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언젠가 <응답하라 2000> 같은 드라마가 만들어져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의 풍경을 그린다면,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는 장면이 한 번쯤은 나오지 않을까. 화려한 그림체로 그려진 인물들이 끊임없이 사랑하고, 질투하고, 배신과 복수를 반복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나의 어릴 적 '도파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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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한 덩어리처럼 부르는 이야기에는 사실 한 명의 원작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지역에서 구전되던 신화와 전승이 음유 시인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고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버전으로 변주되었으며 이후 로마인들이 이를 다시 받아들이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거대한 신화 체계가 만들어졌다.
그중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 이야기에 가장 가깝다.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의 한복판을 보여준다면,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그린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승부한 다른 영웅들과 달리 지략에 능한 오디세우스다. 트로이 전쟁을 끝낸 목마의 계책을 생각해낸 것도 그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영리한 남자는 그리스군 장수들 중 가장 늦게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어릴 적 읽었던 만화는 하필 오디세우스의 기나긴 여정을 완전히 마무리 짓지 못하며 끝났다. 그래서 오랫동안 내 기억 속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떠돌며 겪는 모험으로만 인상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 눈먼 키클롭스, 마녀 키르케, 세이렌의 노래, 오랫동안 오디세우스를 붙잡아 두는 칼립소 등 각각의 에피소드 또한 무척이나 강렬했다. 그러나 이번에 작가 아우구스테 레히너가 풀어 지은 <오디세이아>를 읽으며 알게 된 건,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방랑보다도 '귀향'에 더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얼마나 멀리 떠났느냐가 아니라 그토록 멀리 떠났음에도 어떻게 자기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지가 중요하다.
호메로스의 원작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그리 만만한 책은 아니다. 방대한 분량과 수많은 등장인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 작가 아우구스테 레히너는 이 복잡한 고전을 청소년 독자가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다시 들려준다. 그녀는 고대와 중세의 신화, 영웅 설화들을 현대의 젊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끔 다시 쓰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레히너의 <오디세이아>는 복잡한 원작의 구조를 걷어내고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직선적으로 따라간다. 각각 독립적인 전설 같던 유명한 모험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만난 사건들'이라는 하나의 방향을 갖게 된다. 이 직선적 재구성은 역설적으로 오디세우스가 무엇을 위해 이 모든 일을 견디는지 분명히 알게 한다. 그의 목적지는 언제나 이타케다.
그래서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비중 있고 중요한 부분은 마침내 오디세우스가 이타케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다. 그는 곧바로 왕궁으로 뛰어들어 "내가 돌아왔다"라고 외치지 않는다. 거지로 변장한 채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20년간 누가 변했고, 누가 여전히 자신에게 충직하며, 누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는지를 하나씩 확인한다. 어느새 장성한 아들 텔레마코스와 재회해 그는 아들과 함께 구혼자들을 상대한다.
특히 페넬로페가 오디세우스의 활을 당길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할 때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구혼자들은 차례로 활 앞에서 실패한다. 마침내 거지 차림의 남자가 손에 활을 쥘 때 독자들은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곧 닥칠 응징을 기다리게 된다. 이 장면은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익숙한 쾌감을 준다. 오늘날의 복수극, '사이다' 서사에서도 반복되는 구조다. 평범하고 무력해 보였던 인물이 사실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설정, 그렇게 정체를 숨긴 강자가 모욕을 견디며 때를 기다리는 것, 악인들은 정체를 모른 체 계속해서 선을 넘는 것 말이다. 우리는 수천 년 전부터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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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원형을 강렬하게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타케에서의 이야기는 중요하지만, 귀향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하기 때문에도 중요하다. 오디세우스의 몸이 이타케에 도착한다고 해서 귀향이 바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곧바로 '오디세우스'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오랜 시간 거지의 모습을 하며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생각해 보면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를 바꾸는 사람이다. 키클롭스 앞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 아닌 자'로 말하고, 낯선 땅에서는 자신의 출신을 감추며, 고향에 돌아와서조차 거지로 분한다. 그가 마지막에 되찾아야 하는 것은 단순한 왕위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오디세이아> 후반부에는 '알아보는 일'이 반복된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알아보고, 늙은 개가 주인을 반기고, 유모가 그의 흉터를 통해 왕이 돌아왔음을 알아본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아내 페넬로페다.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모두 처단했다고 해서 그녀는 곧바로 그의 품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그녀는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로 그를 시험하고, 오디세우스가 그것에 반응하고서야 비로소 그를 받아들인다. 그제야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완성된다. 괴물을 죽여서도, 바다를 건너서도, 이타케의 땅을 밟아서도 아니다.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그 사람'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그는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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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생각했던 삶에서 멀리 벗어나는 순간이 있다.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먼 곳까지 흘러가기도 하고, 다시 돌아가서도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많은 부분이 나의 실수일 수 있다. 신의 분노가 오디세우스를 여러 곤경으로 이끈 것은 맞지만, 많은 부분이 오디세우스 본인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머리가 좋기 때문에 살아남고 자신이 머리가 좋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다시 위험에 빠진다. 심지어 이타케에 돌아간 뒤에도 분노와 복수가 또 다른 싸움으로 이어질 뻔하고, 아테나의 개입이 없었다면 또 곤경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오디세이아>가 말하려는 바일 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집이 최고다'라는 '귀향 예찬'이 아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가는 일이지만,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만 나아갈 수는 없다.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자신의 선택 때문에 더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한 번도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멀리 와버린 뒤에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었는지를 잊지 않는 일인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완벽해서 이타케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수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길을 잃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목적지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괴물을 물리치는 것만이 영웅의 일은 아니다. 자신이 없는 동안 변해버린 세계로 돌아와 그 시간을 받아들이고, 다시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왕이 되는 것 역시 영웅에게 주어진 과제다. 오디세우스의 진짜 영웅적인 면모는 얼마나 멀리 떠났는지가 아니라, 그 모든 일을 겪고도 끝내 돌아와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데 있다.
레히너가 다시 풀어지은 소설들은 1950년대에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래로,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청소년 도서로 손꼽히고 있다. 그중 <오디세이아>가 청소년에게 건넬 수 있는 이야기는 의외로 현실적이다. 길을 잃지 않는 것보다, 길을 잃었을 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기억하고 방향키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