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느 귀신이 머무는 언덕 - 언덕의 바리

글 입력 2024.01.1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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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대한민국을 말하면서 떼어놓을 수 없는 역사다. 실제 그 시기를 겪어보지 못했던 이들도 이미 암울했던 그 시기에 대한 울분을 품고 자란다. 한 세대의 생물학적 정보를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것이 유전이라는 개념이라면, 한 세대의 삶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사실상의 역사적 유전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는 것. 이 역사적 유전을 잇는 작업으로서 조명 받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시도들이 있다. 그중 어떤 이야기는 희미하게 남은 자취마저 너무 강렬한 나머지 명확하게 남아있는 사료보다 더한 채취를 뿜어낸다. 예컨대 오히려 역사적 유전을 끊고자 했던 한 여성의 투쟁의 이야기.


‘프로젝트 내친김에’와 고연옥 작가, ‘극단 동’의 연극 <언덕의 바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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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극장의 객석을 배경으로 삼은 너른 평면의 무대를 임시로 설치된 객석이 ‘ㄷ’자 모양으로 둘러싼다. <언덕의 바리> 무대 구조는 이처럼 특이한데, 관객은 무대와 비슷한 눈높이로 앉아 무대를 관통해 서로의 (옆)얼굴을 마주한다. 긴장과도 같은 고요한 적막은 우리가 이 이야기의 배경을 알고 있기 때문일 테고, 그 적막 속에서 배우들의 몸짓은 스며들어 강렬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독립운동가 ‘여자폭탄범’ 안경신. ‘폭탄범’이라는 단어가 일제강점기 목숨을 내건 독립 투쟁임을, ‘여자’라는 단어가 가부장적 제도와의 싸움임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 인물이 벌였던 두 싸움에 대한 이야기다.


노파의 건조한 음성이 몽환적인 꿈과 섞인다. 언덕과 강을 배경으로 하는 환상 속에서, 노파와 노를 젓는 소년의 수수께끼 같은 대화는 그녀를 과거로 데리고 간다. 대한애국부인회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안경신(김문희)은 일제의 손에 모진 고문을 받고 죽어간 이들을 위해 무장투쟁에 직접 참여하길 원한다. 독립운동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의 테두리를 벗어나 무기를 쥐고자 하는 그녀를 모두가 만류하지만, 경신의 뜻은 완강하다.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옥에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그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죽어 ‘귀신의 싸움’을 하기로 결심한다.

 

무장투쟁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던 경신은 일제에 부역하던 조선인 경찰 현강(강세웅)으로부터 행일(최태용)을 숨겨준 일이 인연이 되어 그와 함께 상해로 향하게 된다. 경신은 얼마간 함께 거주하며 애정을 나눴던 행일에게 부인과 자식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절망적인 진실 앞에서 경신은 오히려 마음을 다잡는다. 그녀는 결코 한 남자의 여자가 될 수 없는 ‘귀신’이라는 자각. 경신은 기어코 광복군총영 결사대에 들어가 폭탄 거사를 준비한다.


여성의 굴레를 벗어나, 죽은 이들을 위하여 죽음으로 거듭나려는 경신의 발목을 잡는 것은 그녀와 행일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다. 산달이 다가오며 아이를 품은 경신의 몸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뱃속의 아이는 경신의 의지가 맞닥뜨린 최대의 강적으로 비유되는데, 산통이 닥쳐와도 결사를 강행하려 폭탄을 품었던 경신에게 아이는 그녀의 뜻을 무너뜨릴 두 번째 폭탄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뱃속의 아이에게 호소한다. 자신이 지옥에서 태어났듯 너도 그녀와 같은 지옥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므로, 너를 무사히 낳는 것은 지옥의 업을 잇는 죄라는 것. 기존의 모성 관념을 붕괴시키는 이 냉정한 인식은 아마도 이처럼 냉혹한 진실에서 잉태되었을 테다.

 

결국 거사에 실패하고 현강에게 잡혀 끌려간 재판에서 그녀는 거짓으로 결백을 주장한다. 그녀를 향한 검사의 냉소적인 신문은 최후의 날에 심판을 내리는 신의 음성처럼 공간을 울린다. 경신에겐 거사에 실패했던 그날이 사실상 그녀의 삶에서 마지막 날이었으므로, 이 심판은 모성과 천륜을 거부했던 경신에 대한 윤리적 심판이자, 올바른 죽음에 실패한 독립운동가 스스로가 자신에게 내리는 자책의 심판이다. 강한 의지로 기꺼이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경신.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 그녀는 그 심판 앞에서 살기를 간청한다.


시종일관 가해지는 처참한 폭력 앞에서 자신은 불쌍한 아이의 엄마일 뿐이라고 외치는 그녀는 처절해 보인다. 그러나 삶을 구걸하는 그녀가 낯설거나 비루하게 보이지 않는데, 그녀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친 것은 갑작스러운 모성애의 발현이나 당장 맞닥뜨린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삶을 주장한다. 그녀는 다음 죽음을 위하여, 지옥을 지옥이 아닌 곳으로 바꾸기 위하여, 다시 한 번 터져버리기 위하여 살아야 했을 뿐이다.


이 연극의 모티브가 된 바리공주 신화는 이승(삶)과 저승(죽음)의 세계를 잇는 이야기다. 죽어가는 부모를 살릴 생명수를 찾기 위해 이승에서 저승으로 향했던 바리처럼, 죽어갈(혹은 이미 죽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경신은 스스로 지옥으로 향했던 것. 한편 경신의 아들처럼 보이는 소년(이재호) 역시 부모에게 버려졌던(혹은 버려질 뻔했던) 바리이다. 그는 어느 언덕에서 아주 느리게 노를 저으며 다정히 그녀를 맞이하는데, 그가 경신을 용서한 것인지 대의를 위한 경신의 각오를 동정한 것인지 우리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오랜 수감생활을 마친 후 다시 만난 경신과 아이는 어느 날 함께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진다. 우리의 상상 속 사라진 그들이 머무는 곳은 아마도 땅을 딛고 하늘을 향해 솟아난 언덕. 죽지 못했으나 차마 살 수도 없었던 그들은 하늘에도 땅에도 속하지 않는 그 중간의 공간에 남겨진 건 아닐까. 기록이 희박해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으니 다만 그들의 삶과 죽음에 큰 빚을 진 사람으로서 그 언덕에 평화가 있기를, 모자가 화해와 용서와 이해로 함께 할 수 있기를, 이 땅에서 죽어간 것들의 삶이 다시 숨쉬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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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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