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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소설 『북해에서』의 구조와
결말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총이 두 번 쥐어진다
군인이 겨눈 것은 역삼각형 구멍이다. 수로에 갇힌 오경을 향해 뚫린 그 구멍으로, 같은 군인이 얼마 뒤 비스킷을 흘려보낸다(58쪽). 처형장과 배급소가 구멍 하나를 나눠 쓴다.
수로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전쟁도, 죽음도, 살아 있는 것들도. 죽어가는 오경과 총을 든 군인만 남는다. 작가는 전장의 소음을 걷어내고 이 밀실 하나를 세운다. 아침이면 빛이 스미지만 손에 닿지 않는 거리에서 멈춘다. 승리도 패배도 좁히지 못하는 그 거리가 『북해에서』가 그리는 전쟁이다.
벽 너머에서 군인이 말을 걸어온 순간, 오경은 참아온 눈물을 놓는다. "수로에 갇힌 이후로 애써 외면해 온 절망과 외로움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터져 나왔다."(53쪽) 구멍은 세 번째 얼굴을 갖는다. 죽일 수 있는 자리, 먹일 수 있는 자리, 말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자리. 총구와 배급구와 창구가 같은 틈이다.
이 틈을 소설 밖으로 데려오면 낯설지 않다. 사람은 자기 안에도 구멍을 낸다. 배고프지 않은데 배고프다고 우기는 위의 구멍,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우기는 양심의 구멍, 계획 없이 후회만 쌓아 올리는 삶의 구멍. 오경의 수로가 두려운 것은 낯설어서가 아니다. 그 틈으로도 빛이 든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는 점에서 오히려 낯익다.
안톤 체호프는 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발사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소설의 총은 발사된다. 동시에 발사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손과 비스킷을 건네는 손이 같다. 전쟁 소설은 대개 고발 아니면 화해로 기운다. 우다영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총 하나에 상반된 결말을 함께 쥐여주고, 어느 쪽을 쥘지는 읽는 사람에게 넘긴다. 이 손을 놓지 않는 뚝심이 『북해에서』를 흔한 전쟁 서사와 갈라놓는다.
수평선도 같은 방식으로 두 얼굴을 갖는다. 오경이 꿈에서 건너는 북해는 처음엔 "완만하게 펼쳐진 수평선"이다가, 다음 순간 "벌떼처럼 이질적으로 너울거리는" 파도로 뒤집힌다(93쪽). 잔잔함 밑에 폭력이 접혀 있다는 것, 소설은 이 구조를 제목의 바다에서부터 새겨둔다. 북해는 소설 어디에도 실제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꿈으로 한 번, 뒤에 나올 소년의 입으로 한 번, 스쳐 지나갈 뿐이다. 지리가 아니라 지평, 도착하지 않는 곳이라서 오히려 제목의 자리를 차지한다.
2. 마라토너의 구조
목차는 나선-오경-미림, 세 이름이다. 소설은 나선의 집에서 시작한다. 아버지의 술자리, 후배 장교들 사이를 오가며 술과 커피를 따르는 열여덟 소녀. 스물일곱에 군 사고로 죽은 오빠가 있고, 나선 자신은 이미 결혼이 정해진 처지다.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 외화에는 이미 여자에게 정해진 자리와 남자에게 정해진 죽음이 나란히 놓여 있다. 후배 중 하나인 중위가 할머니의 전쟁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이야기 안에 다른 이야기를 품는 구조를 액자소설이라 부른다. 바깥 이야기가 외화,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내화다. 이 술자리는 외화에서 내화로 건너가는 문이 된다.
'북해의 슬픈 왕'을 반환점 삼아 이 순서가 미림-오경-나선으로 되짚힌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마라톤, 독자는 완주하고도 출발선에 선다.
되짚는 속도는 균일하지 않다. 반환점까지 가는 길은 느리다. 나선의 집, 아버지의 술자리, 중위가 꺼내는 할머니의 전쟁 이야기 — 여기서 외화가 내화로 스며들고, 오경의 수로가 페이지를 채운다. 장면 하나하나가 늘어진다. 반환점을 돌고 나면 다르다. 미림이 겪은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남편의 죽음이 몇 문장에 욱여넣어진다.
소설의 3분의 2 지점에서야 처음 등장하는 '북해의 왕' 앞에서, 서사는 숨이 찬 채로 결승선까지 두 다리만으로 뛴다. 오경의 수로가 정지된 시간이었다면 미림의 상실은 압축된 시간이다. 소설의 시간 운용에서 이를 장면과 요약이라 부른다. 장면은 순간을 늘려 보여주고, 요약은 사건을 건너뛰며 압축한다. 이 차이가 형식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다. 시작에 가까운 상처는 자세히 곱씹히고, 끝에 가까운 상처는 서둘러 지나간다. 반환점을 돈 사람의 걸음이 원래 그렇다.
액자도 두 겹이다. 나선의 외화가 오경의 내화를 열고, 미림의 외화가 아들 — 전생의 북해 왕 — 의 내화를 다시 연다. 겹친 액자 두 개가 나선-오경-미림 구조 위에 포개진다. 구조 자체가 우연이 아니라 설계라는 증거다.
미림에게는 두 친구가 있다. 목사님 딸의 집은 십자가집, 외지인 막내아들의 집은 뗏목집으로 불린다. 미림의 집은 오두막집이다. 이름이 이미 각자의 자리를 정해둔 셈이다. 뗏목은 물 위를 떠도는 것, 미림은 뗏목집 아들과 결혼하고 그를 잃는다. 집의 이름이 인물의 운명을 미리 걸어두는 방식으로, 소설은 또 한 번 형식을 의미로 바꾼다.
3. 미림의 목소리, 새어 나오는 화자
미림 장에서 문장은 종종 3인칭과 1인칭 사이를 오간다. "둘의 심장이 밀착된 채 쿵쾅거렸다. 사람의 마음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116쪽) 앞 문장은 3인칭 서술이고 뒤 문장은 화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죽음을 예감한 일을 하려는 남편을 막는 순간, 미림의 물음이 작가의 서술 틈으로 새어 나온다. 자유간접화법이다. 서술자의 문장과 인물의 속말이 인칭 표지도, 따옴표도 없이 한 문장에 함께 앉는 기법이다.
117쪽에서도 같은 틈이 벌어진다. "자, 봐. 아무도 너를 구해주지 않아. 그런데 너는 대체 무얼 구하겠다는 거야? 미림은 그의 시체를 놓아주고 돌아서서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십자가집 딸을 단번에 찾아냈다." 앞 두 문장은 미림의 속말이고 세 번째 문장에서 서술자가 다시 카메라를 든다. 독백과 묘사 사이에 이음매가 없다.
이 이음매 없음이 하는 일은 거리 좁히기다. 3인칭 서술이 유지하는 거리를 자유간접화법이 순간순간 지운다. 미림의 물음, 미림의 원망이 독자의 문장으로 곧장 건너온다. 나선에서 오경으로, 오경에서 미림으로 이어지는 동안 소설은 여성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인물의 목소리 안쪽으로 점점 깊이 들어간다. 그 마지막 자리에 자유간접화법이 있다.
4. 되짚히지 않는 것
반환점을 돌아 처음 자리로 돌아와도, 처음의 화자만은 되짚히지 않는다. 손자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 할머니는 군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남은 두 개의 비스킷을 어떤 마음으로 두고 왔는지 끝내 말하지 않는다. 사건만 전해지고 해석은 건너온 적이 없다.
이 침묵은 실수가 아니다. 85쪽에서 오경과 군인은 속담 하나를 놓고 갈라선다. "닭의 배 속에 달걀은 없다." 군인은 이렇게 푼다. "달걀이 먹고 싶다고 성급하게 닭의 배를 가르면 달걀도 닭도 잃는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닭은 죽어라 달걀을 낳고 달걀은 죽어라 알을 깨고 나오도록, 그런 고생을 영원히 반복하도록 삶에 가둬두어야 한다는 거야."(86쪽) 오경은 다르게 듣는다. "닭이 낳는 달걀도, 달걀에서 나오는 닭도 모두 그 순간에 존재할 뿐이라는 뜻이야. 유일하게 진짜인 건 지금이라는 뜻이지."(87쪽) 같은 속담에서 군인은 뫼비우스의 순환을 듣고 오경은 순간의 전부를 듣는다. 소설은 둘 중 하나를 편들지 않는다. 총과 구멍과 속담, 이 소설은 하나의 사물이나 발화에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담는 방식을 반복한다.
우다영은 자신의 해석을 문장 어딘가에 심어두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결국 자기만의 답을 품고 쓴다. 그런데 그 답을 활자로 박아 넣지 않는다. 대신 읽는 사람이 걸어 들어갈 여백만 남긴다. 그 여백을 지키는 절제가,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소설로 만든다.
총이라는 사물 하나를 붙들면 이 갈림이 조금 걷힌다. 오경의 장에서 총을 쥔 손은 군인이다. 미림의 장에서 총을 쥔 손은 미림 자신이다. 붉은 여우를 잡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손과 아들을 지키는 손이 같다. 발사되기도 하고, 발사되지 않기도 하는 사물이 소설의 시작과 끝에 나란히 놓인다. 우다영이 여백으로 남긴 자리에, 적어도 이 사물 하나는 대칭으로 서 있다.
닭이 달걀을 낳고 달걀이 닭이 되는 순환은, 졸업을 위해 취업을 준비하고 취업을 위해 다시 졸업 요건을 채우는 어느 4학년의 하루에도 낯설지 않게 겹친다. 반환점을 돌았다고 믿는 순간에도 발밑은 여전히 출발선 근처다. 『북해에서』의 마지막 장을 덮고도, 북해는 여전히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