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상의 탑이 무너진 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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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어린 시절의 향수와 함께 날아온다. 집 근처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보던 그 애니메이션은 매번 새롭게 살아 숨 쉬는 판타지 세계를 보여주었다. 대단히 어른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어른이 되어 다시 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은 더 깊고 따뜻했다. 처음으로 보았던 <붉은 돼지>는 빨간색 비행기를 탄 돼지가 멋지게 파란색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야기인 줄 알았건만 반파시즘 메시지가 깊이 담겨있었고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이웃집 토토로>는 이입의 대상이 슬그머니 바뀌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참 귀엽고 따뜻한 캐릭터들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동화가 현재진행형이라니. 2013년 <바람이 분다> 이후 10년 만의 장편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스튜디오 지브리와 함께 자란 관객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 주인공 마히토가 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푸른 왜가리, 아오사기가 날개를 활짝 펼치며 인사할 때 필자는 비디오를 돌려보던 그때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감을 느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은 듯한 복잡한 심경이란. 스튜디오 지브리의 오랜 팬으로서 조금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담아본다.
지하에서 잉태되는 생명들
먼저, 와라와라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라면 꼭 나오는 귀여움을 담당하는 존재들이다. 거부할 수 없는 찹쌀떡 같은 말랑한 외양은 아무리 봐도 노렸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비주얼만 놓고 보면 <모노노케 히메>의 나무 정령들인 코다마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들은 탑 속 세계에서 살아가는데, 주인공 마히토는 키리코의 배를 타고 와라와라를 처음 마주친다.
밖에서 푸른 왜가리였던 아오사기는 탑 속에 들어서자 인간형의 얼굴을 드러낸다. 그러고는 화마로 죽은 어머니를 찾아 탑으로 들어온 마히토와 마히토와 함께 들어온 노파 키리코를 탑의 지하 세계로 떠민다. 이곳에서 마히토는 젊은 키리코와 와라와라를 만난다.
와라와라는 태어나기도 전의 인간이다. 이들은 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때까지 지하 세계에서 굴러다니다가 몸집을 부풀려 위로 올라가 바깥세상의 사람으로 태어난다. 어린아이보다도 어린 와라와라는 이 동화 속 세상에서만 존재한다. 까르륵 웃으며, 폭력에 대응할 어떠한 방법도 없이 무방비하다. 이 새하얀 존재들에게 칼과 활을 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들을 위해 불과 활을 드는 조금 더 큰 인간들, 키리코와 히미가 있을 뿐이지. 아이를 낳기 위해 탑 속으로 들어온 마히토의 새로운 어머니(이자 죽은 친어머니의 동생) 나츠코처럼 지하 세계는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다. 지하 세계의 모두가 와라와라였다면 또 몰랐겠지만 이곳에는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펠리컨도, 사람을 잡아먹는 앵무새도 있다. 생명이 시작되는 안전한 곳이라고 하기에는 외부의 폭력은 탑 안에서도 그대로 계승된다.
그렇다면 이 탑, 그리고 지하 세계라는 공간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탑 안이라는 이상세계
탑 안은 기묘하다. 현실과는 확실히 다른 곳이다. 죽은 어머니, 히사코이자 히미가 있다는 데에서 이곳은 시공간을 초월한 곳임이 분명하다. 죽은 자들이 떠돌고 고인돌 같은 커다란 무덤이 있다는 점에서는 저승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혹은 마히토의 상상 속의 세계, 자의식 안이거나. 어찌 되었든 탑 안은 현재에는 존재할 수 없는 그 나름의 법칙을 가진다. '산실에는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다'와 같은 법칙들 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신묘한 온천장, 정령들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와 같이.
그러니 이곳은 스튜디오 지브리가 항상 보여주던 그 기묘한 판타지 세계이다. 그리고 탑의 주인인 큰할아버지가 그리던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불안정해지고 있다. 앵무새는 대장장이를 잡아먹었고, 새로운 생명은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앵무새에게 포위되어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마히토를 구한 히미도 결국에는 돌 앞에 쓰러지고 만다.
환상 속에서 마침내 이루어진 마히토와 탑 주인의 첫 만남. 나의 뒤를 이으라는 탑 주인의 말에 마히토는 이 돌들은 무덤에 있는 돌들과 같이 악의가 가득하다며 거절한다. 이에 두 번째 만남에서 탑의 주인은 악의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돌들이라며 새로운 돌을 내민다. 이 돌들로 다시 완벽한 이상세계를 건축해 보자고. 이까짓 돌들에 세계의 운명을 맡기는 거냐는 앵무새 대장이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다. 이 많은 생명의 운명을 좌우하기에 돌 쌓기는 지나치게 소꿉놀이 같지 않나. 실제로 이 탑 속 세계는 탑 주인의 소꿉놀이와 같다. 마히토의 큰할아버지는 아마도 오랜 시간 이 완벽한 세계를 지탱하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와 그의 혈연인 마히토를 불러오기 위한 노력이 그를 증명한다. 하지만 개인이 만들어낸 세상에는 결국 끝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아무리 '악의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돌들이라도.
지브리의 동화가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는 없지만
개인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세상, 무언가가 떠오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세상들. 그렇기에 주름이 가득한 탑의 주인은 은퇴를 말하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분신이라고 생각했다. 그 동화 같은 세상을 축조하던 세상의 주인 말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인터뷰에서 탑의 주인이 타카하타 이사오라고 밝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석의 방향은 조금 달라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상 속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나온다. 그들은 서로 싸우고 협력하고 끝내 역경을 극복하여 성장한다. 주인공은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동물들과 신비로운 생명체들이 인간들과 어울렸다. 필자의 최애 애니메이션, 토토로처럼. 타카하타 이사오의 세계는 조금 다르다. <반딧불의 묘>나 <추억은 방울방울>이 보여주듯 그의 세계는 조금 더 현실에 가까이 있다. 그의 섬세한 인물들은 현실의 비극을 겪는다. 이 둘은 서로의 세계를 보완하며 스튜디오 지브리를 번영하는 왕국으로 탄생시켰다.
하지만 모든 절대왕정이 그렇듯, 또는 철인정치가 그렇듯 한두 명의 훌륭한 지도자가 국가를 존속시킬 수는 없다. 철인이 영생할 수는 없으며 훌륭한 감독도 언젠가는 은퇴를 선언할 테니까. 돌의 마법이 풀리고 탑이 무너지자 환상도 사라진다. 두 발로 서며 말하던 근육질의 앵무새들은 다시 조그만 날개를 포르르 떠는 날짐승으로 돌아오고 나뭇조각은 다시 구부정한 할머니로 돌아온다. 이것은 그러니 이별을 고하는 은유다. 모든 마법이 풀리고 현실로 내던져진 마히토와 관객에게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질문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요네즈 켄시의 "지구본"은 그 질문에 대한 힌트라도 주듯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흘러나온다.
一欠片握り込んだ 秘密を忘れぬように
한 조각을 움켜쥐었어, 비밀을 잊지 않기 위해
最後まで思い馳せる 地球儀を回すように
마지막까지 떠올려, 지구본을 돌리듯이
- 지구본(地球儀), 요네즈 켄시
타카하타 이사오가 애니메이션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현실 세계의 따뜻함과 비극,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냈던 아름다웠던 지브리 세계의 희망은 창작자의 생이 유한한 이상 끝이 나기 마련이다. 와라와라의 시기는 끝나고 관객들은 어른이 되어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다만 그 속의 한 조각 유산은 현실 세계에 남아있다. 마히토가 주머니 속에 넣어왔던 그 한 조각의 악의가 담기지 않은 돌, 지구본의 화자가 움켜쥐었던 그 한 조각은 비밀을 잊지 않기 위한 한 조각의 선의다.
탑에 들어가기 전, 손에 꼭 쥔 줄만 알았던 왜가리의 깃털은 탑을 나서자마자 꿈처럼 사라졌지만, 탑에서의 여정을 마친 후 돌 한 조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동화는 끝났어도 동화 속에서 느꼈던 따뜻함과 선의만은 남아있으니까.
[윤희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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