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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B급 영화, 니가 좋아 [영화]

머리 비우고 싶은 날을 위한 영화 안내서

by 김정현 에디터
2026.05.18 14:16

 

 

살다 보면 가끔 뇌를 잠시 어딘가에 맡겨두고 싶은 날이 있다. 아무것도 분석하지 않고,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고, 그냥 눈앞에 펼쳐지는 걸 보며 깔깔 웃다가 집에 오는 그런 날. 나는 꽤 매사에 진지한 편이고 생각도 많은 사람이라, 솔직히 그런 날이 자주 오진 않는다. 근데 오면 온다. 갑자기, 불쑥.

 

그럴 때 나는 B급 영화를 찾는다.

 

오해는 말자. B급 영화가 형편없는 영화라는 뜻이 아니다. 거창한 철학도 없고, 대사 하나하나에 숨겨진 의미를 캐낼 필요도 없는, 그냥 보는 내내 실없이 웃다가 끝나는 영화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영화들이 가끔 제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뭔가를 느끼려고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뭔가가 남는 것 같기도 하고.

 

 

 

1. 럭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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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물이라고 하면 보통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차가운 눈빛, 군더더기 없는 동작, 누군가를 처리하고 돌아서는 뒷모습. 보통은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킬러가 목욕탕에서 비누를 밟고 미끄러지면서 시작한다.

 

냉혹한 킬러 형욱(유해진)은 사건 처리 후 들른 동네 목욕탕에서 그 어떤 적에게도 당하지 않다가 비누 하나에 나가떨어지고, 과거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다. 한편 인기도, 의욕도 없어 그냥 다 끝내버리려고 결심한 무명배우 재성(이준)은 마지막 정리를 하러 그 목욕탕에 왔다가 쓰러진 형욱을 발견하고는, 자기 사물함 키와 그의 것을 몰래 바꿔치기한 채 도망쳐 버린다. 덕분에 형욱은 자신이 재성인 줄 알고 배우의 삶을 살기 시작하고, 재성은 킬러의 신분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형욱이 촬영 현장에서 고백 연기를 하는 장면이다. 기억은 없지만 몸에 밴 킬러의 본능이 자꾸 튀어나오는데, 상대 여자배우에게 사랑 고백을 해야 하는 장면에서 테이크를 거듭할수록 점점 이상해진다. 어느 순간은 지나치게 압도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어느 테이크에서는 시선이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어느 순간에는 그냥 묘하게 위협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감독은 당황하고, 스태프는 어리둥절하고, 형욱 본인은 그게 왜 이상한지 모른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진짜 소리 내서 웃었다.

 

유해진이라는 배우는 어쩜 이렇게 이런 역할에 딱 맞는지. 진지한 척하면서 웃긴, 혹은 웃기려는 게 아닌데 웃긴, 그 미묘한 선을 이 사람만큼 잘 타는 배우가 또 있나 싶다. 럭키는 그 유해진의 매력이 가장 풍성하게 담긴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 스파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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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요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턱시도나 딱 떨어지는 수트, 멈칫 없는 행동력,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분위기. 남자든 여자든 일단 비주얼부터 다르다. 그 이미지를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게 박살낸다.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시)는 CIA 내근 요원이다. 현장이 아니라 본부에서 이어피스로 지시를 내리는 역할. 완벽한 외모와 능력을 갖춘 현장 요원 브래들리 파인(주드 로)의 눈과 귀가 되어 임무를 도와왔지만, 정작 자신은 한 번도 현장에 나간 적이 없다. 그러던 중 핵무기 밀거래를 추진하는 마피아 조직에 의해 CIA 현장 요원들의 신분이 전부 노출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유일하게 신분이 안 알려진 수잔이 직접 현장에 투입되는데, 문제는 그녀의 위장 신분들이 하나같이 '고양이 열 마리를 키우는 싱글 아줌마'나 '유럽 패키지여행 중인 관광객' 같은 것들이라는 거다. 화려한 스파이 세계에서 철저히 비화려한 존재로 살아남아야 하는 수잔의 분투가 시작된다.

 

여기에 제이슨 스타뎀이 '자칭 레전드 요원' 릭 포드로 등장해서 영화의 웃음 포인트를 한 단계 올려준다. 스타뎀 팬이라면 알겠지만, 이 배우는 보통 진지하고 강인한 액션 이미지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 이미지를 본인 스스로 완전히 희화화한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요원인지 끊임없이 늘어놓는 말들이, 들을수록 점점 더 말이 안 되고 터무니없어서 웃기다.

 

멜리사 맥카시의 거침없는 입담과 맞붙는 장면들은 정말이지 멈추기가 어렵다.

 

 

 

3. 와일드 씽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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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기대하는 국내 B급 영화다. 강동원, 박지현, 엄태구.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톱 배우들이다. 근데 이 사람들이 아이돌 출신 낙오자들로 나온다.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보고 싶다.

 

한때 가요계를 씹어먹었던 3인조 혼성 댄스 그룹 '트라이앵글'은 예기치 못한 사건 하나로 하루아침에 해체된다. 20년이 흐른 뒤, 리더 현우(강동원)는 생계형 방송인으로, 도미(박지현)는 재벌가 며느리로, 상구(엄태구)는 솔로 앨범 실패로 빚더미에 앉은 채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중 현우에게 '트라이앵글'의 재결합 공연 제안이 들어오고, 셋은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다시 뭉치는데, 과거의 라이벌이자 악연인 발라드 왕자 성곤(오정세)과 전 소속사 대표까지 얽히면서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꼬여간다.

 

강동원이 춤을 춘다. 그것도 아이돌로. 이 문장 하나로 설명이 다 되지 않나. 저 각도 저 표정 저 분위기로 알려진 강동원이, 한때 가요계를 주름잡던 혼성 댄스 그룹의 리더였다는 설정으로 무대 위에 선다. 진지하게, 열심히. 그게 더 웃기다. 영화 개봉 전부터 트라이앵글의 실제 SNS 계정을 운영하고, 음원 '러브 이즈'와 뮤직비디오까지 실제로 공개하며 세계관을 쌓아가는 방식도 꽤 재밌다. 그냥 영화 홍보가 아니라, 진짜로 이 그룹이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그 감각. 성곤의 뮤직비디오도 추가 공개 예정이라고 하니, 본편 보기 전부터 이미 즐길 거리가 넘친다.

 

B급 영화들은 그냥 웃기기만 한 건 아니다. 시끄럽고 황당하고,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 싶은 순간들이 계속 이어지다가, 어느 타이밍엔가 조용히 무언가를 건네온다. 억지스럽지 않게, 그냥 자연스럽게. 그게 아마 이 영화들을 단순히 '그냥 웃긴 영화'로 끝나지 않게 만드는 이유일 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B급 영화를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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