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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더러운 비둘기 - 인간동물들

나는 연극이 분노를 펼칠 때 조금 더 신중해줬으면 한다

by 서상덕 에디터
2026.09.04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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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둘기, 이제와 도시의 시궁창을 목욕재계할 곳으로 삼는 길 잃은 조류. 시궁에 기꺼이 몸을 담그는 것 중 땅을 기는 것으로는 시궁쥐가 있었으니, 나는 것으로는 이 비둘기가 있는 셈이라, 궁창의 불결함을 하늘로 퍼다 나름으로써 명실상부 현대의 흉조가 되었다. 날갯짓 한 번에 수만의 병원균을 펄럭인다 했던가, 사실 관계는 다 알지 못하나 적어도 2주는 씻지 않은 듯 깃털에 찐득한 것을 매달고 있는 그 외양으로 인해, 날갯짓 한 번에 수십 행인의 탄성을 낳고 능히 그 걸음을 물리곤 하더라.


      일찍이 흉조의 대명사로는 까마귀가 있어 그 소리의 불길함을 말미암아 미움받았으나, 자세히 알고 보니 영리하고 효심이 깊은 조류로써 오랜 누명을 벗은 바 있건대, 비둘기의 사정은 여기 빗대자면 아무래도 그 오명을 벗기가 쉽지 않으리라. 지탄받기를 거듭해 스스로 깨치기를, 미움받는 까닭이 제 몸 닦을 물에 있음을 알아 여느 새들과 같이 그 깃털에 청결한 윤기를 되찾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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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미’의 집, 카펫에 비둘기 하나가 죽어 있는 것으로 극이 시작한다. 유리창에 느닷없이 머리를 부딪었나. 그의 여자 친구 ‘리사’는 기겁을 하신다. 현세인들에게도 비둘기야 불결의 상징쯤으로 여겨지는 것에 다름이 없겠으나, 차마 만지지도 못하며 벌벌 기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여기실 불결함은 곱절이나 되어 보인다. 그럴 것이 근래 야생동물들이 전염성 병원균을 옮긴다는 정부의 위생 방침에 더불어, 가급적 접촉하지 말 것이요 곧잘 방역 센터로 연락하라는 지침이 지역사회를 어슬렁거리던 탓이다.


      ‘존’은 집 앞 정원에 비둘기가 무려 일흔아홉으로 불어나, 단체로 똥을 싸갈기는 탓에 마당이 오물 범벅이 되었노라며 이웃집 여인 ‘낸시’에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이렇듯 연극의 세계 속에 비둘기는 아주 큰 골칫거리로써 자리해 있었다. 그래서 시작은 비둘기였다. 정부 단체는 치안과 공공 위생을 이유로 비둘기를 죽이기 시작했고, 시민들도 아직 달리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 단 한 명, 우리의 ‘제이미’를 제외하고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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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미와 리사

       

       

      ‘제이미’를 단적으로 일컫는다면 생명 중심주의자라고 할까, 비둘기가 다친 것에 가슴 아파하며 그를 상자에 넣어 여자 친구 몰래 화장실에서 간호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 ‘리사’는 학을 뗀다. 전염의 위험이 있다느니, 불결하다느니, 하다못해 내가 불안하다느니 하여도 ‘제이미’에겐 소용없다. ‘제이미’는 불쌍하다고 말한다, 차마 두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쓸모없던 자신이 힘쓰고 이바지할 무언가’라고, 제 삶에서 찾은 드문 목적이라 피력하며 여자 친구에게 간곡한 이해를 부탁한다.


      그러는 실랑이가 펼치이는 한편으로 정부의 살처분 대상은 비둘기에서 여우로 확장된다. 여느 시민들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어련 그들이 역학 조사한 결과에 의거, 말 밑에 단단한 근거쯤 있겠거니-’. 제이미만이 여기 무작정 반대를 표한다. 그건 그저 예감과 연민이었다. 그로써 그가 보호하는 동물의 목록에는 여우가 추가된다. 이에 여자 친구는 아주 학질을 앓는 노릇이다. 정부는 감염병을 논하는데, 남자 친구란 작자는 그저 제 눈에 불쌍하다는 까닭으로 아무런 상의도 없이 집 안에 비둘기며 여우며 아주 동물농장을 차리는 판국이니.


      그건 마치 SARS가 유행한다는데 다친 박쥐를 집에 들이는 격이고, MERS가 유행한다는데 기어이 사막으로 가 낙타의 눈 두엄을 어루만지려는 것과 유사하다, 가슴의 이끌림을 오직 이유로 하여. 그러므로 나는 여자 친구 ‘리사’의 입장에 십분 공감했다. 그는 “나를 봐, 멀쩡하잖아”라며 옮지 않는다 피력하는데, 세상 누가 그 말만을 두고 이치에 합당하다 생각하랴.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저리 불안스리 생각함이 더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거리의 어느 한 부분에는 죽은 동물의 사체를 모아놓고 화염방사기로 태우고 있다. 여느 시민들은 아직 별다른 생각이 없다. 그저 ‘전염성 병원균이 짜장 존재하려니-’. 그럼에도 도시의 전염병이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던지, 도시의 격리가 시작되었다. 여느 시민들은 아직 별다른 생각이 없다. 그저 ‘2~3주면 곧 끝나려니-, 아무렴 이런 큰 사태에 이유가 없으려고’ 한다. 그들의 느긋한, 실은 별다른 생각 없는 태무심함이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코로나-19가 막 시작되려던 20년 초의 어느 날의 풍경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번에 MERS 격리가 얼마나 갔지?”

       

      “글쎄, 한 3주 갔나?”


      그로부터 장장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격리될 줄을 누구도 미리 헤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하간은 공중 보건을 빌미로 하는 격리 통제가 벌어짐에 있어 누군가는 익숙함 또는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가 있고, 누군가는 자유의 박탈에 대해 곧잘 저항의 불씨를 배태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 격리 통제 활동에 이바지하는 자가 있으며, 또 누군가는 그 통제 활동에 반대를 표하는 이가 있다. 이 모든 양상이 상존하는 것이 곧 인간의 사회라 나는 생각한다. 단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했으리라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드러난 다음 뒤돌아 확인할 수 있는 결과론적 정답의 의의란 희미하다. “것 봐, 내 말이 맞았잖아”라는 외침, 그것은 공허하다. 연극의 세계 속 설정과 달리 이편 세상의 것은 지독한 상흔을 남겼다.


      그러므로 결과는 오직 무언가 일어난 다음에야 오롯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성과 성찰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이 관점에도 한계가 분명하니, 어떤 것은 잃기 전에 예방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는 자성과 성찰이 그 얼만한들 그 또한 무의미할 것이므로. 마치 환경이나 전쟁이나, 누군가의 목숨같이.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함에 있어선 한 번 멈추어 신중해지고, 그런 신중함이 현실에선 또 하나의 지연을 낳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사람들의 신중함, 또는 망설임 탓에 골든타임을 놓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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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미

       

       

      주 정부는 방역을 빌미로 살처분 대상을 더욱 늘려가고, 그 핑계로 야생동물의 흔적이 있는 집과 공원마저 마구잡이로 태워버리며, 심지어 도시를 봉쇄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하 수상해지는 형세를 목전에 두고서도 여전히 노인들은 신중했고, 젊은이들은 끓는 피를 앞세워 광장으로 나갔다간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의 ‘제이미’는 자신만의 저항으로써 자택을 아예 야생동물의 부화장으로까지 몸집을 키워갔다.


      연극의 전반과 후반부를 나누는 기점을 도시 봉쇄로 간주하자면, 전반부까지는 평범한 일상의 호흡을 이어갔다. 갑자기 죽어가는 비둘기와 정부의 수상한 움직임, 화장실에서 비둘기를 간호하려는 ‘제이미’, 전염병을 두려워했고 자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그를 원망하는 ‘리사’, 두 사람의 갈등은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제이미는 거듭해서 리사에게 이 동물들이 위험하지 않다고, 우리가 보호하여야만 한다고 호소하였지만, 그 호소는 아직 일방적이면서 단순한 일상 맥락을 벗어나지 않았다. 즉, 두 사람 모두에게 이해와 참작의 여지가 존재했다.


      후반부에 이르러 사람들은 저항하기 시작했고 바깥으로 나선 사람들은 공원과 민가를 태우는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철조망과 나무에 자신을 묶었고, 제이미와 같이 안을 지키는 사람은 정부가 구축하려는 것을 지켜내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는 집 안에서,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의 저항을 추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집은 여자 친구의 집이다. 그가 멋대로 부화장으로 만든 집의 렌트는 여자 친구가 지불해 왔다. 비록 그녀의 수입이 바로 이 거주구를 폐쇄하고 야생동물을 살처분하는 정부 기구에서 온 것이지만 말이다.


      일전 제이미는 회사가 견디기 힘들다고 일절 상의 없이 곧잘 때려치웠고, 분노하는 리사에게 일방적인 이해를 갈구했다,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그때까진 그는 분명 선량하고 어리숙한 인물로 그려졌다, 그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결론부에서 제이미가 내뱉는 분노와 비난의 당위성은 약화된다. 그는 탄압하는 자의 돈으로 탄압받는 것들을 보호해왔던 것이다.

       

      도시가 봉쇄되기 시작하고,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리사는 점차 자기 직장에 회의를 느끼고, 어느새 사방이 발 디딜 곳 없이 변해있음을 마주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망설였고 마침내 후회했다. 그리고 이 모습에 제이미는 포효한다. “내가 말했잖아!!!!! 왜 보질 못해, 왜!!!!!!!!!!!! 그렇게 말해왔는데, 이 죄 없는 것들이 무슨 문제가 있다고, 으으으, 넌 보지 않았어, 볼 수 있었는데도!!!!!” 이를 바득바득 갈고, 눈과 목줄에 핏대를 세우며, 이상하리만치 격렬한 증오를 터트렸다.


      연극은 제이미의 입을 빌려, 그녀의 망설임과 후회를 거침없이 물어뜯는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우리들이다. 연극에 투영된 그녀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무관심과 망설임, 그리고 외면.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이미의 행위가 올바른 것이며, 우리 모두가 따라 마땅한 정답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우리가 이 우화에 있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일찍이 외면해 온 것들이 후에 올바른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이다. 정부가 조금씩 침습해 온 것이 야생동물 방역을 빌미로 한 시민권이었다고 해서, 제이미의 행위가 곧바로 선구적인 것이며 마땅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지나친 결과론적 해석이며, 하물며 결과론적으로 톺아보아도 빈구석이 너무 많다. 그가 행한 것은 “자신이 믿는 가치를 관철한 것”, 그의 행보에 훌륭함이랄 게 있다면 딱 거기까지이다.


      리사는 극초반부터 이어져 온 제이미의 행보에 관심이 없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위험하다 여겨지고 무엇보다 불결한 야생 짐승을 돕는 것에, 자신의 전 생애, 일상과 생계를 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간주할 수는 결단코 없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드물게 존재한다면, 그러지 못하는 인간이 더욱 많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란 걸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즉, 우리는 인간의 자연한 현실을 인정한 채로 실재하는 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


      하물며 그녀는 당시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무엇보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제이미의 일방적 퇴사로 인해, 현실의 문제는 더욱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직장은 야생동물 방역의 실행부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한다. 그녀가 몸담은 직업이 제이미의 가치관과 상충하고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질이었다면, 왜 제이미는 그녀와 이별하지 않았을까? 하물며 그녀의 피 묻은 돈을 받아, 자신의 생계를 꾸려갔을까? 하다못해, 그 또한 자신의 대계를 위해 그녀의 피 묻은 돈을 묵인한 것에 최소한의 자각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난 이쯤 되면 극이 비판하려 애쓴 여자 친구 역에 오히려 역의 동정표가 쏠린다.

       

      결과적으로 ‘제이미’의 분노는 어린아이의 치기처럼 와닿고 만다. 비둘기 살려서 뭘 그리 대단한 걸 했다고, 치를 떨고 눈을 부라리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건지, 몹시 불쾌했다. 하다못해 그 행적이 우연일지라도 현실에 유의미한 파문을 일었다면 모르겠으나, 어떤 소기의 목적과 대의를 지녔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가 행하고 지 것은 “자기 자신이 올바르다고 여긴 것”이지, “올바른 사회를 위한 희생”에는 미치지 못한다. 애초 그의 행위가 향하는 방향은 자기 자신일 뿐이었다.


      그는 “왜 이런 걸 보지 못해, 난 알고 있었어!”라고 외치는데, 그건 오히려 내 안에 정반대의 효과를 자아내고 만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꾸었는가, 어리숙한 사내를 격렬한 증오의 화신으로 바꾸어낸 건 무엇이며, 그 과정 내내 어떠한 변화의 흔적도 없이, 느닷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한 저 사내의 마음은 무엇인가. 비밀리에 쌓아온 인정욕구와 응어리진 선민의식은 아니인가.


      나는 연극이 분노를 펼칠 때 조금 더 신중해줬으면 한다. 굳이 눈을 까뒤집고, 이빨을 바득바득 갈면서 부르르 떠는 걸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그 정도의 높다란 감정 표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원인과 당위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런 감정은 무대와 객석을 단번에 휘어잡을 수 있을 만큼 강한 에너지를 내포하지만, 연극 장르의 미학이 ‘전달’에 있다면 그건 양날의 검과 같다. 높고 커다란 감정일수록 전달과 설득이 어려운 것은 어쩜 당연하다. 그리고 전달에 실패한 감정은, 찌꺼기만을 남기고 만다.


      이건 비단 연극에만 적용되는 문제의식이 아니라, 인간 감정에 대한 자연스러운 해석의 논리이다. 허구에서건 현실에서건 격렬한 분노는 배타적인 거부감을 자아내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는 불가피한 이유가 필요하다. 일상의 많은 분노가 바로 이 불가피함을 획득하지 못함에 따라, 대개 실패로 귀결되지 않는가? 그게 연극의 무대 위라고 해서 무엇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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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것이 더러운 비둘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연극의 막바지, 나무에 십자가 모양으로 걸린 인간의 형상으로 비둘기들이 몰려들어 살점과 뼈와 피와 골수를 쪼아먹고는 조금씩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교통카드를 찍고 인간의 틈바구니로 스미어 점차 분간할 수 없게 되곤, 곧 암전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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