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리뷰]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같은 레파토리를 반복하더라도 - 키리에

연극, 키리에

by 신동하 에디터
2026.04.01 14:23

 

 

연극이 관객에게 던지는 가장 오래된 질문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그 질문 앞에서 무대는 언제나 두 가지 방식으로 응답해왔다.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거나, 삶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연극 〈키리에〉는 후자에 속하지만, 단순히 고통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죽으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는 작품이다.

   

제목 '키리에'는 가톨릭과 성공회 미사에서 쓰이는 기도문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즉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키리에는 신을 향한 기도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존재가 존재에게 건네는 자비의 언어다. 신이 부재한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기도한다. 그 기도가 들리지 않을 때조차, 누군가를 살게 한다.


〈키리에〉는 독일 검은 숲 근처의 낡은 집을 배경으로 한다. 이 집에는 30대에 과로사한 한국인 여성 건축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고, 각자의 이유로 삶을 끝내려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서로를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공간에 머물다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조금씩 변한다. 이 글은 그 변화의 결을 네 층위에서 따라가려 한다. 존재와 소외, 소통의 불가능성. 소유적 사랑의 실패. 각성의 방식. 그리고 구원의 조건. 이 네 층위는 하나의 질문을 향해 수렴한다. 소통이 불가능하고, 사랑이 실패하고, 타인이 지옥일 때, 그럼에도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국립정동극장] 2026 연극 키리에_포스터 ©국립정동극장.jpg

 

 

 

1. 존재와 소외, 그리고 소통의 불가능성


 

막이 오르면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공간 자체가 말을 건다. 이것은 단순한 연출적 선택이 아니다. 처음부터 집을 하나의 주체로, 살아있는 존재로 제시함으로써 이 작품은 우리가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공간은 인간의 내면을 담는 그릇이다.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았던 사람의 기억과 감정과 욕망이 스며든 살아있는 장소다. 어린 시절의 방, 오래된 집의 냄새, 특정 공간에 깃든 분위기 — 이것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일부가 된다. 30대에 과로사한 한국인 여성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집에 깃들었다는 설정은 이 의미에서 필연적이다. 그녀는 평생 공간을 만들었고, 죽어서 공간이 되었다. 인간과 공간의 합일이 극단적으로 구현된 순간이다.


그녀의 생전을 돌아보자. 독일이라는 이국의 땅에서 동양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성정체성을 끝내 드러내지 못한 채 억압 속에 존재한다는 것, 건축이라는 하나의 출구에 모든 것을 쏟아붓느라 언니와 조카마저 잃었다는 것. 일적으로는 천재라 불렸지만 개인으로서는 철저히 혼자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을 사랑했지만 그녀 자신을 사랑한 사람은 없었고, 인정과 존재감은 항상 어긋났다.


죽어서 집이 된 이후 20년이 넘도록, 소외는 형태만 바꾸어 지속된다. 기억은 조금씩 흐려진다. 고통스러웠던 것들이 지워지는 것은 차라리 안도이지만 자신을 구성했던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죽음이다. 무엇보다, 말을 할 수 없다. 불을 깜빡이거나 물건을 떨어트리는 것이 전부인 언어. 살아있을 때는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죽어서는 말 자체를 빼앗겼다.


그래서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의 장면들이 더욱 아프다. 집이 신호를 보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고, 울어서 지붕에서 물이 새면 손님들은 화를 낼 뿐이다. 이 장면들은 코믹하게 연출되지만 그 웃음의 뒤편에는 깊은 슬픔이 있다. 비극으로 연출됐다면 관객은 거리를 뒀을 것이다. 웃음으로 연출되었기 때문에 관객은 방심하다가 뒤늦게 그 장면의 무게를 실감한다. 타자의 호소는 공기 중에 흩어진다.


 

 

2. 소유적 사랑의 또 다른 이름, 자기애


 

이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모두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운이 나빴거나 상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서 비롯된 실패들이다.


소설가를 먼저 보자. 그는 소설을 쓰느라 부인을 돌보지 못했고 이혼을 당했다. 표면적으로는 일에 몰두한 남자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그는 부인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오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소설을 완성하는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 언젠가 좋은 작품이 나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확신. 부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묻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랑을 일방적으로 부과했다. 이혼 후 마지막까지 곁에 있던 강아지마저 떠났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실패했는지 마주하게 된다.


성직자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주변의 모든 이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줬다. 시간도, 에너지도, 감정도. 그러나 아무도 그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가장 헌신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의 헌신에는 은밀한 기대가 깔려 있었다. 내가 이만큼 줬으니 당신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사랑의 언어를 빌린 거래였다. 주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돌려받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의 헌신은 아무리 쌓여도 사랑이 되지 못했다. 아무도 감사하지 않을 때 그는 무너졌다.


교직원의 실패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까운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학대했으며 그것이 사랑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소유적 사랑이 극단화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내 뜻대로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때 나는 당신을 교정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 사랑이 지배의 언어가 되는 순간이다.


세 사람의 실패는 형태는 달라도 뿌리는 같다. 소설가는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려 했고, 성직자는 사랑을 주고 돌려받으려 했으며, 교직원은 사랑을 지배의 수단으로 삼았다. 셋 모두 사랑의 대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싶은지를 묻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소유적 사랑은 결국 자기애의 또 다른 이름이다.


 


3.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레파토리를 반복하더라도


 

역설적이게도 이 손님들은 모두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삶의 무게를 실감한다. 죽음이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한 삶은 언제나 당연한 것으로 흐릿하게 존재한다. 죽음을 정면으로 직면하는 순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이 진짜인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엠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엠마는 죽은 자의 공간에서 살아가며 산 자들을 맞이하고, 버섯을 요리해 먹인다. 무당이 신과 인간 사이를 잇듯, 그녀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손님들의 각성을 매개한다. 의도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그 존재 자체가 손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엠마와 그녀의 남편은 한때 무용수였다는 설정에 주목해야 한다. 두 사람은 하데스와 에우리디케를 연기하다 사랑에 빠졌다. 저승의 신과 저승으로 끌려간 영혼이 무대 위에서 만나 사랑이 된 것이다. 당시 엠마는 에우리디케를 행복하게 연기해 악평을 받았다. 비극의 한가운데 있는 존재를 행복하게 연기한다는 것은 이해받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엠마는 개의치 않고 계속 춤을 췄다. 그런 사람이 지금 죽음의 공간인 이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대 위에서 에우리디케를 연기했던 사람이 실제로 죽음의 공간에 뿌리내린 것이다. 오랫동안 이 집에서 살아온 사람으로, 죽음과 삶의 경계 어딘가에 서 있는 존재처럼 기능한다.


엠마와 집의 관계 또한 특별하다오랜 시간이 두 존재를 길들인 것이다.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배운 것처럼, 길들여진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쌓여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된다. 엠마는 집의 신호를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그녀의 몸에 집의 언어를 새겼다. 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두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엠마가 처음부터 지금-여기의 삶에 뿌리내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악평을 받으면서도 춤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 결과가 아니라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사람.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리고 또 굴러 떨어지면 다시 밀어올리는 것을 반복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 남편이 아프기 시작한 이후에도 엠마는 매일 버섯 초콜릿을 굽고 보리차를 끓이고 정성껏 식사를 차렸다. 그 반복이 부조리해 보일지라도, 그 행위 안에 온전히 존재했다.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존재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내어놓는 것. 소유적 사랑이 상대를 내 뜻대로 만들려 한다면, 존재적 사랑은 상대가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엠마는 손님들에게 살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음식을 만들고 차를 끓이고 곁에 있는다. 그 존재 자체가 돌봄이고, 그 돌봄이 존재적 사랑의 실천인 셈이다.


 


4. 거울을 통해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기


 

그리고 엠마의 이 존재론적 사랑은 주변으로 전이되어 사람들을 치유한다. 버섯이 핵심적인 매개다. 소설가는 집 뒤편 숲으로 들어가 버섯을 먹는다. 언어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언어를 내려놓는 순간, 그는 개가 된다. 이것은 단순한 환각 경험이 아니다. 소설가는 평생 언어로 사랑을 붙잡으려 했다. 소설을 쓰는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 언젠가 좋은 작품이 나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설득으로 사랑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부인은 떠났고, 강아지마저 떠났다. 언어는 사랑을 붙잡지 못했다.


개가 되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자신 안에 억압해온 것들과 마주한다. 이성과 언어로 통제하려 했던 감정들, 사랑받고 싶었지만 인정하지 못했던 욕구들, 강아지처럼 그저 곁에 있고 싶었던 본능이 개라는 형태로 표면 위로 올라온다. 타인의 얼굴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는 것이다.


죽은 강아지와의 재연결은 바로 그 차원에서 일어난다. 논리가 아닌 몸으로, 설득이 아닌 감각으로 사랑을 다시 배우는 순간이다. 소유하려 했던 사랑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가 열린다는 것을 그는 그렇게 깨닫는다. 그는 새로운 길을 향해 조용히 떠나고, 그 변화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직자와 교직원의 각성은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진다. 버섯은 땅 위로 보이는 부분은 작지만, 땅 아래에는 거대한 균사 네트워크가 숲 전체를 연결하고 있다. 숲 속의 나무들은 이 균사를 통해 서로 영양분을 주고받으며, 말 없이도 서로를 살린다. 두 사람의 관계도 그러하다.


두 사람은 함께 숲에서 유체이탈을 경험한다. 자신의 몸 밖으로 나와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그들은 상대의 얼굴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성직자는 자신 안에 억압된 이기심을 교직원에게서 보아왔고, 교직원은 자신 안의 공허함을 성직자에게서 보아왔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혐오하는 것은 종종 우리 자신 안에서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다.


그림자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 유체이탈이라는 탈이성적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평생 서로를 미워하며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순간 용서가 가능해지고, 용서가 가능해지는 순간 살아갈 이유가 생긴다.


소설가는 동물을 통해, 성직자와 교직원은 서로를 통해 각성한다. 경로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각성은 언제나 이성을 내려놓았을 때만 찾아오고, 그 진실은 언제나 자기 자신 안의 억압된 것들과 마주하는 순간 열린다.




5. 구원에는 거창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존재적 사랑이 아름답기만 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남편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엠마는 직접 그의 죽음을 맞이해준다. 사랑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것을 넘어 타인의 죽음을 대신 맞이하는 것.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고 도덕적으로는 논쟁적이며 법적으로는 범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 행위를 단죄하지 않는다. 죽음은 철저히 혼자 맞이하는 것이라는 통념을 사랑이 깨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엠마가 남편을 따라 목을 매는 순간, 집이 불을 낸다. 이 작품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다. 집은 20년 넘게 아무도 자신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는 고독 속에 있었다. 말을 할 수 없었고 존재를 알릴 수 없었으며 소통은 언제나 실패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길들여진 존재가 사라지려는 순간, 집은 자신의 몸을 태운다. 석가래가 무너지고 엠마가 살아난다. 이것은 소통의 성공이 아니다. 집은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고 엠마는 여전히 집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통 없이도, 이해 없이도, 존재가 존재를 붙잡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길들여짐의 본질이다.


소통은 불가능하다. 집이 20년 동안 불을 깜빡이고 물건을 떨어트린 것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된 시도였다. 합리적이지 않다.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시도가 쌓여 결국 엠마와의 길들여짐이 가능해졌다. 소통의 성공은 이해를 통해 오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는 존재의 지속을 통해 왔다.


타인은 지옥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갇히고 타인의 기대에 짓눌리며 타인과의 소통에서 끊임없이 실패한다. 이 연극의 모든 인물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건축가는 살아있을 때도 죽어서도 이해받지 못했고, 소설가는 부인을 잃었으며, 성직자와 교직원은 서로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삶을 선택한다. 타인이 지옥이면서 동시에 유일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강아지를 통해 사랑을 배웠고, 성직자와 교직원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했으며, 엠마는 집을 통해 살아남았다. 타인 없이는 각성도 회복도 구원도 없다. 지옥이 동시에 천국인 것이다.


막이 내리기 직전, 집의 목소리가 들린다.


"살아요. 조금만 더."


거창한 이유가 없어도 된다. 삶이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 타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된다. 그냥 조금만 더.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조금 더 버티는 것, 조금 더 곁에 있는 것, 조금 더 시도하는 것 안에 있다.


〈키리에〉는 답을 주지 않는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 대신, 이 작품은 질문의 방식을 바꾼다. 왜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소통은 불가능하지만 시도는 계속된다. 사랑은 실패하지만 다른 방식의 사랑이 가능하다. 각성은 이성을 통해 오지 않고 몸과 감각과 관계를 통해 온다. 타인은 지옥이지만 동시에 유일한 구원이다. 이 네 가지 역설이 이 작품을 관통하고, 그 역설들 위에서 집은 오늘도 불을 깜빡인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지라도.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