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청 팬이라고 할만한 가수가 없는 편이지만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어볼 때, "안예은이 좋아요."라고 말한다. 한번은 이후 이런 대답을 들은 적 있다. "마이너하네."라는 말이다. 이 말에 반은 동의하면서도 반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정작 그때 내 대답은 "그런가요?"였다. 동의도 부정도 아닌 예매한 말이었다.
가수 '안예은'은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인 '서바이벌 오디션 K팝 스타 시즌5'에 출연해 준우승을 차지한 이력이 있다. 사실 나는 이때는 그를 잘 몰랐는데 이후 방영된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OST를 통해 가수 안예은의 노래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왜 안예은의 노래가 '마이너'하다는 평을 받을까 생각해 보면 '특유의 한국적인 창법'과 '독보적인 스토리가 느껴지는 곡'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난 이런 부분에서 가수 안예은의 노래를 즐겨 듣게 되었다. 사극 한 편을 보는 듯한 분위기의 '홍연'과 '윤무', 설화 같은 이야기가 스며 있는 '백유화'와 '프루스트', 무언가를 들고 일어나야 할 것만 같은 '봄이 온다면'과 '카코토피아', 공포의 감각을 자극하는 '창귀'와 '쥐', 그리고 애절한 감정이 짙게 배어 있는 '유'까지. 그의 노래에는 분명한 색과 결이 있다.
그리고 내가 안예은의 음악을 더 깊이 좋아하게 된 지점은 이처럼 다양한 세계관과 정서를 하나로 모아내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미니앨범 '섬으로'와 '섬에서' 발매부터다. 이 두 앨범은 단순한 노래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안예은의 음악 세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자 그가 왜 '마이너'라는 말로 쉽게 정리될 수 없는 아티스트인지 보여주는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섬으로와 섬에서
'섬으로'는 2021년에 발매된 안예은의 미니앨범 2집이다. 난 원래 노래는 음원 사이트를 듣는 편이다. 그래서 '섬으로'의 곡들도 음원 사이트에서 처음 들었는데 "아, 이거는 실물 앨범을 사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처음으로 구매한 안예은의 앨범이 되었다.
'섬으로'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가자', '출항', '항해', '난파'까지 총 다섯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곡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한 사람의 여정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앨범 소개에서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과 감상은 전적으로 듣는 이에게 '맡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각자의 섬으로의 여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앨범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발매된 '섬에서'는 '섬으로'와 세계관이 맞닿아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다. 역시 다섯 곡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자와 짝꿍인 '멀리', 출항과 짝꿍인 '소식', 항해와 짝꿍인 '무', 난파와 짝꿍인 '문'. 그리고 '에필로그'로 마무리된다. '섬에서'는 '섬으로'의 여정을 다른 시선으로 보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두 앨범은 각각 '새로운 세계로의 여정'이라는 큰 틀을 공유하면서도 서로를 비추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나의 앨범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 두 앨범은 따로 떼어 듣기보다 함께 이어서 들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같은 여정이지만 다른 위치에서 바라볼 때 전혀 다른 감정이 된다는 점이 이 앨범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처럼 느껴졌다.
가자와 멀리
창문을 열고 빗장은 모두 버리자
가벼운 걸음 신이 나 뜀박질 된다
발맞춰 춤추고 잔을 세게 부딪혀
오늘이다 가자
'가자'는 여정의 출발점에 놓인 곡으로 하나의 초심이자 결심처럼 느껴진다. 아직 가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기 직전의 순간, 두려움보다 설렘, 결심이 앞서는 상태가 느껴져 노래 전체가 희망차고 웅장한 분위기를 띤다. 이는 마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확신처럼 단단하게 울린다. '가자'를 듣고 있으면 이 곡이 단순히 이동이나 여행을 말하는 노래라기보다는 어떤 선택을 하기 직전의 초심, 혹은 삶에서 한 번쯤 맞닥뜨리게 되는 '모험을 선택하는 순간'을 상징하는 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달려라 달려라 가련한 너의 운명을 향해
한 치 앞 모르니 깨지고 구르고 부딪혀보아라
돌아라 돌아라 사랑스러운 나의 작은 별
언젠가 기어이 만나는 그날까지
반면 '멀리'는 이미 여정을 지나온 이후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가자'가 출발선 앞에 선 사람의 이야기라면 '멀리'의 화자는 이미 그 길을 한 번 지나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는 모험을 경험한 이가 새로운 출발을 앞둔 이를 바라보는 시선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모험을 결심했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노래에서는 성급함이나 결심의 긴장감보다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생기는 여유와 거리감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곡에는 '가자'에는 없던 연륜과 관조의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자'와 '멀리'는 분명 같은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간의 위치가 다르게 느껴진다. '가자'가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라면 '멀리'는 그 선택 이후에 남는 감정과 시선이다. 이 차이 때문에 두 곡은 연결되면서도 분명히 다른 온도를 가진다.
출항과 소식
닻을 올려 어기야디여차 나가자
비탄으로 뒤덮인 땅은 뒤로하고
소리 높여 어기야디여차 노래해
찾아가 또 다른 시작을 하게 될 그곳을
'출항'은 '섬으로'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자 2026년을 맞아 두 번째로 들은 노래다. 새해 첫 곡은 아니었지만 '출항'이라는 제목 그대로 이 곡은 정말 시작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다. 미지의 세계,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항해하기 위해 닻을 올리는 순간은 마치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어왔던 꿈을 마침내 펼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올해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에 자연스럽게 이 곡을 찾게 되었다. '출항'에는 두려움보다 기대가 앞서는 순간의 감정, 그리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일단 떠나보겠다는 용기가 담겨 있는 듯하다. 노래 전반에 흐르는, 신나고 부푼 분위기는 그런 마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어서오거라 들뜬 마음 안고
오색 빛 꿈들을 주머니에 가득 담은 채
뛰어들어라 잔인한 모험 속으로
새벽을 여는 푸름과 축배를 들자
'출항'이 새로운 시작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노래라면 '소식'은 그 꿈이 이미 어딘가에 닿았음을 알리는 노래처럼 들린다. 듣고 있으면 이미 그 여정을 겪은 존재가 다음 이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먼 곳에서 항해를 시작한 이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환영과 긴장 속에서 축제를 준비하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소식'에는 묘한 이중성이 있다. 앞으로의 여정이 절대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떠나는 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태도. 마치 꿈을 이미 이뤄본 사람, 혹은 그 시간을 지나온 존재가 "힘들겠지만 와도 된다, 이곳에 너의 꿈이 있으니."라고 말하며 길을 열어주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출항'과 '소식'은 같은 여정을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처럼 연결된다. 막 떠나는 사람의 마음과 그 출발을 지켜보는 존재의 시선이 겹치며 이 두 곡은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항해와 무
앞을 내다봐야 하는 두 눈은
겁에 질려 뒤를 돌아보고 있다
다시 아침이 온다면 바른 선택을 할 수가 있을까
북두칠성이 없는 밤에 버려져 무얼 하나
'항해'는 지금까지 '섬으로'의 곡들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다. 출발의 설렘이 지나간 뒤 남는 것은 무섭도록 잔인한 고요함이다. 앞을 내다봐야 하지만 오히려 겁에 질려 뒤를 돌아보고 있고 선택이 맞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게 된다. 별도 없는 어두운 밤을 홀로 항해하는 배, 이는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확신보다는 불안이 앞서는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배를 멈출 수 없다.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이라기보다 자신의 선택을 계속해서 되묻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꿈들을 주워 모으자."
"버려진 것들."
"희망을 주워 모으자."
"쓸쓸한 것들."
"절망을 주워 모으자."
"따뜻한 것들."
"사랑을 주워 모으자."
"차가운 것들."
'항해'에서의 불안은 '무'에서 더 선명해진다. '무'는 섬의 생명들이 모험의 과정을 두고 웅성거리며 떠드는 곡이라고 한다. 나는 이를 듣고 있으면 마치 꿈을 향해 가는 도중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처럼 들린다. 조언과 응원 또는 참견과 만류, 어떤 목소리는 희망을 말하고 어떤 목소리는 절망을 말한다. 그것은 타인의 말일 수도 있고 자기 내면에서 갈라진 생각들일 수도 있다.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들려오는 이 구간에서 항해는 더 이상 낭만이 아니라 버텨야 하는 시간이 된다.
'항해'와 '무'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반드시 빛과 확신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방향을 잃게 하는 어두운 밤 속 흔들리는 마음과 웅성거리는 목소리 사이에서도 여정은 멈추지 않는다. 이는 결국 항해란 정답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선택임을 이 두 곡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난파와 문
아아 도대체 무엇을 붙잡아야 하나요
아 아니 이대로 흘러가도 되나요
아아 황홀한 구원은 없다는 걸 알아요
끝이 끝이 보여
결국 '섬으로'의 여정은 '난파'에 이르러 멈춰 선다. 이 곡은 새로운 곳이나 꿈으로 향하는 길이 언제나 도착이나 성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배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부서지고 끝내 흔적 없이 사라진다. 이는 비극적이지만 경쾌한 재즈 리듬과 반복되는 '랄랄라' 같은 허밍은 절망의 순간마저 어딘가 가볍게 흘려보내는 태도를 만들어낸다. 무엇을 더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에서도 잠시 벗어나는 듯하다. 그래서 '난파'는 무너짐의 노래이면서도 동시에 해방의 노래처럼 들린다.
안녕 인사를 건네는 것이 새로운 시작일지 작별일지
모두 너의 두 손안에 있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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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이야기
무엇이든지 준비돼 있어!
전부 그대 뜻대로
너의 뜻대로
나는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난파'를 들으면서도 이것이 완전한 끝이라기보다는 다른 형태의 시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문'을 듣고 나서야 확신했다. '문'은 '섬에서'의 곡 중에서도 특히 내가 좋아하는 곡이다. 이 곡이 인상적인 이유는 어느 쪽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끝으로 남아도 괜찮고 시작이 되어도 괜찮다는 태도.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지는 '전부 너의 뜻대로'라는 말처럼 실패조차 하나의 이야기로 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난파로 여정이 끝났다고 해도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가 완결된 상태일 뿐이다. 반대로 문을 다시 연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문'은 결말이라기보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 새로운 이야기의 여백처럼 느껴진다.
'난파'에서 여정은 무너지고 '문'에서는 비로소 선택이 남는다. 이 두 곡은 섬으로 향한 이야기가 반드시 성공으로 끝나야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끝났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이야기는 다른 형태로 계속될 수 있고 그 방향을 정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남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 두 앨범을 단순히 좋아하는 음악으로만 듣지 않게 되었다. '섬으로'와 '섬에서'는 어떤 정답이나 성공의 형태를 보여주기보다 선택하고 흔들리고 무너지고 다시 길을 나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남겨둔다. 그 태도 덕분에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듣는 사람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2026년을 맞으며 나는 새로운 시작을 많이 해보고 싶다. 그 시작이 꼭 멋진 도착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항해 중에 흔들릴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말이나 내면의 생각에 휘청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난파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모든 과정이 나만의 이야기로 남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싶다. 안예은의 음악이 내게 그런 용기를 주었듯 나 역시 정해진 결말보다 스스로 선택해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살아보고 싶다. 성공이든 실패든, 끝이든 시작이든. 새로운 이야기의 문 앞에 서 있게 된다면 나는 일단 한 번 열어볼 거다.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던 그 또한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