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쥔 책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책의 표지에 그려져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마음일까.
책 [출판하는 마음]은 [쓰기의 말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의 저자 은유가 쓴 인터뷰집이다. 책을 만지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만나, 책을 짓고 펴내고 알리는 겹겹의 마음들을 담아냈다.
전주 여행에서 만난 [출판하는 마음]
며칠 전 전주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즉흥적으로 기차표를 예매했다. 별다른 계획은 없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지도 앱에 몇몇 서점의 위치를 저장해두었다.
그렇게 전주에 있는 서점 [풀의 유영]을 찾았다. 매장은 시원하고 차분했다. 마치 그 이름처럼.
‘풀의 유영’.
알 듯 말 듯, 어딘가 신비로운 이름이지 않은가. 이름이 공간에 미치는 힘은 생각보다 큰 것 같다. 서점 안에도 그 이름을 닮은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출판하는 마음]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하루키와의 인터뷰를 담은 책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사이에서 어떤 걸 살지 한참 고민했다.
나는 요즘 출판업계와 에디터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또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출판하는 마음]의 저자인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이었다. 그래서 [출판하는 마음]에 눈이 더 갔다.
나쁜 마음으로 하지 마세요
"나쁜 마음으로 하지 마세요."
살면서 행하는 잡다한 일들을 '해치우듯' 살아가는 태도에 경종을 울리는 한마디였다.
이 책을 쓰면서도 저 대사를 자주 생각했다.
원래도 책을 쓸 때만큼은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글은 너무도 깨끗한 거울 같아서 글 쓴 사람의 태도와 생각, 마음의 잡티까지 정직하게 반영한다.
더군다나 나쁜 마음으로 일하지 말자는 내용의 책을 쓰는 내가 나쁜 마음으로 써서는 안 될 일이니, 하루 중 가장 맑은 정신일 때 원고에 집중했고 쓰다보면 좋은 마음이 금세 차올랐다.
- [출판하는 마음]의 서문에서
은유 작가가 책을 펴내며 든 생각을 담은 서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이번 책에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자가 아니라, 인터뷰어가 되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역할은 달라졌지만, 그 역시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내는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내 글에서도 정돈되지 않은 마음이 그대로 보일까. 글과 책을 대하는 은유 작가의 진심 어린 모습에 내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책에 실린 편집자, 저자, 번역자, 북디자이너, 출판마케터, 출판제작자, 온라인 서점 MD, 서점인, 1인출판사 대표의 '출판하는 마음'은 그 모양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이 '책을 사랑한다'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책, 그리고 책을 다루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뜨겁고 선명했다. 덕업일치를 하고 싶다는 오랜 바람을 가진 내 심장을 더욱 빠르게 뛰게 만든 멋진 사람들이었다.
김경희, 저자의 마음
"독자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시간을 들여 내 글을 봤을 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글을 쓰려고 해요. 그 사람의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요. 솔직했느냐 아니냐 스스로에게 물어요.
솔직하게 썼을 때 확실히 반응이 있어요. 독자들이 비밀 댓글로 자기 얘기도 털어놓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해요. 그럴 때 내가 잘 썼구나. 날 온전히 드러냈구나, 글에 숨지 않았구나 생각하죠.
가끔 10을 말할 걸 6만 쓰면 반응이 없더라고요. 얼마나 정직하게 피하지 않고 쓰느냐가 관건이에요. 아직도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창피하지만 감추고 싶었던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내고 나면 쓰면서 편해지는 느낌이 찾아와요.
누굴 위로하겠다는 느낌보다 내가 나를 알아가는 기쁨이랄까. 쓰다 보니 내가 이랬지, 뭐 괜찮아, 하는 느낌이 드니까 먼저 위로받죠."
- [출판하는 마음] 중, '저자' 김경희 인터뷰 내용에서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 활동하며 매주 오피니언을 기고하는 나에게는 여러 출판 관계자의 인터뷰 중 '저자' 김경희의 말이 가장 인상 깊었다.
나도 글을 쓸 때 늘 하는 고민이 있다.
"얼마나 솔직하게 써야 할까?"
일기, 잡문, 단상처럼 나를 위한 글을 쓸 때는 망설임 없이 펜을 휘두른다. 나만 보는 일기장, 조회수가 적은 블로그 포스트는 내가 가장 솔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때는 마치 타자 연습 게임을 하는 것처럼 막힘 없이 타이핑을 한다.
반면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 완성도 높은 글을 써내야 할 때에는 좀처럼 문장이 늘어나지 않는다. 내 글이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멋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을 멈칫, 멈칫하게 만든다. 내 안을 깊이 파고들어 꺼내 보여주고 싶지만, 혼자만의 글쓰기보다 에너지가 몇 배는 더 필요하다.
김경희의 솔직함, 그리고 이를 마주한 은유 작가가 바로 뒤에 덧붙인 생각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저자는 자기 글의 최초 독자다. 저자가 최초로 위로받는 독자인 게 맞다.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는 글은 타인도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을 의식하기 전에, 글을 쓴 나를 위로해 줄 만큼 솔직하게 임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하는 마음
그동안 나는 매대에 보기 좋게 진열된 책을 살지 말지 고민하는 소비자였을 뿐, 책 한 권이 그곳에 오르기까지 출판 관계자들이 겪는 수많은 고충은 알지 못했다.
초쇄 발행 부수가 많을수록 단가는 낮아지지만, 그 규모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 번역가는 의역과 오역을 둘러싼 논란에 대응해야 하지만 정작 그 기준은 모호하다는 것. 출판계가 어려워질수록 책의 디자인 요소가 하나둘 줄어드는 모습을 보는 디자이너.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책을 정말로 아끼고 사랑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한 가지 후회가 생겼다. 지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굿즈와 이벤트에 이끌려 대형 부스 위주로 돌아본 일이다.
출판계의 내부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고 나니, 소규모 출판사의 부스도 한 곳 한 곳 더 꼼꼼히 둘러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사실 내년에는 서울국제도서전에 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출판하는 마음]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작은 부스들까지 천천히 둘러보고 싶어졌다.
혹시 나도 언젠가 책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될까. 그랬으면 좋겠다. 내 이야기를 담은 나만의 책을 펴내는 것도 좋고, 꼭 저자가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해 보고 싶다.
훗날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출판하는 마음]이 내게 큰 영감을 준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