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사와 그의 조수가 사는 집은 탄탄한 식재료 연구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각각인 넷의 입맛을 맞춰 온 30년 경력의 베테랑 요리사이면서 갈무리 연구가인 박사는 ‘오늘 뭐 해먹지?’ 라는 최대의 난제 속에서도 가장 편안한 한끼를 만들어 낸다. 한번은 그에게 여러 반찬 뚜껑을 닫는 일에 대하여 귀찮음을 표했다가 조수직을 박탈당할 뻔했다. 내게는 여전히 미션 같기만 한 끼니의 공이 임박사에겐 흥미로운 연구주제가 된다.
박사의 마음에 늘 불꽃이 튀는 것은 사는 곳이 연구소의 조건을 너무나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마당과 작은 텃밭에는 비교적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키울 수 있는 채소와 함께 시기를 타는 계절 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뭐랄까 찬거리를 가지러 3분 안에 다녀올 수 있는 식자재 마트가 집 앞에 있는 느낌이다. 덕분에 가지, 토마토, 고추, 상추, 대파, 감자, 고구마가 태어나서 가장 푸르고 싱싱할 때에 식탁에 오른다.
저장 식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박사는 주로 시간이 필요한 음식에 공을 들이는 편이다. 조미료가 내기 어려운 단맛을 구현해 내며 더부룩한 속을 잠재워 주는 천연 소화제인 매실 엑기스가 바로 그 예다. 박사의 부지런한 손끝을 거치면 자연에서 난 식재료는 또 한 번 수명을 얻는다. 표고버섯을 꼬들하게 말려서 찌개에 넣고 한동안 끓여 먹거나 상처가 나서 바람이 든 무는 간장에 미리 절여 놨다가 잘게 채 썰어 고추장에 무쳐 먹는다. 물에 만 밥 위에 짭짤한 무장아찌 한 점을 올리게 될 때 저장의 풍요로움을 실감할 수 있다.
천천히 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다는 것은 매일 먹는 삶에 잠시나마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물가 걱정을 덜어주는 식재료가 곁에 있으니 박사가 나를 재촉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열심히 키워 내면 계절에 맞춰 보답을 해주니 그에게 자연이 주는 결실이 얼마나 기특하고 예뻐 보일까. 때문에 그 귀한 작물이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우리의 노력을 더하는 일은 갈무리에 있어 마지막 순리와도 같은 작업이다. 박사와 조수는 그 점을 숙명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의 테스트는 쉴 틈 없이 진행된다. 이미 냉장고에 한껏 숙성 중인 고추와 비트절임이 넉넉하게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물론 테스트에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종일 끓이거나 볶아서 만든 결과물이 신통치 않아 가끔씩 연구 의지가 확 꺾일 때도 있다. 되게 이상야릇한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당 포도를 가지고 1차로 잼을 만들고 그 잼에 젤라틴을 섞어 2차로 젤리를 만드는 실험이었다.
결과는 대대대실패. 포도도 아니고 젤리도 아닌 거주죽죽한 슬라임 같은 것을 완성하고 나서야 젤리는 역시 사 먹는 젤리가 최고라며 속으로 결론을 지었더랬다. 행여 박사가 이 일로 낙담할까 봐 눈치가 보였는데 아무렇지 않게 열무김치에 들어갈 풀을 쑤는 것을 보고 역시 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연구를 향한 박사의 뜨거운 열정을 느낀 이후로 갈무리 작업을 대하는 나의 태도 또한 진지해졌다. 조리실과 옥상을 부지런히 오가며 모든 작업 과정에 최선을 다했다. 농사 지은 고구마로 고구마 술빵을 만드는 신메뉴 개발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손질을 마친 대량의 채소 편을 골고루 펼치는 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자랑으로 남은 실험도 있다. 가마솥의 부재로 고대했던 고구마조청 만들기 프로젝트가 엎어져 나름 임기응변을 발휘한 실험이었는데 꽤 훌륭한 성과를 기록했었다. 땅에서 나온 뿌리채소가 묵이 되는 긴 여정은 인내심이 부족한 조수에게 어느 때보다 깊은 감명을 주었다.
고구마가 묵이 되려면 무엇보다 시간을 넉넉하게 확보해야 한다. 고구마를 갈아서 걸러 낸 물을 굳히고 거기에서 얻은 가루를 쑤어서 만드는 게 묵이기 때문이다. 박사와 조수의 케미가 이럴 때 중요하다. 깨끗이 세척한 고구마를 깍둑썰기 해 박사에게 전달하면 그가 건네받은 고구마를 믹서에 넣고 곱게 간다. 갈린 내용물을 면포에 넣은 박사가 내게 사인을 보내면 나는 옆에서 물 한 바가지를 조금씩 나눠 가며 그 위에 살살 부어 준다. 천을 주무를 때마다 뿌연 고구마물이 면포 사이로 빠져나왔고 작업을 반복할수록 희석된 물은 점점 맑아졌다.
아직까지는 얻을 수 있는 형체가 딱히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수는 이게 될까 하는 의구심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작업통을 쟁반으로 덮으며 일주일 정도 기다려 보라는 박사의 말도 믿지 못했던 나는 볕에서 꼬박 일주일을 난 하얀 결정체를 보고 나서야 안심을 했다. 보고도 믿지기 않아서 바닥에 가라앉은 전분을 검지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눌러 봤는지 모른다.
평소라면 일을 덜 하려고 꾀를 피웠을 텐데 이때 만큼은 직접 불 앞을 지키고 싶었다. 전분을 풀어 뿌옇게 된 물을 휘휘 젓다보면 서서히 묵으로 변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글몽글하게 엉키다가 점점 되직해지는 묵의 질감이 주걱을 타고 손끝으로 전해질 때 오감이 전부 활짝 열리는 기분이다.
차갑게 식은 묵이 국그릇에서 찰랑 하고 빠지는 순간, 우리 연구의 정체성이 보다 확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최종 포상이 드디어 식탁에 오르고 박사와 조수는 말캉거리고 투명한 그 자부심을 양념간장에 콩 찍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루에서 무얼 찾겠냐만은 벅찬 조수는 말하고 싶었다. “이게 고구마 전분이라서 그런지 묵 맛이 아주 고급지네요!”
연구소에 있으면 그런 믿음이 생긴다. 거짓 없는 결실을 먹는 동안에는 좋은 사람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대체로 느리고 더디고 번거로운 실험이지만 시간이 걸리는 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갈무리를 통해 배워 나간다.
임박사의 연구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먹는 이를 향한 깊은 애정. 수많은 테스트는 결국 사랑하는 이의 뱃속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그와 지내며 어깨너머로 배우게 된 갈무리 철학이다. 내 사람들의 심신 평화를 동력으로 삼는 곳에서 잘 먹고 무탈하게 지내는 조수가 이 연구의 자부심이 된다면 좋겠다.
곧 있으면 옥상 건조대가 갈무리 식량으로 가득찰 거다. 차로 마실 대추와 돼지감자들로. 더 쌀쌀해지면 반건시가 될 마당 감도 깎아야 할 거다. 그러다 보면 날이 금새 추워져 이번 김장 배추와 무는 얼마나 확보할 수 있을지, 금가루가 되어버린 고춧가루는 얼만큼 빻을 건지를 걱정하고 있을 거다. 갈무리 분야에 정점을 찍으려는 자와 그를 도우려는 자는 그런 걸 걱정하며 갈무리 연구소를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