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한가운데에는 동상처럼 우뚝 선 비석이 있었다. 연극은 그 비석을 쓰러뜨리는 고이래로부터 시작된다.
조용히 해녀로만 살아온 고이래는 왜 갑자기 비석을 쓰러뜨린 것일까. 주변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럴 이유가 없다"고. 그리고 형사 강선웅은 이를 집요하게 쫓는다.
그러나 이내 드러나는 것은, 고이래를 둘러싼 모든 인연이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알면서도 끝내 말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의 슬픈 진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석의 주인은 채진광. 제주도민을 학살한 자였지만 국립현충원에 묻혔고, 그의 손자는 제주에 리조트를 세우며 승승장구했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권력은 건재했고, 이래 말고는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학살자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버젓이 서 있는 동안, 희생자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새겨지지 못한 채, 발 아래 묻혀 있었다.
연극 한가운데서 주인공 고이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부를 뿐이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노래가 대신 품는다. 그 침묵이, 어떤 대사보다 더 오래 남았다. 하지만 고이래가 침묵하는 동안,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이 저마다의 기억과 죄책감과 두려움을 하나씩 꺼내놓으며 고이래의 이야기를 대신 완성시켜 나간다.
그들은 모두 국가 권력 아래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들이었다.
극 중 고이래의 동생으로 등장하는 송인우는 부춘옥의 아들이다. 고이래는 부춘옥이 거두어 키운 딸로, 두 사람은 함께 자랐다. 인우는 고이래와 함께 그녀의 가족사를 파악해 나가면서 4·3 사건의 진상을 차츰 알게 된다.
왜 부춘옥의 아들에게는 무언가가 지워진 것인가. 송인우는 자신에게 쌍둥이 형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어머니 부춘옥이 살아남은 아들 인우만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것은, 친구인 고이래의 어머니 고운정의 위치를 밀고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친구를 팔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평생, 아들을 제주가 아닌 서울에서만 살게 했다. 부모 세대가 제주어를 쓰는 동안, 자식 세대는 표준어를 주로 쓴다. 언어마저 끊어냄으로써 그들은 과거와 거리를 두려 했다.
누가 부춘옥을 비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상황에서, 살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해야 했던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그녀는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진실은 형사 강선웅에게도 피해 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사건을 집요하게 쫓던 그였지만, 결국 드러난 것은 자신의 아버지 강철구가 그 비극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강철구는 이전부터 윗사람의 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고, 결정적으로 4·3 사건 당시 군의 지시로 고이래의 어머니 고운정을 직접 죽인 사람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강선웅은 자신 역시 이 사건에 가담한 사람이라는 죄책감을 느끼며, 비석에 빗창을 꽂는다.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까지 흘러드는 그 장면은, 4·3 사건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의 삶 안에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알고도 침묵했던 사람들, 자신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를 넘겨준 사람들. 연극 속 인물들이 하나둘 꺼내놓는 이야기들은 보는 내내 안타까움과 분노를 동시에 일으켰다. 그들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강요한 그 시대에 화가 났다. 개인의 비겁함이 아니라,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국가 권력의 폭력에.
8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지만,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공연장 밖에 걸려 있었다. 눈도 침침하고, 글씨도 잘 쓰지 못하지만 이 일로 잃어버린 오빠의 이름을 적은 손글씨부터 어린아이와 같은 그림체로 그려진 그날의 장면들. 단순한 선과 색으로 그려졌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여전히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여전히 비워진 비석 — 백비(白碑)
4·3 사건은 공식 집계로 1만 5천 명, 추정치로는 3만 명 이상이 희생된 비극이다. 당시 제주 인구 열 명 중 한 명이 희생된 일이다. 1948년에 일어난 일이 2003년까지도 쉬쉬해야 했고, 4·3 유가족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 신원조회는 물론이고 출입국, 입학, 임용 시험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다. 살아남은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했으며 2014년에는 국가추념일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고건 국무총리는 보고서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정의는 내렸지만, 그렇게 4·3은 여전히 '이름 짓지 못한 역사'로 남아 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초입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채 누워 있는 백비를 만날 수 있다. 훗날 4·3에 대한 진실 규명이 완료되어 정확한 명칭을 얻게 될 때, 비로소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한다. 정확한 명칭이란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이며, 왜 일어났는지 그 맥락과 성격을 온전히 규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사건' 혹은 '사태'라고 부른다. 열 명 중 한 명이 스러진 그 비극을, 그 단어들이 과연 담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이 백비가 아직도 눕혀진 채 비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전에 방문했던 9·11 테러 추모관의 Foundation Hall에는 'Last Column'이라 불리는 기둥이 있었다. 남타워에서 마지막으로 철거된 이 기둥에는 구조대원들과 유가족들이 남긴 메시지들이 가득했고, 실종자를 찾는 전단지들이 붙어 있던 그날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그 앞에 섰을 때, 이름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우리의 백비도 그러했으면 한다. 언젠가 저 하얀 비석에도 희생자들의 이름과 이야기들이 새겨져, Last Column처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말하지 못한 이름들을 노래에 실어, 오늘도. 백비가 채워지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4·3이 언젠가는 그 진실의 무게에 걸맞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기를 바라며 나에게도 이들의 이름을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