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그래도 푸른밤은 계속되겠지

“수고했어 오늘도, 잘 지내 어디서든." 푸른밤을 기억하며.
글 입력 2023.11.3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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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보던 드라마 두 편이 연달아 종영했다. 시원섭섭했다.

 

지난 몇 달간 그야말로 도파민의 노예가 된 만큼 이야기에 미쳐 살았다. OTT나 숏폼에 익숙해져 본방사수라는 말이 낯설어진 요즘 시대에 다음 화가 간절해서 한 주가 너무 느리게 흐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종영에 가까워질수록 차라리 빨리 결말을 알고 감정 소모가 적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즐겁고 설레는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이 교차했다.

 

비록 가상에 불과할지라도 고작 몇 달 사이 친숙해진 어떤 세상과 이별하는 일은 언제나 아쉽다. 하지만 한동안은 허전함이 지속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언제 그랬냐는 듯 별 감정 없는 날들을 보내고 또 다른 새 즐거움을 찾아 빈틈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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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마지막 방송을 했다.

 

밤 열시부터 두 시간 동안 긴 하루 끝을 다정한 소리로 채우던 그 프로그램은 제 이름처럼 어두운 밤을 푸른색으로 칠하던 방송이었다.

 

까만 밤이 아니라 ‘푸른 밤’이라서 좋았다.

 

누군가의 지친 하루를 가득 싣고 달리는 밤 열 시의 지하철 칸은 열차 달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린다. 답답한 공간을 가득 메운 고단함 속에 그리 치열하지도 않은 하루를 보낸 나의 한숨을 더하곤 했다.

 

땅 아래를 달리는 열차는 별도 달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면 마주치는 누군가의 정수리와 지친 어깨 위로 무겁게 쌓인 피로가 읽힐 때면, 불 켜진 내부에 있으면서도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는 중인 것만 같았다.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만들어내는 거센 진동과 찢어질 듯한 바퀴 마찰음의 방해 속에서 오프닝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읽히는, 실은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멘트 뒤로, 이어지는 그날의 첫 곡을 듣고 나면 이유도 모르게 외로웠던 캄캄한 밤이 다정한 푸른밤이 되었다.

 

까맣게만 보이지만 낮에든 밤에든 하늘은 언제나 푸르게 빛나고 있다. 낮의 푸른 도화지 위로 지워지지 않을 먹색 물감을 칠한 게 아니라 잠시 검은 종이를 덧댔을 뿐일 테다.

 

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푸르게 빛나고 있는 밤하늘처럼 푸른밤은 잔잔한 위로와 실없는 웃음으로 밤의 활력을 들려주었다. 밤이 항상 고단하고 쓸쓸할 필요는 없다는 걸, 하루 끝 역시 충분히 생동감 넘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듯이 지금의 시련과 고통 역시 언젠가 사라지고, 낮이나 밤이나 하늘은 항상 푸른 것처럼 희망과 행복은 언제나 우리 삶과 함께 한다는 것.

 

나에게 ‘푸른밤’이란 그런 의미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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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시간대 지하철을 탈 일이 사라지면서 조금 소홀해진 사이 갑작스레 종영 소식을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랜 청취자도 열렬한 팬도 아니었는데 한동안 괜히 심란했다.

 

드라마 종영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드라마는 끝이 결정되어 있는 법이지만 라디오는 아니었다. 단 한순간도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들어본 적이 없던 거다.

 

존재 자체가 유한한 삶을 살아가기에 영원불변할 수 없다는 전제가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본질이 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영원할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내게는 이 라디오 프로그램이 그랬다.

 

18년 동안 이어져온 방송이라고 한다. 그 세월 동안 몇 명의 디제이가 머물다 갔지만, 마지막 디제이였던 ‘옥상달빛’은 무려 5년 동안 누군가의 매일 밤 열 시를 함께 했다. 1800일이 넘는 시간이라고 한다.

 

매일 같은 시간을 함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습관이고 관성일 테다.

 

일상을 소재로 하는 라디오는 드라마나 예능처럼 도파민이 폭발하는 그런 장르나 영역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실시간을 공유하는 방송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DJ가 바뀌는 일은 꽤 흔한 일이며, 프로그램의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된 그 역할의 특성상 DJ의 교체로 프로그램을 이탈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라디오가 지닌 내밀한 소통과 특유의 유대감 때문인지 정든 DJ를 떠나보낼 때면 그 마지막 방송은 대개 아쉬움과 눈물이 가득해지곤 한다.

 

DJ 교체 소식에도 슬퍼지기 마련인데,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온 프로그램의 종영은 어떠한가. 단순히 아쉬움과 슬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다.

 

18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쌓아온 추억이 멈추고, 밤 10시 91.9MHz라는, 시공간의 약속이 형성한 만남의 장이 소실되면서 무형의 전파를 타고 이어져온 관계들이 끝내 해체된다. 

 

무엇보다 당연했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들이 모여 당연해진다. 같은 시간 같은 이야기와 음악을, 때로는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가 됐다. ‘가족’, ‘식구’, 오직 라디오만이 지니는 정겨운 호칭 문화가 유독 와닿는 순간이다. 

 

무언가가 당연해지는 과정은 그 결과와는 달리 꽤나 번거롭다. 더 이상 귀찮음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 수도 없는 귀찮은 과정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소하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기에, 특히나 필수불가결하지 않은 무언가를 당연하게 만드는 것은 애정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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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요즘 시대에 라디오를 듣는 것이 촌스럽다고 말한다. 재미와 자극이 넘치는 시대에 일상적이고 삼삼한 콘텐츠가 어떤 매력을 갖느냐고 묻는다.

 

TV 마저 왕좌의 자리를 빼앗겨가는 시대이기에 라디오의 영향력이 과거의 영광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TV의 등장으로 완전히 사라질 거라 여겨졌던 라디오가 그만의 영역을 지키면서 여전히 꽤 많은 사랑을 받고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까?

 

어쩌면 진정한 소통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관계의 범위와 소통의 방법은 확장됐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움이 늘어간다. 보고 들을 것들은 많지만 정작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은 마땅치 않은 것도 같다.

 

라디오가 일상적이라 심심하다는 사람들은 과연 알까, 일상적이기에 강한 힘을 갖는다는 것을. 들어줄 귀가 필요한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특별함보다는 고유함을 조명하기에 여전히 매력적인 매체라는 것을.

 

일상적이라 약하다는 편견과는 달리 누군가의 당연한 일상이 되었기에 그만큼 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함께이면서도 외로워지는 이 같은 시대에, 라디오가 말이다.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종영한다는 소식에 이렇게나 슬퍼지는 건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무언가와 이별을 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때로는 세상이 조금은 천천히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낭만도 감성도 효율 앞에 자취를 감추는 세상에 라디오를 사랑하는 이유를 꼽자면 부드럽고 다정한 힘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지만 바쁜 일상에 지칠 때면 때로는 현실로부터 괴리되는 듯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사회가 좀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누군가의 비극에 점점 무뎌지고, 따뜻한 한 마디가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외로움을 쉽게 외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각박한 현실 속에 라디오가 지니는 가장 큰 힘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의 일처럼 느끼게 만드는 힘인 것만 같다. 본질적으로 청각으로만 전해지는 매체인데도 실시간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보이지 않는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지곤 한다.

 

때로는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처럼, 앞만 보고 빠르게 가는 것만이 미덕인 양 착각해야 하는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발걸음을 늦추며 뒤처진 이들을 살펴볼 줄 아는 세상이라면 좋겠다. 빠르게 가느라 놓쳐버린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우리였으면 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사랑하는 건 그 부드럽고 다정한 소리들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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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밤을 사랑하던 청취자 가족들은 어디로 흩어질까. 

 

영원한 이별은 아니겠지만 더 이상 푸른밤에 함께 만날 수는 없는 거겠지. 라디오 프로그램이 끝난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도, 나의 삶 전체가 뿌리째 뒤바뀌지도 않을 테지만 한동안 이 허전함을 달랠 수는 없겠지.

 

무언가를 얼마큼 사랑하는지는 이별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같다. 이미 당연하게 굳어진 것이 빠져나가고서야 그 빈자리를 통해 그것이 차지했던 공간을 가늠하게 되는 법이니까.

 

마지막 인사에 이별을 실감했다. 또 오라는 매일의 인사 대신 잘 지내라는 이별 인사가 푸른밤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했다.

 

더 이상 푸른밤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겠지만 함께 나눈 추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저마다의 삶 속에서 각자의 푸른 밤을 보내게 될 우리 모두의 오늘이 무탈했기를, 언제나 ‘푸른밤’ 같은 평안하고 행복한 순간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수고했어 오늘도, 잘 지내 어디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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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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