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나요 - 한국이 싫어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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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도착한 곳, 그곳에 있는 건, 역시 전장뿐이다.",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베르세르크'의 대사다. 도망친 곳에도 낙원은 없으니, 지금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이야기.
하지만 때로는 그 싸움이 너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고아성 분)처럼 말이다. 그녀는 제 몸집만 한 캐리어를 끌고 너무나 추운 한국을 떠나 바다를 건너 뉴질랜드로 향한다. 그녀를 짓누르는 한국이 싫어서, 계나는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낙원을 향한 도망침을 선택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나요
원하던 부서로의 이동도,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남자 친구도 계나를 붙잡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안 그래도 힘겨운 그녀의 숨을 죄어오는 또 하나의 무게일 뿐이다. 적금을 깨 집값을 보태지 않을 거라면 월세라도 내라는 어머니의 장난 반 진심 반의 말들이 계나에게는 아찔하다. 그녀가 모아오던 적금은 그녀가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을 테니 말이다. 추위를 싫어하는 펭귄, 혼자 다른 길로 달리는 가젤과 본인을 동일시하는 계나는 이제 한국에서의 싸움을 그만두기로 한다. 그런 그녀에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훈계할 수 있을까.
도망치지 않고 버티며 싸우는 것은 '존버'의 나라인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그 노력이라는 것을 하면 어찌어찌 문제가 해결되고 노력 이후에 조금 더 달콤한 열매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지금 당신이 힘든 것은 노오력이 부족해서라고 말하는 것도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눈앞에 놓인 벽을 회피하고 또 회피하다 보면 더는 회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를 수 있으니까. 그 막다른 길에 다다르기 전에 도망칠 힘을 모아서 한 번에 벽을 뛰어넘어보자는 거다. 그러니까, 노력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맞는 말이다. 벽을 뛰어넘으려 숨을 고를 여유가 있는 사람들 말이다. 뒤에서 사나운 개가 쫓아오고 옆의 벽은 까마득히 높다면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빠르게 뛰어 도망치는 수밖에는 없지 않나.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조금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스트레스가 가득한 이 세상에 도망칠 구석은 그래도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 단기 스트레스는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해 뇌가 쓸 수 있는 당을 체내에 더 많이 공급하지만, 스트레스가 만성화될 경우 도리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올 수 있다.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도무지 설 자리가 보이지 않고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을 때 도망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도망치지 못하면 주저앉을지도, 주저앉지 못하면 사라져 버릴지도
도망이 항상 최선의 선택은 아니지만, 분명 존재하는 선택지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 청년들의 자살률이 그렇게나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2023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27.3명이라는 독보적인 수치를 기록하는 한국의 자살률은 OECD 평균치의 두 배를 웃돈다. 계나의 남자 친구 지명(김우겸 분)의 말처럼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임에도 말이다. 벽을 넘고 또 넘다 보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이러한 문화는 한국의 비약적인 성장을 견인했다. 하지만 청년들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났을 때 도망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꾹 참다 보면 나중에 빛이 온다는 계나 어머님의 말씀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니까. 그렇게 꾹 참고 공부하던 계나의 친구 경윤(박승현 분)은 어떻게 됐나. 오랜만의 들려온 경윤의 소식은 합격이 아닌 부고였다.
내가 왜 한국을 떠나느냐고?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 영화 '한국이 싫어서' 대사
한국이 싫어서, 라는 이유로 떠난 계나는 경윤의 부고를 듣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의 장면들은 별다른 사건 없이도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원경에도 빌딩들이 자리하는 한국과 지평선만이 보이는 탁 트인 뉴질랜드의 대조되는 풍경은 그 자체로 계나의 마음을 대변한다. 한국은행에서 최근 발표한 "청년층 '쉬었음' 인구 증가 배경과 평가" 보고서에서 청년층의 자발적 사유로 쉬고 있는 인구가 작년 13만 명에서 올해 14만 명으로 늘어난 것은 계나와 경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노력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때 청년들은 갈림길 앞에 놓이게 된다. 도망치거나, 주저앉거나, 계속해서 부딪혀 결국 사라지거나. 계나처럼 도망칠 힘이라도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럴 힘마저 없다면 남은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그냥 쉬는" 청년들의 증가와 높은 자살률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높은 사회적 기대 하에 청년들이 느끼는 압박감으로 벌어진 결과다. 치열한 입시와 입시가 끝나도 계속되는 취업 경쟁. 모든 것에 순위를 매기는 한국의 특성상 대부분의 사람이 이 과정에서 패자가 되고 좌절감을 느낀다. 도망칠 곳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주저앉아 멈추는 것뿐이다. 하지만 멈춰 서있음마저 게으르고 의지가 부족하다며 비난받기 십상이다. 도망칠 힘도, 멈출 자유도 없는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나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경윤은 도망치지 못하고 끝내 사라졌다.
구름이 된 걱정 사이를 헤치고
도망친 곳에는 아마 낙원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도망의 목적은 낙원을 찾기 위함이 아닌 그저 지금의 지옥을 벗어나기 위함이다. 어쩌면 계나도 처음에는 뉴질랜드가 본인의 낙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상에 어떻게 낙원이 있으랴. 인종차별과 의지했던 친구의 실종, 자연재해 같은 현실의 문제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다만 계나는 그곳에서 숨을 고를 시간을 얻었다. 그 시간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완벽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녀는 새로운 선택을 할 힘을 얻었다. 그러니 도망침은 멈춤이 아닌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움직임이다.
뉴질랜드로의 도망도 잠시, 계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계나는 더 많은 가방을 가지고 다시 따뜻한 나라를 찾아 공항으로 향한다. 낙원 그 비스름한 곳을 찾을 때까지 아마 그녀의 도망은, 모험은 계속될 것이다. 도망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니까.
넌 믿지 않겠지만 어젯밤
파란 꿈결 사이로 들어가
구름이 된 걱정 사이를 헤치고
네 이마에 쪽 입을 맞췄어
비가 오는 날에도 항상, 항상
너무 슬픈 날에도 항상, 항상
몰래 춤을 출 때도 항상, 항상
네가 잠든 사이에도 항상, 항상
- '꿈에서 걸려온 전화', 김뜻돌
두 번째로 도망치는 계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김뜻돌의 '꿈에서 걸려온 전화'가 흘러나온다. 노래의 가사가 참 좋아 엔딩크레딧 부분만 세 번을 돌려보았다. 구름처럼 뭉게뭉게 퍼진 걱정을 뚫고 도망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사라질 바에야 주저앉아 있자. 주저앉을 바에야 비난을 받더라도 최선을 다해 도망쳐보자. 걱정에 둘러싸여 도망치는 청춘들에게 이마에 쪽 입을 맞추는 다정한 위로가 전해지기를.
[윤희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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