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기 위한 걷기 [영화]

영화 <와일드>
글 입력 2023.08.2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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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와일드 가방.jpg

 

 

가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혼자 떠나고 싶다는 상상한다. 고요한 자연을 바라보며 멍때리고 싶다. 대신 영화 <와일드>를 봤다.

 

첫 장면부터 강렬하다. 절경이 보이는 높은 고도의 산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는다. 피투성이인 퉁퉁 부은 엄지발가락을 보더니 달랑거리는 발톱을 뽑는다. 그리고 엄청난 소리를 지르고 몸을 움직였을 때, 신발 한 짝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4,000km를 걷는 여행에서 신발의 존재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그 사실에 화난 셰릴은 소리를 지르며 나머지 한 짝도 절벽 아래로 던진다.

 

그녀는 어쩌다 긴 길을 걷게 됐을까?

 

 

영화 와일드 햇빛.jpg

 


마음이 괴로울 때 나를 망치는 게 가장 쉬워진다. 셰릴은 자신의 인생 중심축인 엄마를 잃고 망가진다.

 

사람의 상실은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기에 구멍을 임시방편으로 때운다. 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하루를 죽인다. 사람은 매일 죽음에 하루씩 가까워지니까 살고 죽는 게 비슷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버리는 걸 알면서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세릴은 ‘헤로인 주사는 안 해!’라고 선을 그었지만 결국 주사 투입을 한 자신을 보고 누구보다 가장 실망한 사람은 자신이다.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악의 순환고리에 빠졌다. 셰릴은 누구보다 변하고 싶지 않았을까? 우연히 본 PCT 트레킹이 자신이 지금 구린 삶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처럼 여겼다.


걷기 시작하고 ‘이게 맞는 걸까?’ 생각이 들 때 셰릴은 이미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번갈아 바라본다. 이미 걷기로 한 뒤에도 수없이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지금 이대로 계속 해도 괜찮을지 고민한다. 셰릴은 자주 quit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반복하여 말하면서 죽기보다 다시 살기 위해 4,000km의 길을 걸어간다.

 

그냥 걷는 것, ‘그냥’이라는 단어 앞에 너무 많은 것들이 숨어있다. 1999년에서 백인 여성이 긴 트래킹을 걷는 일은 쉽지 않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고 혼자 걷는 건 위험하다. (지금도) 여성이 혼자 히치하이킹을 할 때마다 혹시 이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들일까 의심부터 든다. 셰릴이 도움을 요청할 때도 남성에게 경계를 풀지 못하는 이유다.

 

없는 남편이 오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영화 와일드 가방비우기.jpg

 

 

거대한 가방을 메기 위해 모텔 방바닥을 끙끙 뒹군다. 셰릴 삶의 무게가 저것보다 더 무거울까 가벼울까. 무엇을 챙겨야 좋은지 무엇을 줄여도 되는지 요령 없이 가방 속을 가득 채웠다. 정작 쓸 수 없는 기름을 챙겨 차가운 죽을 먹는다.

 

셰릴이 에드 아저씨와 함께 가방 짐 무게 줄이면서 이미 지나온 길의 트레킹 페이지를 과감히 찢어 버린다. 삶의 무게도 줄이기 위해 과거를 찢어 버리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대로 두고 떠날 용기다. 셰릴이 ‘신들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환영처럼 보이는 여우가 떠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본다. 셰릴은 PCT 길을 걸으면서 자기방식대로 엄마를, 그리고 과거를 딛고 떠난다.


“퇴근하고 한강에서 집까지 자전거를 2시간 동안 탔어요.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몸을 힘들게 하려고요. 그래야 마음의 고통이랑 몸의 고통이 같아졌어요.”

 

예전에 옥천에서 만난 한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셰릴도 아마도 비슷한 마음으로 PCT 트랙의 긴 길을 걸었을 것 같다. 그 분의 마음은 요즘은 안녕한지 문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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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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