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법칙 실종의 시대 - 연극 실종법칙

글 입력 2024.04.16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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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연극에 대한 줄거리와 일부 장면 묘사를 포함합니다.

* 공연 중에는 어두운 환경에서 큰 소리와 불빛이 활용되므로 관람에 유의하십시오.

 

 

실종법칙 포스터.jpg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기업에서 탄탄대로를 밟아가던 유진이 휴대전화를 꺼놓고 실종됐다. 경찰은 수사에 나서지만, 유진의 언니 유영은 동생이 사귀던 남자친구 민우를 의심한다. 이는 유영이 민우가 경제 능력이 없는 작가 지망생이라는 점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실종되기 전날 다른 남자를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우가 의심스러운 유영은 전기충격기를 가지고 민우가 살고 있는 반지하로 향한다.


연극 <실종법칙>은 실종된 유진의 행적을 찾는 유영과 민우의 심리극이다. 유진은 극 전개에 핵심적인 인물이지만 관객 앞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유영과 민우의 기억과 대사 그리고 정황에 의존하여 유진에 대하여, 유진의 행방에 대하여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법칙 실종의 세계


 

실종법칙 컨셉사진2.jpg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이유를 찾고자 한다. 찾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에게 원인을 추적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 있다는 모종의 확신을 전제한다. 연극 <실종법칙>에서 발생한 사건은 유진의 실종이었다. 유영은 자신이 아는 유진을 이야기한다. 민우 역시 자신이 아는 유진을 이야기한다. 이 둘은 자신이 아는 유진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유영은 유진이 ‘안전 이별’을 하지 못했을까 걱정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 범죄가 실재하는 현실에서 유영은 민우에 대한 신뢰가 없기에 가장 먼저 그를 의심한다. 유영과 유진이 같은 집에서 사는 자매 관계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유진은 연애 관계에서 답답하거나 힘든 점을 유영에게 말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유진에게 다른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또 다른 정보는 민우에 의해 유진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유영의 유진의 말을 통해, 그리고 민우의 사회적 지위를 근거로 민우를 의심한다.


민우는 자신의 상황으로 인하여 유영이 자기에게 퍼붓는 막말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리고 민우는 유진의 애인이었기에 유영이 미처 모르는 유진의 다른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민우가 하는 말들은 유영이 자신과 유진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기도 민우를 믿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극 중 민우가 비치는 울분의 표정은 혹시나 유영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긴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관객은 연극을 관람하면서 유영과 민우의 타당성과 그들의 인간성에 대해서 각자의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판단하는 유영과 민우의 모습도 결국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뿐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우리가 발견한 유영의 왜곡되고 괴팍한 면모나 민우의 음흉한 표정은 사실 그들의 진짜 모습이라기보다 유영과 민우 각자가 투영하고 있는 상대의 면모일지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유진이 실종된 명확한 이유 혹은 법칙을 찾고 싶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법칙의 실종 그 자체이다.

 

 

 

추리보다는 스릴러


 

다만 나의 경우 연극 <실종법칙>은 추리 스릴러보다는 단순 스릴러에 더 가깝다고 이해했다.

 

밀실에서 인물 간의 논의만을 통하여 관객에게 사건을 추측하고 언쟁이 오간다는 설정은 고전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7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관객이 수집한 정보가 결말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연극 <실종법칙>은 우리에게 추리물을 보여주기보다 인간이 서로를 판단하고 의심하는 과정 자체, 즉 추리라는 사유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점에서 연극의 결말을 반전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서사를 이탈하는 방법으로 결말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나는 <실종법칙>을 추리물을 벗어난 스릴러물이었다고 판단했다.


스릴러라고 생각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말은 구태의연할 정도이지만 그 문장을 굳게 믿은 이 연극이 투영하는 시대의 일면은 그 자체로 두렵기 때문이다. 이별을 통보해서 스토킹을 당하거나 맞거나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이 있다. 유영은 그 여성들을 걱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난한 자를 손쉽게 무시하고 모욕하며 관객 입장에서 유영보다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 민우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한다.


지난주 정소연 변호사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사설 ‘대페미의 시대’에서 그녀는 오늘날 페미의 의미에 대해서 말했다. “오늘날 ‘페미’는 사전적 의미의 페미니스트 또는 여성주의자의 약칭에 그치지 않고, 페미니스트에 대한 멸칭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 남성의 사소한 행동도 모두 ‘폭력’이라든가 ‘가스라이팅’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기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며 여자를 만나고 그래서 세상 물정을 모르고 앞뒤 없는 태도는, 그러니까 연극이 보여주고 있는 유영의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상상 속 페미 그 자체이다. 그래서 유영은 참 멍청하고 이해할 수 없어 보인다. 나는 유영이 멍청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인 것이 슬펐다.


유영과 민우는 부딪히지만, 그 갈등은 논의나 합의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유영은 경찰에게 신고했음에도 사적 제재를 할 결심으로 민우의 자취방을 찾는다. 공적 제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은 사적 제재를 결심하며, 이는 사회의 근간을 흔든다. 이 작품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유일한 인물이 유영이라는 것도, 불신을 기반으로 제대로 된 공적 제재나 사회적 합의를 기대하지 못한다는 점도, 유영이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도 스릴러가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연극도 이를 소재로만 사용할 뿐 더 이상의 설명이나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예술에서 금단의 영역을 쌓아 올리는 것은 세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나 그것이 소재를 채택하고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책임감이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는 적극적으로 오해를 해보고자 한다. 연극 <실종법칙>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보여준다고. 그 방법이 유쾌하고 깔끔하지는 않을 수 있다고. 이 연극을 유쾌하게 봤을 이에게도, 어딘가 불안하고 언짢게 느껴졌을 이에게도, 그렇지만 우리는 이 앞에 같이 서있는 것이 맞다고.

 

 

[진세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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