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만약 당신이 '데스노트'를 줍는다면?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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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데스노트'를 손에 넣게 된다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정의를 외치며 범죄자를 처단하는 키라(야가미 라이토)가 될 것인가, 살인은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정의와 신념으로 키라를 쫓는 엘(L)이 될 것인가.
'데스노트'는 '정의'에 대한 흥미로운 가정으로 끝없는 논쟁을 유도한다. 정의의 심판자를 자처하는 '키라'와 이를 저지하려는 또 다른 '정의'의 충돌이다.
키라는 매력적이다. 법이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범죄자를 대신 처형한다. 이는 고통받던 피해자에게는 통쾌한 복수가 되고, 아직 살아있는 범죄자들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선사한다.
범죄자의 형량도 사람인 판사가 결정하는데, 키라의 정의는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피해자와 피해자의 주변인은 피해 사실만으로도 한참을 지옥 속에서 사는데, 가해자는 인권과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며 과보호를 받는다. 더군다나 피해자가 사망한 상황이라면 세상은 가해자에게 더욱 너그러운 태도를 취한다.
과연 법이 제대로 된 처벌을 내렸다면 키라의 탄생을 반기는 추종자들이 생겼을까?
키라를 쫓는 엘의 정당성이 강화된 건, 키라가 정체를 숨기고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범죄자가 아닌 무고한 시민(경찰 포함)의 목숨까지 뺏었기 때문이다. '범죄자만 죽인다'는 규칙이 깨짐과 동시에 키라의 정의는 무너지고 두려운 존재가 됐다.
'데스노트' 사용자는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에도 갈 수 없고, 탐정 엘은 인간死의 문제를 결코 인간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즉, 양측 모두 인간의 죽음을 '신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침범 시 용서받을 수 없는 절대 권한으로 나타낸다.
선과 악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정답이 없는 게임. '정의'를 두고 끊임없이 생산되는 새로운 관점과 논쟁은 '데스노트'가 만화부터 시작해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형태로 콘텐츠화 되어 긴 시간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였을 것이다.
'정의'를 과연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을까?
마이클 샌델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제시된 수많은 예시를 떠올려 본다면 정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양심과 잣대에 기대어 최악이 아닌 차악을 택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정의'로운 일이 아닐까.
현재 한국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데스노트'는 각기 다른 정의를 가진 키라와 엘의 치열한 두뇌 싸움을 생생하게 무대에서 펼쳐내고 있다. 만화, 드라마, 영화 등의 장르와 달리 직접 캐릭터화된 배우들이 눈 앞에서 자신들의 논리로 강렬하게 부딪히며 관객의 사고를 확장하고, 뮤지컬에서만 볼 수 있는 엔딩 장면으로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데스노트'를 통해 '정의'라는 놀이터에서 마음껏 방황해 보길 추천한다. 키라와 엘의 팽팽한 줄다리기 사이에서 망설이고 휘둘리며 '정의는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변함없는 진실'은 무엇인지 직접 다가가 보길.
[원재이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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