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첫 층이 열리는 순간, 무대는 아래를 향해 깊은 숨을 쉰다. 2025년 9월 30일 세종S씨어터에서 만난 극단 피악의 <단테 신곡>은 700년 전 단테 알리기에리가 그린 지옥도를 오늘의 무대에 세운다. 이 여정은 주인공의 구원보다 '하강' 자체를 핵심에 두어, 개별 영웅담이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욕망과 죄의 지형도임을 선언한다. 지옥 연옥 천국의 서사는 특정 신학 체계를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애욕, 탐욕, 폭력, 배반 등 현대 우리의 현실과 겹쳐진다. 이 작품은 과거의 무게를 빌려오는 역사극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활용하는 연극이다.
이 리뷰는 먼저 '수직 하강'과 '군무의 압력'이 교차하는 연출 설계를 다룬다. 무대를 위아래로 나누어 관객의 신체 감각을 극대화하고, 그 빈 공간을 앙상블의 집단적 절규로 채워 장면의 밀도를 만드는 과정을 추적한다. 다음으로, 고전 무대화라는 기획을 지탱한 극단 피악의 예술적 정체성과, 그것이 오늘날 한국 연극 생태계에서 갖는 의미를 조명한다. <단테 신곡>의 힘은 장면 속 미학과 장면 밖 구조가 맞물릴 때 성립하기 때문이다. 본 글은 그 결합의 방식을 장면의 언어와 개념의 언어로 기록한다.

단테의 신곡, 철학적 독해: 죄의 위계와 하강의 형이상학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은 중세 기독교가 구축한 우주의 건축물이다. 지옥(Inferno), 연옥(Purgatorio), 천국(Paradiso)으로 이루어진 이 3부작은 단순한 문학적 상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죄와 벌, 정화와 구원에 대한 중세의 철학적 체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지옥편은 9개 층으로 구성되어, 각 층은 죄의 경중에 따라 배치된다. 상층부는 절제 없는 욕망의 죄(애욕, 탐욕, 분노)에서 시작해, 하층부로 내려갈수록 폭력, 사기, 배반 같은 더 무거운 죄가 응징된다. 이는 죄의 본질에 대한 위계를 드러낸다. 욕망이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반면, 사기와 배반은 이성을 악용한 죄이기에 가장 깊은 지옥에 자리한다. 죄인들은 자신이 생전에 저지른 죄의 본질과 대응하는 형벌을 받는데, 이것이 바로 '대응적 정의(contrapasso)'의 원리다. 애욕에 빠진 자는 영원히 폭풍 속을 떠돌고, 배반자는 얼음 호수에 갇힌다.
이 여정의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는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단테에게는 이성과 지성의 상징이다. 그는 지옥과 연옥까지 단테를 이끌지만, 기독교 이전 시대 인물로 신앙이 없었기에 천국에는 도달할 수 없다. 베르길리우스의 존재는 <신곡>의 핵심적인 긴장 요소를 보여준다. 이성은 길을 밝히는 등불이지만,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 그의 목소리는 지혜인 동시에 인간 이성의 한계를 상징한다.
<신곡>의 구조를 관통하는 것은 이 수직 운동이다. 지옥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깔때기 모양이며,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그 밑바닥까지 하강한다. 이후 연옥의 산을 올라 천국으로 상승하게 된다. 이 수직 운동은 물리적인 움직임인 동시에 영적인 움직임이다. 죄의 무게는 영혼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정화는 위로 상승시킨다. 700년 전 단테가 그린 이 우주는, 중세인들이 믿었던 도덕적 질서의 지도이다.
극단 피악의 <단테 신곡>은 이 철학적 구조를 존중하며, 2025년 한국 관객에게 그 보편성을 전달하려는 도전을 감행했다. 나진환 연출은 원작의 구조를 보존하면서도, 작품의 무게중심을 종교적 신학에서 보편적 윤리로 옮긴다. 작품 서두에 등장하는 "신의 죽음" 선언은 이러한 해석의 핵심이다. 연출은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 믿음이 약화되었음을 직접 언급하며, 지옥이 더 이상 신의 징벌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 만든 지옥"임을 제시한다. 이 전환을 통해 단테가 그린 9개 지옥 층의 죄들, 애욕, 탐욕, 폭력, 사기, 배반은 7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욕망의 지형도로 재인식된다.
이 해석은 원작이 이미 담고 있던 보편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그것을 동시대 관객의 언어로 번역한다. 단테의 지옥은 중세의 신학적 상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고전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접근이다. 원작이 가진 힘을 믿고, 그것을 무대 위에 옮겨놓는 것. 극단 피악은 도스토옙스키 시리즈에서 축적한 고전 독해의 역량을 이번 작품에서도 발휘했다. 이는 원작을 해체하거나 과도하게 각색하기보다, 그 구조와 철학을 존중하며 오늘의 관객에게 도달하게 만든 태도이다.
무대 언어의 구축: 수직 하강의 시각화와 군무의 압력
극단 피악의 <단테 신곡>이 이룬 가장 탁월한 성취는 수직 구조를 통한 지옥의 물리적 구현이다. 이 작품의 무대 설계는 '하강'이라는 원작의 핵심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번역하는 데 집중한다. 무대는 높이 차이를 활용한 공간으로 설계되었으며, 사다리, 계단, 서로 다른 레벨의 플랫폼들이 배치되어 배우들은 이 구조물들을 이동하며 하강의 이미지를 관객의 신체 감각으로 각인시켰다.
그 과정은 이렇다. 먼저, 사다리에 매달린 죄인을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장면은 시선의 수직성을 강조하며 지옥의 깊이를 암시한다. 이어, 뜨거운 모래를 피해 계단을 오르는 죄인들의 움직임, 무대 상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의 전환은 하강이라는 원작의 핵심 이미지를 무대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높이가 다른 무대 장치를 아래에서 위로 보면서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을 관찰하는 순간, 관객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시선에 동화되어 지옥의 풍경을 함께 목격한다. 이 수직 구조는 단순한 무대 디자인을 넘어, 죄의 무게가 영혼을 아래로 끌어당긴다는 단테의 형이상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세트는 미니멀하다. 화려한 장치로 공간을 채우는 대신, 불필요한 정보를 지워 여백을 남긴다. 빛나는 기둥과 막대 같은 소품들이 지옥의 이정표이자 상징으로 기능하며, 바닥에 투사된 고보 조명은 물, 얼음, 균열 같은 질감을 만들어 각 지옥의 지형을 암시했다. 조명은 원작의 불지옥과 얼음지옥을 구분하며, 각 층마다 달라지는 빛의 질감이 공간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전달했다. 각 지옥 층을 구분해 준 것은 정동환과 한윤춘의 내레이션이었다. 두 배우는 각 층에 도달할 때마다 그곳의 죄와 형벌을 설명하며, 관객이 여정의 위치를 인지하도록 안내했다.
죄인들의 군무는 이 작품의 시각적 정점이다. 10여 명의 앙상블 배우들이 만들어낸 안무는 정교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팔을 일제히 뻗은 절규, 탑처럼 쌓인 신체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뒤틀린 몸짓. 이 모든 움직임은 욕망과 절망을 육체로 번역한 언어였다. 군무는 개별 죄인의 고통을 넘어 집단적 절규로 확장되며, 무대 전체를 하나의 살아있는 회화로 변모시켰다. 모든 군무 장면이 인상적이었으며, 이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였다.
정동환의 베르길리우스는 작품의 중심에서 균형을 잡는다. 그의 연기는 노련했다. 큰 움직임 없이 목소리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했으며, 낮고 울림 있는 톤은 지옥의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등불처럼 작동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안내자이자 관찰자로서, 죄인들의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지적 존재감을 유지했다. 정동환은 이 역할을 통해 혼란스러운 지옥 속에서 작품의 철학적 무게를 붙잡아두었다. 단테 역의 한윤춘 역시 여정의 중심인물로서 안정적이고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두 배우의 호흡은 작품의 리듬을 만들었으며, 안내자와 여행자의 관계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이 작품의 서사적 강도를 높였다.
글을 마치며: 고전을 무대에 세우는 용기
극단 피악의 <단테 신곡>은 700년 서사시를 현대 무대 위에 세운다는 과제를 수행했다. 1막의 수직 구조와 군무를 통해 구축된 지옥의 풍경은 시각적으로 강렬했으며, 정동환과 한윤춘의 연기는 작품의 서사적 중심을 잡아주었다. 앙상블의 군무는 단테가 그린 죄와 형벌의 이미지를 현대 관객의 감각으로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품은 원작이 담고 있던 보편성을 재확인시켜준다. 애욕, 탐욕, 폭력, 사기, 배반. 700년 전 단테가 목격한 인간의 죄는 2025년 서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극단 피악은 고전에 대한 과도한 재해석보다는, 원작이 가진 힘을 신뢰하고 그것을 무대 위에 옮겨놓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것이 고전을 다루는 성실한 태도이다.
다만, 몇 가지 지점에서 아쉬움도 남는다. 2막은 연옥과 천국을 동시에 다루면서 1막에 비해 극적 긴장도가 낮아졌다. 이는 부분적으로 원작 <신곡> 자체가 가진 구조적 특성, 지옥의 감각적 강렬함 이후 연옥과 천국이 더 명상적이고 철학적으로 전환되는 때문이기도 하다. 앙상블 배우들의 군무는 탁월했지만, 섬세한 감정선을 요구하는 개별 장면에서는 주연 배우들의 비중이 더 크게 느껴졌다. 메타연극적 장치 역시 철학적 전환점이라기보다는 환기로 기능하는 데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S씨어터에서 목격한 무대 위 하강의 감각, 붉은 빛 아래 몸을 뒤트는 죄인들의 군무, 정동환의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극단 피악은 고전 무대화라는 도전을 받아들였고, 그 야심의 상당 부분을 실현했다. 이것은 원작에 대한 존중이자, 연극이 여전히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믿음의 증거다. 700년 전 단테가 그린 지옥도는, 오늘 이 무대를 통해 우리 앞에 다시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