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비투스가 자기 계발 신화와 만날 때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4.0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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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이 네 글자 단어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어의 잘못은 아니고, 이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이나 어감, 그리고 이 단어를 계속 꺼내게끔 만드는 시대에 있다. 마력을 지닌 이 단어를 보고 있자면, 누군가 내 뒤에서 칼이라도 들고 뛰어오는 것 같은 두려움과 조급함이 밀려온다. 그러니 이건 지긋지긋하기보다는, 무섭거나 겁에 질렸다는 표현이 더 걸맞은지도 모른다. 질문도, 하다못해 문장조차 되지 않는 저 네 글자가 이리도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저 단어가 질문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저 네 단어 앞에서 언제나 고개를 숙여야 하고 눈을 내리깔아야 한다. 저 단어 앞에서는 그 누구도 당당할 수 없다. 언제나 우리는 굽실거리며 그럴듯한 변명을 만들기 위해 멈추지 않고 머리를 굴려야 한다. 왜 내가 아직 ‘자기 계발’을 하지 못했는지 혹은 왜 ‘자기 계발’에 성공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만들어 도태, 패배, 잉여의 개념과 멀어져야 한다. 그러한 변명 속에서 ‘왜 나는 나를 계발시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묵살되고, 그리하여 ‘나는 나를 계발시키고 싶지 않다.’라는 주장은 상상조차 불경한 것이 된다. 자기 계발 신화로 부흥한 신자유주의교의 독실한 신도가 되지 못한 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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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아비투스


 

부르디외가 사용한 개념인 아비투스는 SNS에 등장할 때마다 불같은 반응을 얻는다. 그 이유는 개념 자체의 새로움보다 단어의 남용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

 

아비투스는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평등을 설명하는 단어로, 사회화의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계층이 지닌 사고방식, 인지, 행위 양식 등을 인수하여 만들어진 개인의 생활양식 체계를 말한다. 이러한 계급의 구조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들을 통하여 만들어지므로 아비투스는 (사회구조에 의하여) 구조화된 (개인을 형성하는) 구조이다. 무의식적으로 사회문화적 환경을 통해 체화한 규범은 개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그 계층들이 공유하는 아비투스가 된다. 이 단어의 남용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아비투스가 개인의 취향을 ‘하층민의 것’이라고 폄하하는 용도로 사용될 때 나타난다. 예를 들어 SNS상에서 ‘상류층은 □□ 문화를 즐기는데, ◯◯한 것들을 즐기는 사람들은 다 못 사는 사람들이더라.’라는 문장에서 후자에 대한 혐오와, 후자보다 자신이 낫다는 듯한 우월감, 즉 부르디외에 따르면 구별 짓기가 행해졌을 때 더욱더 눈에 띈다. 

 

1930년 우체국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시골에서 산 부르디외는 엘리트 학교에 진학하여 외모나 옷차림뿐 아니라 자신과 전혀 다른 몸짓, 취미, 인맥을 가진 상류층 가정 아이들을 만난다. 그러한 자기 경험으로 부르디외는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원’을 불평등하게 배분받는다는 점을 간파했다.”(이상길, 《상징권력과 문화》, 2020, 컬처룩, p.382) 그는 자본에는 4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의 대물림인 경제자본, 인맥을 통한 사회자본, 사회적 명성인 상징자본,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고, 후에 부를 획득한대도 얻을 수 없는 ‘취미’인 문화자본이다. 그는 상류층의 아이들이 자신감 있는 태도,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 고상한 취미와 같은 문화 자본이 대물림되며 하나의 사회적 사이클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하류층은 알 수 없다. 이 모든 행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원래 그러한 듯 이루어지지만, 이것은 명백한 문화 자본의 차별적 재분배이며 이러한 재분배는 계층을 재생산하고 영속화한다. 상류층의 소비는 하류층과의 구별짓기를 통해 이루어지며, 그들은 실용성 대신 미적 가치, 구별을 위한 소비를 통해 물질적 잉여와 정식적 잉여를 과시하는 아비투스를 가진다. 

 

부르디외는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선망하며 하류층의 아비투스를 타자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개념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폄하하는 의미로 사용된 아비투스는 단어의 남용에 해당한다. 

 

그가 아비투스를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문화적 불평등이 존재하는데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이다. 이러한 불평등을 깨닫는 것이 진보의 시작이기에 피지배자들이 이 상황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그는 사회에서 계층 간 갈등과 혐오는 경제적 분배의 불평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취미, 생활양식과 같은 수많은 지점의 차이가 원인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평등한 분배를 위한 새로운 해결책 제시를 모색하도록 한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부르디외의 바람은 방향을 잃고 좌초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비투스와 자기 계발 신화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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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신화와 만난 아비투스


 

독일의 유명 컨설턴트 도리스 메르틴의 《아비투스 :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다산북스, 2020)에서 아비투스를 “타인과 나를 구별 짓는 취향, 습관, 아우라,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제2의 본성, 계층 및 사회적 지위의 결과이자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메르틴은 이어 자신과 다른 계층의 아비투스를 목표로 삼는다고 말한다. 하류층 출신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중산층 출신은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목표로 한다. 어떻게 계층 상승이 가능한가에 대한 답변으로 이 책은 ‘나의 아비투스를 상류층의 아비투스로 바꾸기’를 제시한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가 바뀔 수 있다고 말했기에 (실제로 그도 그랬다) 우리는 성공한 이들의 아비투스를 분석한 이 책을 읽고 우리는 노력을 통해 우리의 아비투스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든다. 우리가 아비투스를 계층 상승을 위한 목표로 선정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아비투스는 개인의 실천 행위이자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문화적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를 겨냥하여 그를 비판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조를 신분 상승의 목적으로 두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사회적 구조를 비판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으로 사회적 구조를 공고히 하는 일, 이 역설을 자기 계발 신화는 해내고야 만다. 


백인 연예인과 한국 연예인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백인보다 더 하얀 피부를 가진 한국 연예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이제 누가 백인이지?’라고 말한다. 이에 많은 사람이 공감을 보냈다. 인종적 특징인 피부색만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을 풍자하는 유쾌한 촌철살인인 듯 보이나 사실 그 안에 담긴 차별적 함의는 여전하다. 흰 피부가 사회 계층에서 높은 곳에 속한다는 것. 여전히 흰 피부가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러니 저 문장은 흰 피부를 찬양하는 이들을 비판하면서 흰 피부를 찬양하는 문장이 된다. 이 책에서 사용된 아비투스도 이와 비슷하다. 사회구조를 비판하기 위한 단어가 어느새 우리의 신분 상승을 위한 자기 계발의 동기가 된다. 

 

문화적 위계의 불평등을 사회 계급의 불평등으로 해석한 부르디외의 개념은 오히려 하류층을 다시금 혁명의 주체에서 사회의 외부인으로, 타자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자기 계발의 논리구조에서 하류층의 아비투스를 가진 이들은 ‘자기 계발’을 하지 않은 이, 그러므로 ‘노오력하지 않은 이’가 된다. 신자유주의교의 자기 계발 신화는 과잉긍정을 모토로 한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자기 계발로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얻어 계층을 도약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너는? 이곳에서 다시금 구조적인 문제는 사라진다. 

 

신자유주의를 체화한 현대인들은 아비투스 개념이 내포하는 사회적 계급이 유지되는 논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는 상류층의 취향과 미적 감각이 오롯이 그들의 노력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실제로 높은 감각을 가졌다고 느낀다. 이것은 그렇기 때문에 상류층들이 우월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우월한 집단에 대한 지배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사고의 토대가 된다.

 

부르디외는 문화적 위계와 사회적 위계를 상응시킨다. 이는 아비투스가 개인의 교육 수준과 가정의 경제적 층위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치며 이러한 환경에서 생성된 아비투스는 결국 지배-피지배 관계 속의 투쟁을 통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 위계는 경제 위계를 통해 생성되며 이는 사회 위계를 형성하며,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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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의 아비투스를 얻을 수 있다는 허상



자기 계발을 통해 나의 아비투스를 상류층의 아비투스로 바꾸어 계층 상승을 이루겠다는 허상이 깨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류층을 향한 대중의 광적인 집착은 일명 ‘흙수저’ 시절을 고백하며 자수성가를 이룬 연예인을 응원하는 과거 사회에서 ‘금수저’라는 사실을 연예인의 매력으로 삼는 현대 사회로의 변화에서도 손쉽게 읽어낼 수 있다. 밑바닥에서 고난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는 고구마 서사로 읽어내고는, 상위 계층이라는 사실을 숨긴 주인공이 하위 계층을 향해 가하는 강한 수위의 위계적 보복을 참교육 서사로 읽으며 열광하는 사회에서 상류층의 아비투스는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있는 한 끼의 식사와도 같다. 

 

그러나 ‘상류층 아비투스를 통해 계층 상승을 이룬다’라는 말은 불가능하다. 상류층의 아비투스는 기본적으로 ‘구별 짓기’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질적 과잉과 정신적 과잉을 드러낼 수 있는 가치 소비를 행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아비투스를 따라하는 일은 고개를 들면 탐스러운 과일들이 보이고 턱 밑까지 물이 차 있지만, 배가 고파서 손 뻗으면 과일들은 구름 위로 올라가고 목이 말라 허리를 숙이면 물이 모두 메마르는, 탄탈로스 왕이 갇힌 타르타로스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과 같다.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다.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구조는 구조로 존재한다. 개인은 구조를 얻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교에서 자기 계발은 교리를 체화해야 증명 가능한 독실함을 얻는 수단이다. 스스로를 고갈될 때까지 파먹으며 계발하는 일은, 합리적 주체인 인간이 정복해야 할 자연을 고갈될 때까지 개발하는 것과 같고, 전 지구적으로 기후 위기가 도래한 것처럼 스스로는 결국 고갈되어 탈진될 결과만이 남아있다. 신자유주의교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나’가 ‘나’를 착취하길 요구한다.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요구하고, 그로 인한 성과를 만들어내기를 요구한다. 이는 자본가 주체보다 더 악독하게 이루어진다. 내가 나에게 학대는 스스로에게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만성적으로 피로해한다. 이것이 철학자 한병철이 말하는 ‘피로사회’이다. 이제 피로하다 못해 탈진이 눈앞에 있다.

 

부르디외는 불평등의 인지가 저항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신자유주의교의 불가능한 자기 착취를 수행하라는 자기 계발 신화를 인지하는 것이 저항의 첫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비투스가 자기 계발 신화 안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물을 마실 수도, 과일을 따 먹을 수도 없어 결국 탈진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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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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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거구
    • "스스로를 고갈될 때까지 파먹으며 계발하는 일은~(중략)~스스로는 결국 고갈되어 탈진될 결과만이 남아있다."이라는 문구는 쉽게 동의되지 않습니다. 고갈되고 탈진되는 결과라면 그것은 온전한 자기계발이 아니니까요. 자기계발이 빛을 발하는 때는 그 계발의 결과가 나왔을때가 아닌 과정에서 성장하는 기쁨을 느낄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불평등의 구조를 비판하기위해 만들어진 개념인 아비투스와 불평등을 더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이 엮여서 풀어내신 건 너무나 흥미로운 관점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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