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제주 4·3 과 무대 위의 기억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7년 동안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가족이 사라졌다. 마을이 불탔다. 생존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수십 년간 4·3은 금기였다. 기억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그 명령은 언어가 아닌 침묵의 형태로 사람들 안에 새겨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진실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고, 같은 해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그러나 사과는 진실의 확인에 그쳤다. 가해자의 동상은 여전히 광장을 지키고 있었다.
연극 《돔박아시, 고이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2001년 어느 날, 제주도 한 촌락의 광장에 세워진 채진광이라는 인물의 동상이 갑자기 쓰러진다. 동상 주변에는 수십 개의 빗창이 꽂혀 있다. 경찰이 현장에서 한 명을 체포한다. 육십 대 해녀다. 그녀는 현장에 있었고, 전기톱으로 동상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동백 아가씨'라는 노래만 반복해서 부른다.
그녀의 이름은 고이래다. 4·3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토벌대 장교 채진광에게 살해당했다. 채진광은 전사자로 기록되었고,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아들은 지역 유지가 되었고, 손자는 해녀들이 일하던 터전에 리조트를 짓는다. 고이래는 수십 년을 침묵했다. 동상이 쓰러진 날, 그 침묵이 깨진다.
들어가기 전에, 반복되는 두 개의 시간선
연극은 두 개의 시간대를 오간다. 1948년과 2001년이다. 1948년에는 고이래의 아버지가 죽어가는 순간이 재현되고, 2001년에는 고이래가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법정에서 진술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두 시간은 순차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회전비석이라는 무대 장치가 두 시간을 한 공간에 겹친다. 비석이 돈다. 고이래가 그 위에 앉는다. 1948년의 아버지와 2001년의 딸이 한 시공간에 존재한다.
연극은 고이래의 마지막 변론을 통해 진실을 밝힌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동상은 다시 세워진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영상이 무대에 투사되지만, 사과는 동상이 다시 세워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연극은 형사가 마지막에 빗창을 다시 꽂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이 빗창은 분노가 아니다. 잊으라는 명령에 맞서는 선언이다. 해녀의 손에서 바다를 일구던 도구가 기억의 무기가 되는 순간이다.
본고는 이 연극이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첫째 막은 취조실에서 침묵이 노래로 바뀌는 과정을 그린다. 둘째 막은 법정에서 두 시간이 겹치고 동상이 무너지며 기억에 금이 가는 순간을 보여준다. 셋째 막은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빗창이 다시 꽂히는 되풀이의 의미를 제시하고 관객을 증인으로 세운다. 이 세 막을 따라가며, 작품이 어떻게 개인의 침묵을 역사적 증언으로 전환하는지 추적한다.
1막. 취조실: 침묵이 노래로
왜 그녀는 수십 년을 침묵했는가. 왜 법정에서조차 질문 대신 노래를 선택하는가.
첫 장면에서 해녀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동백 아가씨'만 읊조린다. 법정 장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말이 나온다. 재판장이 질문을 던진다. 해녀는 다시 노래한다. 이 반복이 작품의 첫 번째 질문을 만든다. 침묵은 무엇인가.
침묵을 기억이 없어서라고 읽으면 안 된다. 오히려 기억이 너무 많아서 멈춘 것이다. 극도의 충격은 언어를 무너뜨린다. 사건을 즉각적으로 언어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심리 상태가 작동한다.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 몸과 노래가 자연스럽게 들어선다. '동백 아가씨'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다. 언어가 닿지 않는 영역에서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이다. 노래는 말 대신 증언의 길을 연다.
연극은 제주어로 진행된다. 배우들은 제주어를 직접 익히고 현지 답사를 거쳤다. 이 언어 선택은 단순한 지역성 재현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권력 관계가 뒤집힌다. 비제주인 관객은 자막을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 이 불편함은 의도된 것이다. 앉아서 자막을 따라가는 위치는 제주 4·3 생존자들이 수십 년간 처했던 위치, 즉 이해받지 못하고 전달되지 않는 언어의 단절과 겹친다. 관객은 그 단절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소리 풍경이 그 단절을 채운다. 해녀의 숨비소리가 울리고, 파도소리와 제주의 바람소리가 공간에 퍼진다. 언어가 닿지 않는 자리에 소리가 들어온다. 관객은 언어 이전의 감각으로 무대와 접촉하게 된다.
취조실이라는 밀폐 공간은 이 침묵의 무게를 극대화한다. 반복되는 질문과 돌아오지 않는 답변이 공간을 채운다. 침묵은 소음이 된다. 관객은 그 침묵의 밀도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해녀의 침묵은 증언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증언할 수 없는 상태,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증언이다.
2막. 법정의 회전비석과 동상 붕괴
마지막 변론 장면에서 시간이 겹친다. 회전비석이 무대 중앙에서 천천히 돈다. 비석 위에 고이래가 앉아 있다. 1948년과 2003년이 한 시점에 교차한다.
회전비석은 단순히 두 시대를 교차시키는 장치가 아니다. 시간을 층으로 쌓는 장치다. 과거는 과거로 남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고이래의 몸은 두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말하지 않는다. 두 목소리가 함께 울린다. 아버지의 침묵과 딸의 목소리가 겹치는 그 간격이 무대 위에 가시화된다.
이 시간의 겹침이 동상 붕괴로 이어진다. 채진광의 동상은 권력이 선택한 기억의 상징이다. 가해자는 전사자로 기록되었고, 그 기록 위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받았다. 동상은 그 강제된 기억을 물리적으로 고정시키는 장치다. 동상 붕괴는 단순한 물리적 사건이 아니다. 숨겨진 기록이 공개되는 순간이며, 강제된 기억에 금이 가는 순간이다.
회전비석이 시간을 교차시키지 않았다면, 동상 붕괴는 단순한 파괴 행위로 읽혔을 것이다. 두 시간이 한 공간에 겹쳐 있기 때문에, 동상이 무너지는 순간은 1948년과 2003년이 동시에 무너지는 장면이 된다.
망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듯, 기억도 저절로 보존되지 않는다. 동상이 세워지는 것이 체제의 의도적 선택이었던 것처럼, 동상이 무너지는 것도 의도적 개입이다. 작품은 어느 편도 이상화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해체되는지를 가시화한다. 동상 붕괴 후에도 동상이 다시 세워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체제의 기억 장치는 한 번의 폭로로 무너지지 않는다.
3막. 되풀이의 의미와 증인의 자리
진실이 밝혀져도 동상은 다시 세워진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영상이 투사되고 난 후에도, 동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형사는 마지막에 빗창을 다시 꽂는다.
이 결말은 패배가 아니다. 그렇다고 희망도 아니다. 되풀이 그 자체다. 진실의 폭로가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잊으라는 관성은 사과 한 번으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저항은 반복되어야만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작품은 결말로 선언한다.
형사의 빗창은 분노의 표출이 아니다. 체제의 기억 장치에 대한 윤리적 개입이다. 완전한 해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빗창을 다시 꽂는 행위, 그것이 작품이 제시하는 저항의 형태다.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반복되는 작은 개입. 바다를 일구던 해녀의 도구가 기억의 도구가 되는 것, 그것이 기억의 투쟁이 지속되는 방식이다.
관객은 이 되풀이를 목격한다. 그리고 질문을 받게 된다.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이 질문이 관객을 증인으로 세운다. 무대가 막을 내린 후에도 질문은 관객에게 남는다. 관객은 더 이상 피동적 시청자가 아니다. 침묵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증언으로, 증언에서 되풀이의 선언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관통한 관객은 자신의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회전비석은 계속 돈다. 빗창은 다시 꽂힌다. 노래는 다시 불린다. 무대는 기억의 촉매다. 그리고 관객은 그 위에서 묻는다.
우리는 어떤 기억을 쓸 것인가. 잊으라는 관성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