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선으로 살 것인가, 악으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다수가 '선'을 택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착함과 악함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줄곧 선과 악의 대립 구도에 서서 스스로를 단죄하기 바빴다. 돌이켜보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것 같다. 반에서 겉도는 친구를 보면 말을 걸고, 쓰레기를 주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을 받아도 기쁜 척했다. 모두들 나를 착한 아이라고 불렀다. '주현이 착하니까, 주현이한테 가서 부탁해 봐.'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처음에는 기분 좋았던 칭찬이 갈수록 모호하게 들렸다. 언젠가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기가 아닌, 의무감에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진짜 모습을 알면 다들 실망할 거야.'
성가신 이를 흠씬 두들겨 패고 싶다거나, 비윤리적인 생각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져 나올 때면 스스로가 미웠다. 어쩔 땐 겉과 속이 다른 내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았다. 사람들이 이런 나를 알면 실망할까 봐 내 안에 빅 브라더를 만들었다. '착한' 나를 좋아해 주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날 보면 떠나갈까 불안했다. 그래서 어떤 부탁이든 쉽게 거절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선, 악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희곡 한 편을 접하며 오랫동안 시달려온 난제에 힌트를 찾게 되었다.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쓰촨의 착한 사람'을 다뤄보고자 한다. 작품은 '사천의 선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여러 번 무대에 오른 희곡으로, 선하게 살고자 했던 인물이 역설적으로 '선함' 때문에 고통받게 되는 모순을 다룬다.
주인공 센테는 가난한 청년이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을 것 같은 그녀는 신(God)을 도왔다가 답례로 큰돈을 얻게 된다. 그녀는 동네의 담배 가게를 사들이며 생활고에서 벗어난다. 앞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겠다고 다짐하며, 굶주린 이들을 두 팔 벌려 돕기 시작한다. 가게의 옛 주인 신 씨 부인은 센테의 호의를 당연히 여기며 계속해서 쌀을 구걸하지만, 센테는 이를 뿌리치지 못한다.
여기저기 자선단체처럼 마구 퍼주는 센테. 이러다 다시 전처럼 가난해지는 게 아닐까? 싶던 찰나에 센테의 사촌인 '슈이타'가 등장한다. 그는 센테와 달리 이해타산적이며 연민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슈이타는 그간 센테에게 빌붙어서 살던 이들을 내쫓는다. 쌀을 얻고 싶으면 일을 하라고 이야기하는 슈이타를,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센테는 일을 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거저 내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셈에 빠르고 영민한 슈이타 덕에 가게는 더 번창한다. 한편, 센테는 우연히 만난 '양순'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 앞에서는 동정심을 유발하고 사탕발림으로 사랑을 속삭였지만, 속으로는 센테의 재물을 노렸다. 센테는 그와 쉽사리 헤어지지 못하고, 슈이타가 대신하여 그의 게으름과 새까만 속내에 맞서 싸운다.
지친 슈이타는 센테를 좋아하는 동네 부자 슈푸와 이야기를 나눈다.
슈이타: 그 선한 마음씨가 제 사촌에게서 하루 만에 200 실버 달러를 빼앗아 갔어요. 빗장을 잠가 놓아야 하는 걸까요.
슈푸: (...) 아가씨는 천성이 착하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착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센테.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쉽게 내어주는 센테를 그리워하며 슈이타를 적대시한다. 신들은 센테가 고통 속에서 선함을 지켜낼 수 있는지 시험하듯, 그저 관찰한다. 신들은 고통이 선을 증명한다고 믿었으며, 그러니 개입하지도 않았다.
순에 휘둘려 가게가 넘어갈 위기에 처했지만, 슈푸의 도움과 슈이타의 영리함으로 센테는 가게를 되찾는다. 슈이타는 슈푸의 헛간에 작은 담배 공장을 차리고 전보다 더욱더 계산적으로 행동한다. 슈이타가 가게에 오래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센테의 행방은 묘연하다. 사람들은 사촌 슈이타가 센테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의심하며 그를 몰아붙인다. 그는 결국 재판에 서게 된다.
슈이타: 착한 일은 결국 파멸을 의미할 뿐. (...)
슈이타: 이제 그럼, 제가 여러분에게 끔찍한 진실을 고백하게 해 주세요. 제가 바로 그 착한 사람입니다. (가면을 벗고 옷을 찢어버린다. 센테가 서 있다)
놀란 신(God)을 두고 말을 잇는다.
센테: 네, 저예요. 슈이타와 센테. 전 둘 다입니다. 당신들이 언젠가 저에게 주었던 착하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라는 명령은 '저를 번개처럼 두 조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이들에게 착하면서 동시에 저에게도 좋은 사람일 수가 없었어요.' 다른 이들과 저 자신, 둘 다를 돕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사람들을 도울수록 괴로워지던 센테는 살아남기 위해 제2의 자신인 '슈이타'를 만들었던 거다. 연민에 가득 차 남을 돕고 보는 센테가 계산적이고 치밀한 슈이타이기도 했다. 그래서 슈이타가 마을에 오래 머물수록 센테의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신은 도와달라며 절규하는 센테를 두고 떠나간다.
나는 온전한 선과 악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센테는 '착한 사람'이라는 수식에 갇혀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그와는 정반대인 인물을 만들고 위기가 닥칠 때마다 슈이타를 연기해 온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남을 돕지 않는 것이 과연 악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센테가 선이고, 슈이타가 악이다-라는 경계로만 가를 수 있을까?
브레히트는 센테가 슈이타였다는 반전을 통해, 세상에 완벽하게 착하거나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비바람이 몰려오다가도 무지개가 뜨고, 잔잔하다가도 회오리가 치는 날씨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최대한 '선'의 기준을 세우고 그에 맞는 삶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슈이타는 과정보단 결과를 중시했다. 그렇다 보니 당장에 큰 이윤을 창출할 수 있어도, 고통받는 실업자와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결과에만 매달리다 보면 과정을 간과하게 된다. 내가 어떤 일을 행하던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쉽게 배제해 버린다. 하지만 과정을 중시한다면? 주변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할 시간이 생긴다. 중요한 건 나의 잘못, 나의 부도덕한 부분을 불편해하기보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고치려고 노력하면 된다.
나는 결과에만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며 사는 것이 '선'에 가깝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 세워둔 빅 브라더를 마침내 치울 수 있었다.
신(God)이 도움을 청하는 센테를 두고 떠났기에, 누군가는 브레히트가 신에 대해 회의적인 가치관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신은 우리를 직접적으로 구원하지 않는다. 구원은 스스로의 선한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가 끊임없이 선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지향하도록 '인도'할 뿐이다. 나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타인을 위하고, 반성하며 괴로웠다. 동시에 그러한 시간을 거치며 나 자신을 구원해 왔던 것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힘이 들고 지쳐도, 억울한 일을 당하여 속상해도 작은 것에 기뻐하며 타인을 위해 죽지 않고 살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절대 진리와 선은 사람 안에선 존재할 수 없으나 개념적으로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개념으로 자리한 그것을 실천적 차원으로 옮겼을 때, 우리는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걷게 된다. 신은 우리네 삶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다만, '착하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길 기도해 줄 뿐이다.
센테는 '착하기를, 그럼에도 살아가기를'이라는 말에 스스로를 갈라놓았지만, 나는 '그럼에도'를 조금 바꾸어 생각하겠다.
선과 악의 완벽한 구분은 없지만, 그럼에도.
착하기를, 그리하여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