 장르물을 보게 되면 정말 연구하듯이 파서 보는 편입니다 ㅎㅎ
인간이지만 누구보다 인간적이지 못한 라이토와, 인간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인간적인 사신 렘 간의 대립적인 구도가 저한테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인간다움이란 과연 내재하는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인지.. 애니메이션을 보면 라이토의 집 분위기가 더 나오는데, 겉으로 보기엔 화목한 가정인데도 라이토는 결국 가족마저도 수단화하는 것을 보고 정말 기겁했었던 기억이 갑자기 나네요..ㅎㅎ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얻고 타락하는 과정, 그 속에서 엘, 사유, 미사 등등 여러 인물들의 구도가 탄탄한 것 같아요. 특히 이 극을 본다면 저는 틀림없이 렘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망한 사랑 서사를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데 글을 읽으면서 이미 아름다움을 느꼈어요...
스토리도 철학적이고 교훈적인데,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가 더해진다면 정말 더 근사할 것 같아요. 저는 뮤지컬 쪽은 거의 문외한이라 잘 몰랐는데, 넘버들을 한번 찾아서 들어보고 싶어졌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뮤지컬 <데스노트>는 프랭크 와일드혼이라는 엄청 유명한 작곡가가 작곡한 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대표작으로는 <지킬앤하이드>가 있습니다) 프랭크와일드혼이 한국인의 정서를 울리는 맛을 잘 살려서 작곡하는 것 같아요..ㅎㅎ 아니면 작곡을 했는데 그게 한국인에게 잘 맞는 것 일수도 있고요 ㅎㅎ
라이토와 류크의 노래가 굉장히 날카롭고 불협화음적이라면, 미사와 렘의 노래는 뭉게구름처럼 포근하고 아련합니다. 저는 관람할 때마다 미사를 보호하고 걱정하는 렘의 노래 <어리석은 사랑>을 들을 때면 눈물이 주르륵 흐르곤 하네요..ㅎ (<잔인한 꿈>이라는 렘의 노래도 너무 슬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