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알게 된 건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시작이었다. 학교라는 사회에서부터 경험하는 이질감과 불쾌함이 겨우 중학생이었던 내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 남학생들은 인터넷 생방송 BJ들의 걸은 말을, 더 나아가 성인물 배우들의 신음이나 대사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 앞뒤 없는 모욕적임에 분개하면서도 한둘이 아닌 그들에게, 어쩌면 그 현상에 이름을 붙이지는 못했다. 다들 쉬쉬거리며 XX베스트나 XX인사이드 갤러리 같은 사이트를 하는 것이라며 말은 하며 이미 우리 사이에 내재된 신상 털릴지도 모른다. 조리돌림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에 맞서고 싶은 마음은 이미 움트고 있었는지 모른다. 최근에서야 대두되는 극우화라는 단어보다는 불쾌하고 싫다는 원초적인 감정이 더욱 컸다.
방송에서 강남역 살인사건과 범행 동기들이 보도되던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너 페미니스트야? 당황스러움과 나의 무지함이 뒤섞인 대답은 그게 뭐야? 였다. 친구의 질문을 시작으로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미 그때 무지한 것이, 점차 무력감을 느끼는 자신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같은 입문서부터 정희진, 수전 손택 같은 본인을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작가들의 저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글들은 내가 현상보다 나의 예민함으로 치부한 것들이 정말 문제라는, 충분히 불편해해야 한다는 답변 같았다. 이후로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이름 붙여진 2016년이 지나면서 주변 여자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잘못된 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에 덜 두려워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분노와 공포를 책 속 그녀들이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사실이 검열당할 때도, 너 페미임? 이라는 짧은 질문 하나에 오가는 수많은 눈빛 교환을 보면서도 외롭지 않았다. 그 판단과 위계가 잘못됐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고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여성 작가들은 책과 이론서들에서 언제나 그 감정과 현상에 이름 붙이고 있었고 그런 세상에서 잠시나마 일방적인 연대를 느낄 수 있었다. 수전 손택도 내게 그런 작가였다. 저서 타인의 고통을 접하면서, 다른 작가들이 찬미하는 손택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를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정치적이고 냉철한 글을 써 내려가는 작가이자 그 동시에 닮고 싶은 여자였던 손택. 그의 글 국내 초역 에세이들과 글들이 한데 묶여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 10년이 지난 당시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책을 여는 첫 문장은 이렇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누구든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대답하는 사람은, 프랑스인들의 신중한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여자일 것이다. 아직 나이 ‘공격’에 취약해진 나이대가 아님에도 웃으며 공감했다. 상대방에게 정말 의도가 없었다고 하여도 여성들이 나이에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젊음과 이어지는 사회적인 아름다움은 자연히 옅어지고 더 엄격한 성공과 미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손택은 이런 나이 듦에 대한 모순을 꼬집으며 여성들이 보내는 꾸밈 노동의 시간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목구비 하나하나, 육감적인 몸매, 반질거리는 머릿결, 심지어 반짝거리는 손끝과 발끝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될뿐더러 이를 이룰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이다. 심지어 그런 이들에게는 더욱 촘촘해진 잣대와 안티에이징이라는 불가능의 영역을 투과한다. 결국 승자가 없는 게임 속에서 많은 자원을 낭비하게 된다. 그럼에도 많은 여자가, 나 역시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추구하며 분투한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공감할 수 있기에 매서운 문체의 글이 소름 돋게 공감됐다. 더구나 이 글이 1972년에 쓰인 글이라는 점에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추구미와 도달가능미 사이에서 싸우고 있다는 마음이 조금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노화라는 당연한 과정이 거부하고 피하는 중에도 여자에게 가해지는 잣대에 있어서 더욱 견고하다는 사실과 나의 경험들이 뒤에 등장할 다른 글들처럼 변하지 않은 시의성이 느껴졌다.
풍성한 의미를 지닌 매혹적인 개념들은 원래 자기 모순적이다. 자유가 바로 그런 개념 중 하나다. 또 하나는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자연적 아름다움과 역사적 아름다움,원시적 아름다움과 인공적 아름다움, 개별적 아름다움과 순응적 아름다움, 심지어 아름다운 아름다움과 추한 아름다움까지, 익숙한 대립적 의미들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내포하고 있다.
여자들은 자주 모순을 느낀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느끼는 강박, 욕망을 가지면서도 그 욕구를 너무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살면서 조금씩 체득하게 되는 “여성스러움”의 기준들은 나를 혹은 누군가를 탈락시킨다. 건강보다는 아름다움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고 기형적인 노력까지 하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더욱 한국에서 탈코르셋 운동이 여성들에게 준 영향도 크리라 생각한다. 그 시간을 거쳐 각자의 타협점을 찾게 되고 외모 강박 등에서 서로를 해방하려 애를 쓰는 모습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글을 읽으며 여전하다는 패배감보다는 그래도 아주 조금씩 변화를 체감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그런 강박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안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이 점차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점차 마음이 움직인다. 동시에 우리가 사회생활 같은 외부 환경적 요소가 아닌 정말 나만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궁금하면서도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저변을 더 넓히고 기능적인 측면에서 건강함과 아름다움을 찾아갈 수 있길 상상했다. 손택의 말처럼 일찍 여성이 되어 능동적인 성인으로 남는 삶을 모두가 만들어 가는 세상 말이다.
여성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들며 이 사회의 나이 듦의 이중 잣대에서 비롯된 통념에 적극적으로 불복하고 저항할 수 있다. 가능한 한 오래 소녀로 살다가 굴욕적으로 중년 여성이 되고 그러다 불쾌한 노인 여성이 되는 대신, 더욱 일찍 여성이 되어 계속 능동적인 성인으로 남을 수 있고, 여성이 누릴 수 있는 긴 성생활을 훨씬 오래 즐길 수 있다. 여성은 얼굴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여성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손택의 글은 한 주제를 고찰하고 화각을 넓히고 좁혀가며 다방향에서 고찰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책에 묶인 에세이 중 세 편 (나이 듦에 관한 이중 잣대, 여성의 아름다움: 모욕인가, 권력의 원천인가?, 아름다움: 다음엔 무엇으로 바뀔 것인가?) 모두 아름다움과 그에 따라 느끼는 모순을 다루면서도 각기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상이하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의 생각이 완결되지 않고 계속 해야 하는 밀접한 문제들이 더욱 강하게 와닿는다. 많은 여성 작가는 글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독자들에게 힘을 보낸다. 내가 페미니즘 리부트 시절부터 얻은 그 감명들은 분명 요즘을 살아가는 어린 세대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작용할 것이다. 손택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1970년대에 쓴 이 글들이 그의 첨예한 시각과 말하고자, 논쟁하고자 하는 의지를 40여 년이 지난 2025년으로 여전히 크게 다가온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여는 글에 남겼듯 우리의 문제를 다룸에 필요한 것은 남성 지식인이 쌓아놓은 성채를 넘어서는 지식이자 키보드 워리어의 언어만큼이나 빠르고 명료해야 한다. 어떤 말들은 늘 가까워야 한다. 빠르게 공감을 자아내고 이해가 가능한 동시에 불평등에 대한 논지를 끊임없이 제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에 관하여는 그 필요를 충족하고 있다.
수전 손택의 대표작과 국내 초역 에세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중 첫 번째 권인 여자에 관하여는 여성들이 느끼는 감정과 현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그 첫 단추를 힘차게 시작한다. 그 시작에 있어 더 다양한 이들이 그의 글과 고찰을 엿볼 수 있길 바라며 강력히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