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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13살 막내 세실리아가 세상을 떠난 그 이듬해 봄, 남은 네 명의 리스본 자매들도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모두 동경의 대상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부의 엄격한 통제 아래 살아가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처녀들. 14살 럭스, 15살 보니, 16살 메리, 17살 테리스. 화면은 마치 오래된 기억을 되새기듯 빛이 바랜 탁한 색감이다. 영화는 무엇을 추억하고 있을까? 추억은 사라진 것을 그리워하는 행위인데, 무엇이 사라졌을까? 답은 단순하다.

 

리스본 자매, 그리고 그들의 처녀성과 순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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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처녀 자살 소동"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의 서술자가 내레이션을 담당한다. 바로 리스본 자매의 이웃 소년이다. 중간중간 어머니나, 럭스의 남자 친구였던 트립의 인터뷰가 나오며 그들의 내면을 직접 들을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끝내 등장하지 않는 하나의 시점은 바로 리스본 자매들의 시점이다. 이들은 결코 독립적으로 씬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관찰된 대상으로 포착된다. 신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다른 학생들이 쳐다볼 때, 트립과 함께 있을 때. 영화는 그들은 온전히 주체적인 존재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자매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소년들이 추측하는 그들의 내면만 알 수 있을 뿐. 심지어 그들의 마지막 순간조차 소년들이 발견한 이후에야 드러난다.

 

영화 초반, 리스본 자매의 집에 초대된 피터 시스턴은 세실리아의 방에 들어가게 된다. 성역을 침범하듯 조심스러운 태도로 들어간 방 안 곳곳에는 종교적인 물품과 여성 전용 물품들이 섞여 있다. 피터의 시선을 따라간 카메라는 속옷, 립스틱, 향수, 스타킹 같은 여성적인 사물을 클로즈업하며 그는 급기야 탐폰을 만지작거린다. 피터의 행동은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남성들이 여성의 삶을 엿보려는 시선의 전조이다. 그는 세실리아의 물건을 바라보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단순한 관찰자로 머물 뿐이다. 여성의 공간과 삶은 호기심과 신비함의 대상에서 관음과 당혹스러움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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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가까이 살았던 이웃집 소년들은 소녀들을 불행과 억압에서 ‘구하려고’ 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도 결국 환상과 욕망에 기반한다. 소년들에게 리스본 자매들은 결코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어린 시절 한 번 닿았던 신비롭고, 순수하며, 접근할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망원경으로 그녀들의 집 지붕을 관찰하고, 자살한 막내의 일기장을 돌려보며, 그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 상상을 하는 소년들. 소년들의 환상은 결국 그녀들을 구하지 못했고, 자매들은 끝까지 주체적인 존재가 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녀들이 죽고 난 후에도, 소년들은 졸업앨범을 비롯한 그녀들의 유품을 소집하며 불완전한 환상을 채워나갔다.


 

We felt the imprisonment of being a girl, the way it made your mind active and dreamy, and how you ended up knowing that the only place you could truly belong was a dream.

 

- The Virgin Suicides, 내레이션 중

 


소년들의 생각 속에서 리스본 자매들의 도피처는 ‘꿈 같은 세계’로 표현되며, 그들의 절망은 낭만적으로 왜곡된다. 그들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나리라고 생각했던 그날 밤의 상상처럼.

 

 

 

욕망하되, 정복하면 무가치해지는 처녀성에 대하여


 

소년들의 상상을 실제로 이룬 사람이 있다. 럭스의 남자 친구였던 트립. 홈커밍 파티에서의 키스, 밤하늘 아래에서의 사랑. 평범한 하이틴 드라마 같았던 프롬킹과 프롬퀸의 순간이트립과 럭스의 마지막이었다. 트립은 럭스와 사랑을 나누고 럭스는 잔디밭에 그대로 둔 채 혼자 집으로 돌아간다.  트립은 럭스를 욕망했다. 그러나 그녀와 사랑을 나눈 순간, 럭스는 더 이상 '이상화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아마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트립도 이를 '그냥 뭔가 달랐다'라고 표현했으니. 욕망은 성취되었고, 따라서 그녀는 의미를 잃었다. 정복된 존재가 된 순간 이상은 현실로 돌아온다.

 

 

I liked her. I liked her a lot. But out there on the field, it was just different. That was the last time I saw her. I walked home alone that night.

 

I didn’t care how she got home.

 

- The Virgin Suicides, 트립 대사 중

 

 

이 영화에서 여성의 처녀성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면서도, 결국은 언젠가는 정복되기를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나 개인적인 선택이 정작 본인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 결정권은 오히려 파트너에게, 그보다도 부모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리스본 자매들의 어머니는 자녀들의 리비도를 통제한다. 트립과 럭스의 관계 이후 그 통제는 더욱 심해져 딸들의 외출을 막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다. 이러한 극단적인 보호는 오히려 자매들을 점점 더 고립시키고 파멸로 몰아넣는다. 럭스의 유일한 반항은 지붕 위에서 낯선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뿐이었다. 그러고는 묻는다. "이게 더러워?" "나를 사랑해?" 그것은 지붕에서 사랑을 나눈 어느 이름 모를 패스트푸드 점원에게 물어본 것이라기보다는 어머니와 트립에게 물어본 것이겠지.

 

K-딸이라면 한 번쯤 해보았을 생각. 20대 내내 통금을 걸어 놓던 부모님과 어느 순간부터 결혼은 언제 하냐고 물어보는 부모님이 동일한 사람임이 놀랍다는 것. 부모에게 딸이란 어떤 존재일까. 어릴 때는 순수함을 바라고, 청년이 되어서는 '문란'하지 않기를 원하고, 어른이 되면 가정을 꾸리기를 원한다. 그 처녀와 비처녀의 경계를 부모가 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이를 특히 어머니가 바란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생물학적으로 처녀성이 파괴되어야만 새로운 생명이 생겨나는 것일 텐데. 하지만 많은 경우, 부모는 처녀성에 걱정이라는 이름의 집착을 두고 있다. 걱정이 아닌 젊은 여성의 비처녀성에 대한 혐오가 바탕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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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부인의 통제는 단순한 개인적인 신념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순결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이다. 순결이 요구하며 그 순결이 사라진 순간에 주목 당하는 위치. (럭스와 교제한 남성들은 자랑스레 그녀와의 일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한다.) 욕망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욕망의 주체가 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현실. 리스본 자매들은 그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순간 철저히 통제되었다. 왜 타인의 순결함을 알아야만 하는가? 그것이 타인이라면 더더욱 지켜져야 하는 사생활이며 부모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놀랍게도, 영화 내내 리스본 자매들의 처녀성에 대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논한다. 때로는 칭송하고 때로는 비하하며.


파티에 가는 길, 한 남자가 리스본 자매에게 말한다.


"You can't die a virgin." (처녀로 죽을 순 없잖아.)


여성의 처녀성이란 것은 지켜져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끝내 파괴되어야 하는 것인가? 욕망하되, 정복하면 무가치해지는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처녀들은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영화 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뉴스 앵커, 리디아 펄은 리스본 자매들의 죽음을 센세이셔널한 뉴스거리로 소비한다. 깊이 있는 분석이나 공감 없이 마당의 나무를 지키려던 소녀들은 ‘잠옷 입은 소녀들’로 표현하고 자매들의 동반자살 사건에는 그저 ‘순수했던 소녀들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라는 뻔한 수사를 반복한다. 리디아 부인은 "우리 딸들은 애정결핍이 아니에요. 우리 집에는 사랑이 넘쳤어요. 정말 이유를 모르겠어요."라며 사랑이 넘치던 집에서 일어난 비극으로 이해를 끝낸다. 결국 나오지 않은 자매들의 시점처럼 이들의 죽음의 이유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도 사회도 처녀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시키며 그들이 목소리를 낼 기회를 박탈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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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린 세실리아는 이 무력감을 일찍 깨달았을 것이다. 올해 들어 다섯 번째 종이 멸종했다는 데 마음 아파하고 느릅나무가 병들어 슬퍼하던 소녀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말을 해도, 그 작은 일기장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써도, 어린 소녀는 그저 세상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숙한 존재로 취급된다. 부모나 사회가 대신해서 최선의 결정을 내려주어야 하는 연약한 존재.


 

“You're not even old enough to know how bad life gets.”

 

"You've never been a 13 year old girl."

 

- The Virgin Suicides, 의사와 세실리아의 대화 중

 

 

타인의 삶을 위한 최선을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그 과대망상이 결국 생명을 잃게 한다. 이것은 삶의 크고 작은 문제의 방향을 결정하는 결정권의 문제이다. 그 결정권이 삶을 지속시킨다. 하지만 순결함이라는 가장 개인적인 결정마저도 사회나 타인에 의해 정해진다면 개인에게 남은 결정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다. 삶에 대한 마지막 결정권을 행사하기 위해 이들은 역설적으로 삶을 끝낼 수밖에는 없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남성과 교류하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이 모든 억압은 ‘보호’와 '종교'라는 명목 아래 정당화되었다.

 

사회는 그들의 순결을 찬양하면서도 무너뜨릴 타이밍을 엿본다. 이들의 자살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이 거대한 억압 구조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실리아를 위해 연 파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 지하실에서 보니가 목을 메달았다. 메리는 오븐에 머리를 넣었고, 테리즈는 수면제를 먹었으며, 럭스는 차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영화 속 리스본 자매들은 자신들의 삶을 선택하지 못했고, 죽음을 선택한 후에도 끝내 낭만적으로 소비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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