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백>은 양계농 두만과 도축업을 그만두고 비건 활동가로 전향한 아들 흑이,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손녀 제원의 이야기를 통해 육식과 생명 윤리라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내놓는 작품이다. '영농일지', '식물은 일하지 않는다'로 이어져 온 농업 3부작의 마지막 편이라는 점에서, 연출이 지난 몇 해 동안 농업이라는 화두를 얼마나 오래 붙들어왔는지가 무대 곳곳에서 느껴졌다. 그 결과물이 이번 작품에서는 소재 자체를 정면으로 파고들기보다, 그 소재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했다.
비건이라는 화두는 201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적 논의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담론이지만, 이 극이 그 논의에 어떤 새로운 시선을 더할지 궁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다만 극이 힘을 준 지점은 그보다는 인물들 개개인의 이야기 쪽이었다. 저마다의 이해관계 속에서 마음을 쓰고, 자신이 믿는 바를 지키려 애쓰고,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쉽게 내려놓지 못해 흔들리는 인물들의 모습이 무대 위에 담담히 펼쳐졌다.
말할 수 없는 존재들 사이에서
그 방향성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더 깊이 파고드는 방향보다는 인물들 사이의 정서적인 결을 따라가는 쪽에 가까웠다. 문제의 한가운데 있는 존재, 즉 닭이나 가축에게는 무대 위에서 직접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그 사이에서 비교적 중립적인 자리에 설 법한 제원 역시 아직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전인 학생이라는 위치에 있다 보니 그 균형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기엔 아직 이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제원이 문득 "닭도 아프겠지"라고 흘리듯 던지는 대사는 이 극에서 오래 곱씹게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누군가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아버리는 순간, 그 앎 자체가 곧 책임으로 바뀐다는 말이 있는데, 제원의 그 한마디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책임이 옮겨오는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다가왔다.
대사의 흐름은 시종일관 편안하게 다가왔다. 한 줄 한 줄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느낌이 좋았고, 배우들의 호흡도 그 흐름을 잘 따라가고 있었다. 극 전체를 놓고 보면 뚜렷한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기보다는, 갈등을 굳이 봉합하지 않은 채로 조용히 막을 내리는 쪽을 택한 듯했다.
두만도, 흑이도, 제원도 결국 각자의 삶의 궤적을 계속 걸어가겠구나 싶은 여운이 남는 결말이었는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가장 현실적인 마무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답을 정해서 건네주기보다, 그 판단의 몫을 끝까지 관객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읽혔다. 말로 풀어내는 전개나 다소 날이 선 대사의 방향들도, 어쩌면 인물들이 쌓아온 시간의 무게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인지 다 보고 난 뒤에도 쉽게 정리되지 않는 질문들이 마음 한켠에 계속 남았다.

지우지 않는다는 것
인물 중에서는 흑이가 유독 마음에 오래 머문다. 자신이 찍은 도살 영상을 끝내 지우지 않는 그의 결심에는 무게와 진심이 담겨 있었다.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이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순수하게 살아가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윤리란 완벽한 무죄를 증명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생명에게 지고 있는 책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흑이가 영상을 지우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책임을 계속 품고 가겠다는 조용한 선언처럼 보였고, 나아가 그 영상을 세상에 올려두는 행위는 단순한 항의를 넘어 목격하고 기억하겠다는 일종의 수행에 가까워 보였다 — 실제로 도축장 앞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순례와 추모의 몸짓으로 읽어낸 연구들도 있는데, 흑이의 영상 업로드는 그 몸짓을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다가왔다.
다만 그 신념이 딸 제원을 향한 바람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두 사람의 관계를 한층 입체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태도는 분명 의미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고, 다만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딸이라는 관계가 조금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결을 갖게 된 듯했다. 제원 역시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로만 그려지지는 않아서,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은 극이 끝난 뒤에도 은은한 여운처럼 남는다.
도축업을 계속 이어가는 도원이나 귀농을 꿈꾸는 구준 같은 주변 인물들 역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삶과 노동, 신념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 이야기에 여러 겹의 결을 더해주었다. 이렇게 인물들의 관계가 촘촘하고 다정하게 얽혀 있다 보니, 연극을 보고 있다기보다는 잘 쓰인 한 편의 소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듯한 몰입감이 생겼다.
배우들의 움직임 역시 극적인 사건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일상의 결을 있는 그대로 옮겨온 듯 담백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려봤을 법한 장면들을, 딱 그 온도 그대로 무대 위에 조심스럽게 옮겨놓은 연극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극이 끝난 뒤에도 마음에 남는 것은 결국 제목이었다. 흑이가 무심히 던지는 "30%는 자연에게 돌려줘야 해"라는 대사는, 연구자 제이슨 무어가 말한 것처럼 농업이란 결국 인간과 비인간, 흙이 서로에게 빚지며 관계 맺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아주 짧게 압축한 문장처럼 여겨졌다.
무엇을 돌려줄 것인가
<페이백>이라는 제목 역시 그 연장선에서, 인간이 그동안 비인간 존재에게 진 빚을 어떻게 갚아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읽히게 된다. 화려한 사건보다는 인물들의 숨결과 관계의 결을 따라가는 관극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이 남기는 여운을 오래 곱씹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