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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니체에게 '아니오'라고 말하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초인간에 대하여

by 윤희수 에디터
2026.08.24 14:16

영원회귀와 신의 죽음.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을 꼽자면 빠지지 않고 나올 주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이 둘은 분명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하지만 다른 철학서와 이 책이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책은 하나의 산문집이라기보다는 차라투스트라의 예언을 담아낸 음유시인의 노래와도 같기 때문이다. 책 전반에 성경의 흔적이 가득 묻어있다. 성경의 문구를 비틀며 그 문구를 많이 가져왔기 때문일까.

 

수많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차 있는 책에서 단 하나의 중심논제를 찾기란 어렵다. 수많은 사상들이 묶여있는 이 사상집에서조차 그는 1부에서 말했던 개념을 2부에서 다시 뒤집고, 하나의 개념 (이를 테면, 영원회귀)에 대해 구토를 하다가도 이윽고 사랑을 노래한다.


 

나는 일찍이 가장 큰 인간과 가장 작은 인간, 이 둘이 발가벗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서로 너무나 닮았고, - 가장 큰 인간조차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가장 큰 인간조차 너무나 작았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나의 권태였다! 그리고 가장 작은 인간의 영원회귀! 이거이 모든 존재에 대한 나의 권태였다!

 

아, 구토! 구토! 구토! --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며 몸을 떨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13p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취향이야말로 논쟁의 영역이라지만, 그저 취향을 좇아 하나를 골라잡으면 그만이다. 본 리뷰에서는 서설에서 산속에서 은둔을 마친 차라투스트라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전파하고자 했던 그 개념, "초인간"에 초점을 두어보려고 한다. 

 

 

앞표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밝게.jpg

 

 

초인간. 말 그대로 인간을 넘어서 다음 시대의 아이들이다. 넘어선다. 무엇을? 차라투스트라는 초인간과 대비되는 개념인 마지막 인간을 먼저 보여주고, 그 마지막 인간의 어떠한 면을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해 연설한다. 더 강하고, 더 현명하고, 더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닌 인간 자체를 넘어서는 것.

 

그 첫 번째는 "증거판"을 깨뜨리는 것이다.

 

 

오, 이 선한 자들! 선한 자들은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선하게 되는 것이 정신에 대해서는 질병이다. 이 선한 자들은 양보하고 참고 견딘다. 그들의 속마음은 남이 시키는대로 하고, 그들의 근본은 복종이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 하나의 진리가 탄생하려면 선한 사람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한군데 모여야 한다.

 

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이 진리에 어울릴 만큼 충분히 악한가? 지금까지 모든 지식은 양심의 가책 옆에서 성장했다!

 

그러니 깨버려라, 깨버려라, 너희 깨달음을 얻을 자들아, 옛 증거판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81p

 

 

선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진리를 의심하는 일은 물론 악으로 몰릴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악은 미래의 선이고, 변화는 극복의 시작점이다. 현재에 머무른다면 초인간의 시작점에도 가까이 가지 못한다.

 

무엇이 옳은지, 또는 무엇이 그른지. 성경과 같은 수많은 도덕서들은 필독서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아주 어릴적부터 인간적인 기본적인 도덕규율을 구성해왔다.

 

"집단의 쾌감이 '나'에 대한 쾌감보다 오래되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종족을 선한 양심이라 불렀고 양심의 가책에는 '나'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그것을 배운 기억조차 없이 행복과 욕망의 방향은 어느 정도 정해진다.

 

그렇다면 인간을 극복하는 것이란 그저 반집단주의에 불과한 것인가. 어떤 가치를 그리도 깨뜨려야 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평등"이라는 계급사회를 지나 민주 사회에서 가장 고귀하게 여겨지는 개념마저 깨뜨린다.

 

 

모두가 평등을 원하며, 모두는 평등하다. 다르게 느끼는 자는 제 발로 정신병원에 간다.

 

"예전에는 모든 세상이 미쳐있었다." - 세련된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눈만 껌벅인다. 사람들은 명민하여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끝 없이 조롱할 수 밖에.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불화한다. 그러나 곧 화해한다 - 그렇지 않으면 위장이 망가진다. 사람들은 낮에도 한 줌 쾌감을, 밤에도 한 줌 쾌감을 얻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건강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냈다." - 마지막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거린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0p

 

 

이 개념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혁명이 일어났던가.

 

하지만 여기서의 평등이란 법적, 제도적 평등이라기보다는 평준화에 대한 욕망에 가깝다.

 

세련된 자들은 현대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몰개성한 인간들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적당한 쾌락을 누리고, 갈등이 생기면 적당한 선에서 화해하는 인간들은 마침내 행복을 발견했다. 아니, 만들어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하면 대답하기 어렵다. 적당선에서 누구의 비판도 받지 않을 정도의 삶. 차라투스트라가 경멸하는 마지막 인간이다. 그들은 여기에 머무른다. 타협된 정도의 도덕과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회색지대에서 사람들은 변화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의심한 것은 평등을 요구하는 마음의 기원이다. 열등감과 복수심의 충동이 평등이라는 덕의 언어로 위장된 것은 아닐까.

 

남이 정한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라. 사실 이 또한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초인간은 여기서 멈춰서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창조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내가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 그 즉시 나는 내가 한 일, 내가 사랑하는 그 일의 적대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내 의지가 그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17p

 

 

그 이후 한 번 더. "자기에 대한 적대"의 단계가 남아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자는 그 용맹함으로 가치에 맞선다. 자기 극복 이전의 인간은 아직 사자에 머물러 있다.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는 사자는 결국 아직 그 이전의 가치에 묶여 있는 존재다. 자신이 부정하는 것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

 

하지만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아이는 '순수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다.'

 

사자는 "아니오"를 말하지만 아이는 "예"를 말한다. 아이는 더이상 과거와 싸우지 않는다.

 

지금까지 소중했던 것을 모두 무너뜨리고도 새로운 놀이를 시작할 수 있기에. 아이에게 파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창조해낸 것이라도 부수는 것. 그렇다면 초인간은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맞기는 한 것인가. 어쩌면 물의 형상처럼 끊임없이 되어가는 그 무엇인가에 가까워보인다. 끝없이 만족하지 않는 존재.

 

만족이란 초인간과 가장 먼 개념이다. 만족함은 복종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나는 모든 것이 좋다고 하고 이 세계를 최선이라고 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자들을 모든 것에 만족하는 자라 이른다. 모든 것을 맛볼 줄 아는 모든 것에 만족함. 이것이 최고의 취향은 아니니! 나는 고집스럽고 까다로운 혀와 위장들을 존중한다. 그것들이 "나"와 "예",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제대로 배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소화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정말 돼지나 하는 짓 아닌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69p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이미 누군가 정해놓았다면 그 증거판을 따라가기만 하면된다. 하지만 증거판을 깨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 "아니오"라고 말헀다면 무엇이 "예"인지를 말해야 한다.

 

이렇게 지배를 회피하여 복종을 택하게 되지만, 본인의 취향이 있는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사람들은 변화하는 '예'와 '아니오'를 구분할 수 있는 법.

 

그렇다면 니체를 읽으면서 그의 모든 이야기를 수용하는 것 또한 돼지나 하는 짓이 아닌가.


'늙은 여자들과 젊은 여자들에 대하여'에서 여자를 남자의 욕망에 종속된 존재처럼 이야기할 때, 어떠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든,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 "예"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것처럼 모든 문장을 훌륭한 철학자라는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경멸했던 '인간'다운 짓일지도 모른다. 그 얼마나 성경과 비슷하던간에 니체는 신이 아니고 그것은 차라투스트라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너희는 너희 자신을 찾지 못했다. 너희는 그저 나를 찾은 것이다. (…)

 

나를 잃고 너희를 찾아라.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내가 다시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47p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처럼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믿지 말라고 한다.

 

이 책이 하나의 증거판이 될 때, 그의 가르침은 또 다른 복종이 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독자도 어느 순간에는 차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의 말을 모두 부인하고 나서야 남겨지는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를 지나쳐 간 뒤에도 남아있는 것은 독자 본인의 목소리이다. 물론 그것조차 종착지는 아니다. 어렵게 찾아낸 목소리가 내일에는 또 하나의 증거판이 될 수도 있고, '아니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끝까지 따른다는 것은 평생이 가도 멈추지 않을 숙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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