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의 인사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7.06 13:2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책을 읽을 때면 연상되는 특정한 색채나 장면이 있다. 장맛비를 맞는 능소화. 어딘지 모르게 회기가 도는 일상의 풍경들. 빛이 직접 내리쬐지 않지만 반사광으로 은은하게 밝은 아파트 내부의 풍경, 습한 공기. 전부 낙하하는 저녁을 읽으며 떠올린 것들이다.


소설 <낙하하는 저녁>은 <냉정과 열정 사이>로 한국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이다.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미묘하게 낯선 인물들의 관계성으로 독자들의 많은 흥미를 끌었다. 한 여자가 15개월간 누군가를 만나고 이별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유독 여름철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가졌다. 마침 올해의 장마가 시작되는 무렵이니 여름 장마에 읽기 좋은 책으로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131.jpg

 

 

 

'낙하하는 저녁' 줄거리


 

8년을 사귄 연인 ‘다케오’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받은 ‘리카’는 하루하루를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지낸다. 연인으로서 8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긴 시간에 대한 후유증일까, 실연 후의 리카는 마치 자신의 삶이 다 끝났는데도 다케오라는 한 사람에게 묶여 이승을 맴도는 망령 같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의 경계조차 모르고 지내던 리카에게 변수가 생긴다. ‘하나코’라는 여자,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다케오가 새롭게 사랑하는 여자가 갑자기 리카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무작정 리카의 집에 찾아온 하나코는 이제부터 자신도 이 집에 함께 살겠다고 선언한다. 왜 다케오와 살지 않냐는 리카의 질문에는 “여기가 더 쾌적하니까”라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 그렇게 하나코는 다케오 생각으로 빽빽이 차 있던 리카의 공간에 가볍게 훌쩍 넘어 들어왔다.


소설은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수수께끼 같은 여자 하나코와 함께 지내게 된 리카의 이야기를 담는다. 참 아이러니하다. 며칠 전까지 리카는 다케오가 없어서 죽을 것 같았고, 죽음보다 더욱 공허했는데, 그 빈자리는 너무나 쉽게 타인으로 인해 채워진다. 그것도 전 애인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로 인하여 말이다.

 

 

 

모두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코


  

리카에 집에 불쑥 나타난 하나코는 신기한 여자다. 곁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 같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이 사람 집에서 지내다가, 다음날은 또 다른 곳에 간다. 심지어는 티켓만 있다면 해외로 훅 떠나버리기도 한다. 돌아올 날을 알리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일반적으로, 전 애인의 새 여자가 찾아온다면 아무리 예의 바른 사람이라도 문전 박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리카는 하나코의 이상한 동거 제의를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아마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은 하나코가 리카의 삶에 너무나 빨리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하나코는 생활 습관을 맞추고, 상대의 기분을 살펴야 하는 하나의 딱딱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리카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는커녕 눈 깜짝할 사이에 텅 빈 공허가 있는 리카의 삶에 잉크처럼 스며든다. 미워할 수 없는 이상한 매력이 있다.


하나코는 리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이토록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그래서일까,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모두 하나코를 사랑한다. 하나코를 사랑하게 되어 리카에게 이별을 선고한 다케오는 말할 것도 없이, 다케오의 대학 시절 친구 카츠야, 심지어는 리카네 학원의 학생인 나오토도 하나코를 금방 따른다.


 

하나코와 마음이 잘 맞는다는 나오토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 전에, 다케오에게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나는 하나코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때였다. 마음이 맞아, 라고 다케오는 말했다.

 


하지만 하나코를 사랑하는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괴롭다.


 

하나코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모두가 하나코에게 무언가를 원한다. 하나코를 욕망하는 남성들은 그녀가 자신의 연인이 되길 바란다. 자신의 곁에 머물길 바라고 자신이 모르는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길 바란다. 설령 하나코 때문에 본래의 연인이 자신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만큼 자신의 머릿속에 하나코가 깊이 스며든 것이다.

 

리카도 하나코를 생각하는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곳에 묶이지 않는다는 하나코의 성격을 알면서도, 리카는 제멋대로 여행을 떠나버린 하나코에게 서러운 듯이 누구와 갔는지, 왜 떠났는지와 같은 갖은 것들을 캐묻는다.

 

하나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코와 자신이 귀속되길 바라는데, 아마 그것이 일반적인 –일반적이라고 여겨져 온- 사랑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코는 어디에도 묶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멋대로 떠났던 긴 여행에서 돌아온 하나코는 리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거야. (...)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런 거야."

 

 

결국 하나코와 주변인들은 각자의 모순된 요구사항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한쪽을 괴롭게 한다.

 

 

 

리카와 하나코, 그리고 사람의 온기


 

하나코라는 새로운 룸메이트가 불쑥 등장했다고 해서 리카가 하루아침에 다케오와의 실연을 이겨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케오가 하나코를 만나러 오기 때문에, 헤어진 연인을 매주 집에서 만난다는 괴로움이 동반된다. 하지만 소설을 찬찬히 따라가는 독자라면 다음 사실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리카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이 소설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진행되는 리카의 이별 과정이다. 이 이별은 다케오와 완전한 타인이 되는 단절의 이별이 아니기에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리카와 하나코, 다케오는 종종 저녁을 함께 먹고, 리카가 화원에서 사 온 수박도 나눠 먹는다. 헤어진 연인과 그들 중 한 명의 새로운 연인이 일상적으로 식사를 가진다니 누군가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도 리카는 천천히 다케오가 없는 삶에 천천히 발을 내딛는다. 매년 해왔듯이 함께 수박을 먹고 있지만, 이번 해의 수박 화분은 다케오 없이 리카 혼자서 사 왔다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길고 긴 인연을 정갈히 정리하는 과정이 마냥 슬프거나 외롭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하나코가 리카에게 적절한 양의 온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리카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마치 어린애 같은 말투로,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무게를 담아 ‘어서 와’라는 인사를 건네는 하나코는 리카의 마음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는다. 어떤 외로움은 드라마틱한 과거청산이 아니라 적절한 거리감의 동거인만 요구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소설은 리카의 내면을 바라보며 찬찬히 진행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하나코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모두가 사랑하지만 모두를 괴롭게 만드는 인물인 하나코. 모두에게 잉크처럼 스며들어 필요한 정량의 온도를 나누어주지만 정작 그녀는 필요한 만큼의 따스함을 받고 있을까.

 

작가의 잔잔한 필체와 소설 내부의 분위기가 빗소리와 참 잘 어울린다. 이번 장마 기간 동안 리카와 하나코, 그리고 다케오의 관계가 어떻게 나아갈지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박소은.jpg

 

 

[박소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