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삼켜져 소화되어 사라질 자신에 대한 현대적 공포 -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

글 입력 2024.03.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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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물을 왜 좋아하는가? 왜 보는가?

 

지금까지 나는 이 질문에 답할 기회가 없었다.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이다. 이번에 리뷰할 책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의 수많은 단편 사이사이에서 나는 미뤄왔던 질문을 떠올릴 기회가 있었다.

 

사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공포물'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공포물' 만큼이나 추상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아담의 의무'라고 불리던 생물의 자연 분류법도 그 명성을 오래 떨치지 못하고 다윈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하물며 분류법으로 가장 유명한 분야도 그런데, 생물보다 빠르게 진화하는 인간의 정신문화사가 장르에 구애된다니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결짓지 않더라도 첫 번째 점을 찍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현상을 최대한 기술하고 설명해야 하는 이유다. 나도 우선 '공포물'에 대해 정의하려고 한다. '공포물'이 감상자의 공포를 이끌어내는 장르라고 한다면, 모든 것은 공포물이 될 수 있다.

 

정신과 관련된 수많은 과학이 다양하게 입증하듯, 우리 안에는 성욕과 죽음, 삶과 파괴가 그 저변 아래에 늘 도사리고 있다. 그것들이 우리 안의 어떤 것과 만나 어떤 표상, 어떤 언어를 만나 변형되어 정신 속에서 어떤 힘을 가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하고 글을 쓰는 것조차 누군가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길가의 날카로운 돌, 부드러운 식빵의 하얀 속살, 사인펜의 둥그런 촉조차도.

 

하지만 장르는 기본적으로 다수의 공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나는 '공포물'을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공포-앞서 말한 죽음과 파괴의 보편적 원천-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장르라고 정의한다. 대부분 예술작품이 그러하듯이, 그러한 원천에서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행위에는 많은 기술이 필요하다.

 

여기부터는 내 자유로운 발상의 영역인데, 나는 작가들이 무의식과 맞닿아있는 공포를 인위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낯선 감각'을 잘 이끌어내는 기술을 잘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포는 다양한 원천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무언가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이 낯선 감각과의 간극이 이어질 때 안심하고, 이어지지 못하고 압도될 때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공포물의 기술은 상상이나 일상의 어떤 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 간극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으면서도, 제한된 정보의 추론으로 이끌어진 결론을 적대적으로 느끼게 하는 기술일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단순히 깜짝 놀라게 하는 공포물이 저물고, 내가 앞서 기술한 공포물이 유행하고 있다. 최근 공포 장르에서 자주 보이는 코스믹 호러, 오컬트물, 크리피파스타 등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지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심지어 '나'에게 적대적인- 것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제한적인 정보만을 제공하면서 세세한 세계관 설정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상상을 통해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제한된 정보를 통해 퍼즐을 맞추는 재미까지 느끼게 한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리뷰할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는 모범적이라고 할만한 책이다. 짧게는 한 두 장, 많게는 열 다섯 장 정도의 분량의 단편들로 묶인 이 책은 내가 앞서 말한 '공포의 작법'을 아주 잘 재현한 책이다.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 오늘날 유행하는 공포의 문법을 모범적으로 재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다양한 실험으로 가득 차 있지만, 몇 가지 두드러지는 기술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 의심스러운 서술자를 등장시키는 방식. 두 번째, 일상의 용어나 행위를 편집적인 방식으로 비트는 방식.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지만, 대부분의 단편은 서술자의 시선 자체를 비틀건 일상을 비틀건 글이 전개됨에 따라 밝혀지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과 비현실적 설정을 끼워 넣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소설이 환상 공포소설이라는 장르 아래에 묶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의 매력있는 단편 중 하나인 '자매들'을을 가져오려고 한다. '자매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 막 이사 왔기 때문에 이웃들에게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의 집은 블록 맨 끝에 동떨어져 있었고, 밀리는 벌써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전에 살던 여러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걸까? 적어도 휴일은 사람들과 같이 고민해야 할 걸까?

"그건 우리 휴일이 아니야." 엄마는 그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다르잖니."

"저는 여기 사람이잖아요." 밀리는 발을 구르며 볼멘 소리를 했다. "그렇잖아요. 지금은."

아빠는 눈을 굴리더니 방으로 나갔다. 다른 방에서 아빠가 삐걱거리는 찬장 문을 열고 술을 꺼내 잔에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꽤 많이 따른 듯 했다. 아마 오늘 밤 아빠는 바닥에서 잠들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이 가족의 구성원이 서술자인 나, 밀리, 엄마,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막 이사 온 상태고, 어떠한 이유에서 고립된 위치에 자리 잡았으며, 이전에도 그러하듯이 계속해서 고립해야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서술자인 나와 철없는 -이름으로 추정해보면-딸의 부탁에 어머니는 자신들이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과묵한 사람인지, 알코올 중독인지 잘 모르지만, 대낮부터 술을 마셔야 할 만큼 이 집안의 사정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독자들은 필연적으로 왜 이들이 고립된 역사를 가졌는지, 스스로 사람들과 만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들은 이민자인가? 특별한 전염병이 있는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철없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모습은 일상적이다. 이처럼 에븐슨의 단편은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면에서 수많은 정보를 유추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소설은 한 장이 가시기도 전에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밀리가 내게로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휴일에 뭘 하는지 아세요?" 밀리가 나에게 묻는 척했지만, 실은 엄마에게 하는 말이었으니 나는 굳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요. 어떤 휴일에는 화려하게 포장한 선물을 나눠 갖죠. 큰 소리로 웃는 남자가 지붕 위에 올라가서 굴뚝 아래로 그 선물을 던지는 거예요. 만약 불을 때고 있었다면 그 선물들은 전부 활활 불타겠죠. 정말 웃기지 않아요?"

어쨌든 내가 듣기엔 맞는 말이었다. 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어디서 들었니?" "여기저기서 들었어요."..(중략)

"또 있어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보면 피부 속 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데, 그때 보이는 자신의 심장을 그려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해요."

"그런 짓을 왜 해?"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자기를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거지." 밀리가 말했다. "그러니까, '저는 저 자신을 원치 않으니 당신께 선물로 드립니다.'같은 말을 하는거야."

이 짧은 문장 속에서 새로운 정보가 추가된다. 밀리는 휴일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산타클로스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고 있지만, 거울 속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기묘한 행위는 어떤 문화권에도 없는 문화다. 그리고 그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이해하는 방식도 일반적인 사람과 다른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엄마의 이러한 정보를 어디서 들었느냐는 질문에 밀리가 답하는 부분도 의심스럽다. 앞서 소설이 설명하듯,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교류하지 않고 살아왔다. 어떻게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 독자들은 밀리라는 서술자를 완전히 의심하기 어렵다. 휴일의 문화는 인터넷이나 신문에서 볼 수도 있고, 작중에서는 심장을 선물로 주는 문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산타클로스나 전혀 모르는 문화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은 엉뚱하더라도 일반적인 아이들에게서도 기대할 수 있는 발상이다.

 

내가 인용했던 것처럼, 소설집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에는 일상적인 언어로 수많은 정보를 추론함으로써 공포를 느끼게 하는 식의 전개가 많다. 소설을 읽는 재미를 해치지 않기 위해 '자매들'의 엔딩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을 것이지만, 소설이 전개되면 될수록 '이들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단서가 제공된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 다다르더라도 그들의 존재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이 소설집이 공포를 다루는 방식은 '이해의 공포'다. 수많은 정보를 나열해놓고, 전개에 따라 조합해가면서 다다르는 잠정적인 결론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일상의 범위 안에서, 때로는 완전한 상상의 범위에서, 가끔은 형식의 범위를 넘어서 공포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마냥 공포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고, 내가 앞서 기술한 '자매들'처럼 약간 위트를 섞어 쓰기도 하고, SF 소설처럼 쓰기도 한다.

 

이 리뷰에서 나는 이 소설의 기술적 작법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지만,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등장인물과 행위, 소재들도 이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포일러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약간 변형시켜 이야기하자면, 아버지와 딸의 관계, 친구와 친구의 관계, 여자친구와 나의 관계, 나의 소망과 나의 관계, 자매 관계, 태어나지 못한 형제에 대한 관계를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유지하면서, 그 이면에 있는 공포를 극대화 시키는 것이 이 작가의 역량 중 하나다. 사랑을 묘사하면서 사랑의 파괴적 면모를 묘사할 수 있는 이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그의 자식과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내는 글귀를 맨 앞에 써놓은 것은 약간 재밌게 느껴진다.

 

이 소설 전반에 깔린 것은 앞서 말했듯 '이해의 공포'지만, 이는 동시에 '외부세계가 적대적이다' 라는 이해를 통해 '이해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공포'이기도 하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본 적은 없지만, 이해와 고립이 맞닿아있는 독특한 작가의 감각이 어떤 편집적인 미학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그래서 이 소설집의 이름이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라고 지어진 것에 대단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 누구보다 외부세계의 적대감을 느끼는 이는, 그 누구보다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겁내는 자일 것이고, 그는 가장 적대적이지 않은 세계에 삼켜지고 싶지 않을 이일 것이다. 반면에 적대적이지 않은 세계에 안겨있고 싶은 이기도 할 것이다.


글쎄, 나도 그 감각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현대인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장르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시대정신을 기반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공포는 이해와 편집의 공포, 적대적인 외부세계로부터 삼켜질 것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언어도, 그림도 아닌 노래로 흘러나오는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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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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