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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오래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 - 김보희 개인전 [전시]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한 폭의 풍경에 오래 머무르는 법

by 최수경 에디터
2026.09.1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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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야자수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짙푸른 바다는 아득한 수평선까지 이어진다. 초록 잎사귀 사이에는 작은 새가 앉아 있고, 정원 한편에는 개 한 마리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다.

       

      2026년 8월 26일부터 10월 18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김보희 개인전 《TOWARDS: There Was Light》는 이처럼 작가가 오랜 세월 자연을 바라보며 축적해 온 ‘빛과 시간’을 따라가는 전시다.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장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어둠 속 달빛에서 눈부신 낮의 햇살로, 가까이 들여다본 작은 생명에서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확장되는 그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문득 생각하게 된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풍경 앞에 온전히 머물며, 그곳의 빛과 시간에 깊이 잠겨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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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제목에 있다. 《TOWARDS: There Was Light》에서 ‘빛’은 자연의 변화를 감각하게 하는 기준이자 시간의 흐름을 포착하는 매개가 되어준다. 같은 나무도 한낮의 햇빛 아래에서는 선명한 초록을 드러내지만 달빛 아래에서는 짙은 청색과 먹색의 형체로 가라앉는다. 바다 역시 빛에 따라 푸르게 반짝이기도, 달빛을 머금고 하얗게 번지기도 한다.

       

      지하 1층에서 만나게 되는 깊은 먹색과 청색, 백색으로 이루어진 고요한 풍경이 이를 잘 보여준다. 화려한 색채가 사라진 자연은 마치 달빛 아래 고요히 잠든 것처럼 보인다.

       

      김보희 작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깊이감은 그가 오랫동안 사용해 온 전통 동양화 재료인 ‘분채(粉彩)’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분채는 광물이나 흙 등의 안료를 곱게 만든 가루 형태의 채색 재료다. 작가는 이를 아교물에 개어 화면에 얇게 올리고, 충분히 마르고 스며들기를 기다린 뒤 다시 색을 쌓아 올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한 번에 두꺼운 색을 덮는 대신 얇은 층을 수십 번, 때로는 수백 번 포갠다.

       

       

       

      시간을 그리는 방법, 수백 번 포개지는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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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가까이에서 바라본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다. 잎사귀의 작은 결부터 바다를 이루는 물결까지 하나하나 집요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작품에서 몇 걸음 물러서면 그 작은 붓질들은 하나의 부드러운 색면으로 연결되며 깊고 아늑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제작 방식이 김보희 작가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눈앞의 풍경을 한순간 포착해 그대로 옮기기보다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렇게 바라본 풍경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작가의 감각을 거쳐 화면 위에서 재구성된다. 그러므로 그림이 만들어지는 방식 자체에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한 겹의 색 아래에 또 다른 색이 존재하듯 지금 바라보는 하나의 풍경 아래에도 작가가 자연과 함께 보낸 수많은 순간이 포개져 있는 것이다.

       

       

       

      작은 잎사귀에서 수평선 너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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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에서 시작한 전시가 1층과 2층으로 이어지면서 작가의 시선은 점차 밝아지고 넓어진다. 1층에서는 강렬한 햇빛 아래 생명력이 폭발하는 제주 풍경이 펼쳐진다. 선명한 동백꽃과 짙은 초록의 식물, 붉고 주황빛으로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하 공간의 먹빛 풍경과 극명한 대비가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형체만 희미하게 드러내던 자연은 빛을 만나는 순간 자신의 색을 되찾는다.

       

      2층에 이르면 시선은 더욱 확장된다. 2000년대 이후 제주에 정착한 작가가 직접 가꾼 정원의 야자수와 꽃, 열매가 등장하고 오랫동안 곁을 지킨 반려견 ‘레오’를 비롯한 여러 생명들이 한 화면 안에 자리한다. 그렇게 작가의 눈은 작은 잎과 열매, 한 마리의 동물에서 시작해 나무와 정원 전체로 이동하고, 결국 바다와 수평선이라는 거대한 자연으로 나아간다.


        

       

      풍경의 끝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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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제목의 또 다른 단어인 ‘TOWARDS’가 의미를 얻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TOWARDS’는 어떤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의미보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의 너머를 향해 계속 시선을 보내는 태도에 가깝다. 가까이 있던 작은 생명을 바라보던 눈이 정원을 지나 바다에 도달하고, 마침내 우리가 볼 수 없는 수평선 너머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전시 후반부에 등장하는 수평선은 유난히 검고 짙은 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자칫 흩어질 수 있는 시선을 붙잡아주는 하나의 시각적 중심이자, 동시에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경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선을 바라볼수록 궁금해지는 것은 선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다.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눈앞의 풍경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세계는 어디까지일까. 작가는 그 답을 화면 안에 친절하게 그려 넣지 않는다. 대신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나의 선을 남겨두고 관객의 시선이 그 너머로 향하도록 만든다.

       

       

       

      오래 볼수록 예쁘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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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르게 보고, 빠르게 판단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일에 익숙해진 시대다. 그런 우리에게 김보희 작가의 그림은 정반대의 시간을 제안한다. 오래 바라볼 것. 기억 속에 충분히 머물게 할 것. 그리고 그 시간이 쌓이기를 기다릴 것. 그의 풍경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새로운 것을 찾아 더 멀리 나아가는 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있는 것을 충분히 오래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김보희 작가가 평생에 걸쳐 자연을 바라보았듯이. 분채의 얇은 색이 수없이 포개져 하나의 깊은 빛을 만들어내듯, 느린 응시의 시간은 평범하게 지나치던 풍경에 새로운 깊이를 더한다.

       

      그렇게 전시장을 나선 뒤에는 이전과 같은 풍경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스쳐 지나가던 나무의 잎맥과 시시각각 달라지는 햇빛, 멀리 이어지는 하늘까지 한 번쯤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김보희 작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오래 바라보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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