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주인을 20년을 기다린 개가 있다. 오디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한 채 제 궁전 문 앞에 섰을 때, 마당의 거름 더미 위에 늙은 사냥개 한 마리가 누워 있다. 아르고스. 트로이로 떠나기 전 오디세우스가 직접 기르던 개다. 힘겹게 고개를 들고 문 쪽을 본다. 꼬리를 흔들고 귀를 낮춘다.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개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아직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돌린다. 아르고스는 주인을 알아본 그 순간 숨을 거둔다. 『오디세이아』를 읽으며 이 장면에 이르자 최근 영화 <오디세이>를 본 사람들이 아르고스에게 유독 집중했던 것이 떠올랐다. 거대한 전쟁과 괴물, 신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이야기되는 존재가 늙은 개 한 마리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원작에서 아르고스가 등장하는 분량은 짧다. 그런데도 이 장면은 오래 남는다. 이유를 찾으려면 오디세우스가 어떤 영웅인지부터 다시 봐야 한다. 문학과지성사가 아우구스테 레히너의 평역으로 펴낸 『오디세이아』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산문으로 풀어낸 책이다. 트로이 전쟁부터 오디세우스의 방랑과 귀환까지,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다시 세워 처음 읽는 사람도 따라가기 쉽게 했다. 인물 관계도와 인물 소개도 덧붙였다.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오디세이아』를 붙잡는 것은 괴물의 크기나 모험의 숫자가 아니다. 한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무엇을 잃고, 무엇을 지키는가에 있다.
1. 집은 돌아온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뒤 오디세우스는 다른 장수들과 헤어져 바다로 떠밀린다. 여기서부터 10년의 방랑이 시작된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는 힘 대신 꾀를 쓴다. 거인을 취하게 만든 뒤 눈을 멀게 하고 동굴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폴리페모스가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던 탓에 귀향길은 더 길어진다. 키르케의 섬에서는 동료들이 짐승으로 변하고, 세이렌의 노래를 피해야 하며, 스킬라와 카립디스 사이를 지나야 한다. 그러면서 부하를 하나씩 잃는다. 헬리오스의 소를 잡아먹은 뒤에는 혼자 살아남아 칼립소의 섬에서 7년을 보낸다.
마침내 신들의 결정으로 귀향이 허락된다. 오디세우스는 파이아케스족의 도움을 받아 이타케에 도착한다. 전쟁을 떠난 지 20년 만이다. 그런데 집에 돌아왔다고 끝나지 않는다. 궁전에는 페넬로페와 결혼하려는 구혼자들이 들어와 재산을 축내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왕의 모습으로 문을 열지 못한다.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거지로 변장하고 자신의 집에 들어간다. 자신을 기다린 사람과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살핀다. 집으로 돌아오는 일보다 집에서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이 더 오래 걸리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오디세이아』의 구조가 조금씩 보인다. 이 이야기가 정말 다루는 것은 먼 곳으로 떠나는 모험이 아니라, 돌아온 사람이 다시 자기 자리를 찾는 과정이라는 것.
호메로스의 원작은 이 시간을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시작부터 오디세우스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사라진 집에서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찾아 길을 나서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열린다. 오디세우스의 바다 모험은 뒤늦게 그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레히너는 이 순서를 다시 배열해 트로이 전쟁부터 귀환까지 차례로 보여준다. 덕분에 수많은 에피소드가 하나의 방향을 갖는다. 오디세우스는 계속 집을 향한다.
2. 죽지 않는 영웅보다 돌아오는 인간
문학에서 영웅은 오랫동안 강한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전장에서 승리하고, 괴물을 쓰러뜨리고,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대표적이다. 아킬레우스는 오래 사는 삶보다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는 길을 택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전장으로 돌아간다.
오디세우스는 다르다. 가장 강한 전사도 아니다. 싸우기 전에 꾀를 생각하고, 불리하면 이름을 숨긴다. 폴리페모스를 이긴 것도 힘이 아니라 속임수 덕분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거짓말도 한다. 영웅에게 기대하는 고결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서 오디세우스가 흥미로워진다. 칼립소가 불사의 삶을 내밀며 앞날의 고난을 미리 알면 여기 남고 싶어질 거라 하자, 오디세우스는 고개를 젓는다. “영원한 생명과 젊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못 만난다면 그 무엇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신처럼 살 기회를 내려놓고 늙고 죽는 인간으로 남아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영웅이 신에 가까워지는 존재라면 이상한 선택이다. 『오디세이아』는 오히려 반대편을 가리킨다. 영웅은 신처럼 완벽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끝내 인간으로서 무엇을 선택할지 판단하는 사람이라는 것.
오디세우스에게 신의 도움은 계속 주어지지만 선택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문턱에서 제우스는 인간을 향해 혀를 찬다. 사람은 제 불행을 신 탓으로 돌리지만, 정작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못된 짓들 때문에” 무너진다는 것이다. 헬리오스의 소를 먹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도 소를 잡아먹은 동료들처럼, 인간에게는 언제나 제 몫의 선택이 남는다. 신은 길을 열거나 막을 수 있어도, 그 길에서 무엇을 할지는 인간이 정한다.
3. 돌아온 사람은 떠날 때와 같은 사람인가
20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기에 모자라지 않은 시간이다. 오디세우스가 떠날 때 소년이던 텔레마코스는 성인이 되었고, 페넬로페는 긴 기다림을 견뎠다. 집에는 구혼자들이 들어왔다. 오디세우스 역시 전쟁과 바다와 상실을 지나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귀환은 단순히 이타케의 땅을 밟는 일이 아니다. 변장하고 이름을 숨기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확인하는 과정까지 거쳐야 비로소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페넬로페 앞에서도 한동안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오디세이아』에는 이런 장면이 반복된다. 누군가는 얼굴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는 작은 단서 하나로 알아본다. 누군가가 오디세우스냐고 묻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2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내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 맞느냐고 묻는 일이다. 예전과 똑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그래서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는 이름과 얼굴보다 ‘알아봄’이 중요해진다.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순간, 잃어버렸던 자리를 다시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웅의 귀환을 오디세우스 한 사람의 일로만 볼 수 없다. 페넬로페는 집을 지키며 기다리는 동안 계속 판단하고 행동한다. 낮에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밤에는 다시 풀어낸다. 수의가 완성되면 결혼하겠다고 말해 구혼자들을 붙잡아둔다. 기다린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면서 아들의 자리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자란다.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길을 찾는 동안 두 사람도 각자의 자리에서 귀환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르고스도 빼놓을 수 없다. 바다를 건너지 않았고 검을 들지도 않았다. 20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주인을 기다린 것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오디세우스를 알아본다.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건너 귀환했다면 페넬로페는 기다림으로, 텔레마코스는 성장으로, 아르고스는 기억으로 그 귀환을 완성한다.
여기서 영웅의 범위가 달라진다. 영웅은 칼을 든 사람만이 아니다. 누군가가 돌아올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기다림 속에서 자라는 사람도 있다. 『오디세이아』는 한 사람의 모험을 이야기하면서 그 모험이 결코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4. 낯선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오디세이아』에서 운명은 인간을 둘러싼다. 그렇다고 인간의 손을 묶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오디세우스가 불멸을 거절한 것도 같은 선택이다. 신들의 세계 안에서 인간에게 남는 것은 힘이 아니라 판단이다.
이 판단의 기준을 보여주는 것이 크세니아(xenia), 손님과 주인 사이의 환대다. 고대 그리스에서 낯선 나그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다. 손님을 보호하고 주인이 손님을 맞는 규범으로 신의 질서와 맞닿아 있었다. 특히 제우스는 이런 환대의 질서를 관장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오디세우스가 왕이 아닌 거지의 모습으로 자기 집에 들어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전에 낯선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핀다. 구혼자들은 이 질서를 거꾸로 뒤집는다. 손님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주인의 재산을 쓰고 집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마지막의 폭력은 개인적인 복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무너진 집의 질서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오디세우스가 정의의 화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속이고 죽이고 복수한다. 『오디세이아』는 흠 없는 영웅을 만들지 않는다. 불완전한 사람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5. 우리는 어떤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는가
오늘 우리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꼭 가장 강한 사람은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도 아니고 실패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완벽하지 않다. 두려워한다. 속인다. 실수한다. 그래도 다시 선택한다. 그리고 돌아간다. 이처럼 오디세우스가 신보다 인간에 가까운 이유는 약해서가 아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늙고 죽는 삶을 받아들이고, 잃어버린 관계를 다시 찾아가며, 자신의 선택이 남긴 결과를 감당한다.
페넬로페는 기다리고, 텔레마코스는 자란다. 오디세우스는 돌아오기까지 수없이 길을 잃는다. 아르고스는 한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귀향은 그 시간이 한곳에서 만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이 귀향은 신화 속 영웅에게만 주어진 사건이 아니다. 우리도 살면서 몇 번씩 떠나고 돌아온다. 학교를 떠나고, 사람과 멀어지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간다. 시간이 흐른 뒤 익숙했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나도, 그곳도 예전과 달라져 있다. 다시 자리를 찾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오디세이아』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게 된다. 아직 길을 떠나는 중일 수도 있고, 돌아갈 곳을 찾고 있을 수도 있다. 이미 돌아왔지만 달라진 자신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고민하는 때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가 겪은 20년의 시간은 그렇게 우리의 시간과 겹쳐진다.
오디세우스가 찾아 헤맨 곳은 이타케였지만, 우리에게 돌아갈 곳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족일 수도 있고, 오래 미뤄둔 꿈일 수도 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마음일 수도 있다. 때로는 떠나기 전의 자신을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올여름 그 큰 화면에서 오디세이를 만난 사람이라면, 거대한 스크린이 끝내 다 담지 못한 그 몇 줄을 읽어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