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8일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Queen Elizabeth Olympic Park)에 새로운 문화 공간 V&A East가 문을 열었다. 박물관의 주요 미션은 동런던 커뮤니티의 역사를 수집하고 해당 지역에 기반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다. 인근에 위치한 런던 예술 대학교 UAL, BBC, 무용 극장 Sadler’s Wells와 함께 동런던 지역의 문화 허브인 East Bank를 형성하고 있다. V&A East는 지난해 5월 수장고인 V&A East Storehouse가 개관했을 당시 곧이어 열릴 동런던의 문화 공간으로, 기존 사우스 켄싱턴 본관이 다뤄온 공예와 디자인을 젊은 창작자들과 협업하여 동시대적 관점으로 조명할 것이라고 예고해 왔다. 본관의 전통적인 이미지가 강해서일까, V&A가 동시대 문화를 다루는 방식이 궁금했기에 개관 후 이곳을 방문해 보았다.
창의성이 세계를 바꾸는 방식, Why We Make
V&A East의 관람 공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두 층으로 구성된 상설전시 공간 “Why We Make”, 특별전이 진행될 2층, 그리고 6개월마다 박물관 곳곳에서 전시되는 신진 작가 커미션 작품 “New Work” 시리즈다. 그중 상설전 “Why We Make”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창의력이 개인이나 사회에 가져온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소개한다.
전시장에는 가구, 섬유, 도예, 패션 등 광범위한 분야의 컬렉션이 있었다. 연대기적, 지역적 분류체계에서 벗어나 환경, 지역문화, 민주주의, 정신건강 등 사회적 질문을 기준으로 삼은 큐레이션을 통해 공예와 디자인이 지닌 가치를 확장하고, 여기에 비서구권, 여성, 소수자, 동런던 커뮤니티 창작자들을 자연스럽게 조명하고 있었다. 관심 있는 주제나 분야에 따라 정해진 동선 없이 자유롭게 공간을 탐험할 수 있는 점이 V&A East 상설전만의 장점이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자면, 첫째로 리버풀의 도자기 타일 공방 Granby Workshop이다. 공방이 위치한 곳은 Granby Four Street라는 거리로, 해당 구역의 주택들은 노후화로 인해 철거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삶의 터전을 잃고 싶지 않았던 주민들은 주민 자치형 공동체를 조직하여 자체적으로 주택들을 보수하고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공방 또한 그 일부로, 운영과 생산 전반은 지금까지도 주민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욕실, 주방 등 공간을 수리하기 위한 자재로 조달되었다. Granby Workshop은 공예를 통해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물리적인 생활 기반을 지켜낸 사례로 주목받으며 2015년 터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터너상의 수상자로 지목된 대상은 지역 주민들과 프로젝트를 주도한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Assemble이었다.
Granby Workshop에서 제작된 타일과 조명. 사진: 직접 촬영.
전시장 곳곳에서는 젊은 아시아 디자이너들의 사례도 접할 수 있었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디자인 스튜디오 YUUE를 운영하는 중국인 디자이너 Xinyu Weng은 폐자전거 부품을 활용해 가구를 만든다. 전시장에는 자전거 부품을 활용한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는데, 다양한 자재들과 조합되며 나타난 모노톤의 색감과 곡선의 특징을 부각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로 재단된 기존의 부품들은 Xinyu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캡션에는 재활용과 업사이클링을 구분하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새로운 것을 위해 기존의 물건을 날것의 재료로 삼는 재활용과 달리 업사이클링은 폐기물을 줄이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한 문장으로 그가 이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Xinyu Weng의 업사이클링 가구 작업. 사진: 직접 촬영.
인도 우다이푸르 출생의 여성 디자이너 Aneeth Arora의 컬렉션은 동시대의 시선으로 전통공예를 계승하는 과정으로서의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인도의 전통복식 사리에 영감을 받은 패션 브랜드 Pero를 통해 인도의 장인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 실을 염색하여 사용하는 구자라트 지역의 ‘이캇’과 직조 과정에 무늬를 넣는 벵골 지역의 ‘잠다니 직조’ 등 다양한 지역의 전통문화를 옷에 담아낸다. 전시에서는 컬렉션이 담고 있는 전통 문화의 동시대적 계승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대량생산이 아닌 수공예 기법을 추구하는 브랜드의 방향성은 슬로우 패션의 사례로도 보여졌다.
잠다니 직조 기술이 활용된 드레스. 체크셔츠와의 조합이 사랑스럽다. 사진: 직접 촬영.
‘영국’ 흑인 음악의 역사, The Music in Black: A British Story
박물관 2층에는 V&A East의 첫 번째 특별전 “The Music in Black: A British Story”가 열리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대영제국이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했던 역사적 맥락을 시작으로 영국에서 흑인 커뮤니티와 그들의 음악 문화가 형성되었던 배경을 120곡의 음악과 함께 소개한다. 특별전 입구에서는 ‘음악’이라는 요소에 대한 생생한 관객 경험을 위해 동선과 시선에 따라 음악을 재생하는 센서가 탑재된 헤드폰이 제공되었다.
헤드폰은 이번 전시에서 매우 적합하게 활용된 몰입형 요소였다. 전시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재생되는 풍부한 음향은 전시 서문을 읽기 전부터 공간에 동화된 느낌을 주었으며, 악기, 무대의상, 사진 등을 통해 실제 아티스트들의 삶을 실감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Zak Ove의 턴테이블 “Remix Culture II”. 그의 조각 작업은 프리즈 런던 기간 중 진행되는 리젠트 공원 야외조각전에도 설치된 적이 있다. 사진: 직접 촬영.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공간은 “British-Born Black Music” 섹션.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 영국 흑인 커뮤니티에서 발달한 음악 장르를 연대기적으로 소개하는 공간으로, 음악에 문외한인 나조차도 노래를 들으며 직관적으로 장르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Lovers Rock 장르의 대표 중 하나로 소개된 Janet Kay의 검정 드레스 앞에 선 순간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온 그녀의 신비로운 목소리는 나를 1980년대로 데려다 놓는 듯했다.*
*재생된 노래는 “Silly Games”였다.
"British-Born Black Music” 섹션 전경. 가장 왼편에 자리한 검정 드레스가 Janet Kay의 무대 의상이다.
이번 전시는 V&A East의 첫 특별전인 만큼 전략적인 요소들도 보였다. V&A 관장 트리스탐 헌트(Tristam Hunt)는 지난 영국 국제박물관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컨퍼런스에서 “Museums and Soft Power in an Era of Hard Realities”라는 제목으로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발제를 맡았다. 그의 최근 발제가 V&A의 모든 기획 의도를 입증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만큼 V&A가 소프트 파워, 혹은 국가의 문화적 브랜드를 제도권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특별전에서는 V&A East가 흑인 문화를 동시대 영국의 소프트 파워로 제시하려는 목적이 두드러졌다. 전시 제목 “The Music in Black: A British Story”와 일부 섹션의 제목인 “‘Great’ Britain 1900-1969”, “British-Born Black Music”, “The British Sound of” 등에서 알 수 있듯 “British”라는 키워드가 “Black” 못지않게 강조되었는데, 이는 전시의 흑인 서사와 흑인 음악을 외부자, 이방인의 문화가 아닌 '영국의 문화'로 다루려는 의도로 보였다.
또한 전시 초입에는 흑인 커뮤니티의 영국 정착사로서 세계 1차 대전에서 영국군으로 참전하여 훈장을 받은 흑인 군인 아서 로버츠(Arthur Roberts)의 일기, 2차 세계대전 중 자원으로 결성되어 왕립 여성 육군 부대에 합병되었던 ATS*에 참여하고 이후 BBC 방송에서 가수 및 배우로 출연했던 나디아 캐티스(Nadia Cattouse)의 사진이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흑인 사회 또한 영국의 구성원으로서 근현대사를 함께해 온 역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었다.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의 약자
ATS에 자원입대한 여군의 단체사진. 둘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로 서 있는 여성이 나디아 캐티스다. 사진: 직접 촬영.
박물관 차원에서 소프트 파워를 강화하려는 전략적 선택은 이번 특별전의 파트너십에서도 드러났다. V&A East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이번 전시에 사용된 곡 목록을 게시하고 있으며, BBC Sounds와 협업하여 약 250일 동안 선별곡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한 점은 BBC와 파트너를 맺었다는 점이다.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 중 BBC와 협력한 이유는 영국의 방송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앞서 소개했듯이 같은 East Bank 기관과의 협업으로 V&A East가 동부 문화 허브 활성화의 주축이 되겠다는 방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V&A East는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가
새로 개관한 V&A East는 오늘날 문화가 생산되고 변화하는 과정에 주목하는 박물관이었다. V&A는 사우스켄싱턴 본관에서부터 공예, 디자인, 유물 컬렉션을 중심으로 문화의 역사를 연구하고 이를 사회적 문제와 연결지어 왔다. 이번 V&A East는 상설전 Why We Make와 신진 작가 커미션 New Work를 통해 창의성이 사회를 바꾸는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전시 공간 안에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관람 동선이 자유롭다는 점도 재미 요소다. 다만 본관에 비해 공간이 다소 협소하여 일부 관람객들은 오히려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신진작가 커미션 New Work 중 로라 윌슨(Laura Wilson)의 “Head! Look to the Workers”. 사진: 직접 촬영.
특별전 “The Music in Black: A British Story”는 오늘날 다양한 구성원을 지니게 된 영국 사회에서 동시대의 영국을 설명할 수 있는 문화정체성은 무엇이며, 나아가 이것이 기존의 영국성과 어우러지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기관으로서의 질문을 던지는 전시였다. 서구 기관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후기식민주의적 반성으로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의 서사를 다루는 것은 이전부터 이어져 온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Black”이 아닌 “British-Black”을 다루어 이들을 ‘포용해야 할 대상’이 아닌 ‘영국의 문화를 구성한 일원’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문화 장르 중 음악을 다루어 여러 인종의 기성세대들이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도 소재 선정에 있어 심혈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강제이주의 역사를 지닌 이들이 새로운 터전에서 일구어 낸 저항과 성취의 역사를 영국의 문화적 성과로 포장하는 것이 과연 영국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우려도 있으나, 영국인으로서의 소속감과 흑인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지닌 이민자 2-3세대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오늘날 유색인종 커뮤니티를 다루는 또다른 방식이 될 수 있다. 첫 특별전에 이어 다음 전시에서 V&A East가 어떤 질문을 이어갈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V&A East 3층 테라스에서 촬영한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공원 전경. 사진: 직접 촬영.
전반적으로 V&A East는 나쁘지 않은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전시 공간은 상설전의 경우 모든 소장품을 3시간 내외로 캡션과 함께 꼼꼼히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한 편이며, 특별전 또한 내년 1월까지 “The Music in Black: A British Story” 단독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재방문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퍼포먼스, 투어, 아티스트 토크 등 다양한 부대 행사의 적극적인 운영도 필요해 보인다. V&A East가 위치한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의 East Bank는 무용 공연장 Sadler’s Wells, 방송사 BBC 등과 더불어 약 150만 명 이상의 연간 방문객을 기대하고 있다. 동런던의 신흥 문화 클러스터이자 동시대 영국의 문화 서사를 보여주는 기관으로서 앞으로 보여줄 것이 많은 만큼 그 행보를 지켜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