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이상하게도 영화에 대한 말을 꺼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재미있었는지, 잘 만들어졌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지. 극영화라면 비교적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질문들이 다큐멘터리 앞에서는 조금씩 어긋난다. 화면에 담긴 것이 이미 누군가의 삶을 그 너머의 삶, 우리가 스크린 밖에서 살고 있는 그 생생함을 너무 쉽게 정리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본 세 편의 영화, 〈하제〉, 〈회생〉, 〈관리처분계획-미아리 텍사스 편〉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런 질문을 남겼다. 다큐멘터리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다큐멘터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 보여주어야 하는가.
〈하제〉: 다큐멘터리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군산시 하제마을은 미군기지 탄약고에 인접한 작은 마을이다. 과거에는 거대한 팽나무와 함께 많은 사람이 터전으로 삼았던 마을은 미군기지 확장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하제마을의 유일한 주민 전진현씨는 고향을 찾아올 누군가를 위해, 여기에 누군가 남아 있다는 그 증인이 되기 위해 홀로 살아간다. 다큐멘터리는 전진현씨를 통해 한 번, 마을을 지키는 팽나무를 통해 한 번, 마지막으로 마음속 고향 하제마을을 간직한 인간 주민들과 비인간 주민들을 조망하며 세 차례 이야기를 뿌리내린다. 영화에서 비인간 존재들은 단순한 생태적 배경이 아니다. 중반부터 주요하게 등장하는 팽나무뿐 아니라 전진현씨의 거울에 한참 머무르는 박새, 버려진 강아지들이 자라는 모습, 함께 팽나무에 고사를 지내는 모습 전부 우리가 잊어버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비추어낸다.
하제마을은 오랜 국가 폭력의 증거이자 평화의 이름을 가진 땅이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며 생존자이자 목격자가 되는 인생을 기꺼이 살아내고 그 삶을 스크린 너머 관찰자들에게까지 기꺼이 내보인다. 7~8년에 가까운 시간은 영화 안에서 압축되었다가 밀봉 포장이 터지듯 시야를 빼앗으며 지나간다. 그 솔직함과 범람하는 감정에 대해 조금은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그 이유로는 이 다큐멘터리가 주는 시간 차, 누군가의 고통을 멀끔히 찍혀있음이. 그들의 연대가 너무나 깊고 넓어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말미, 하제마을의 옛 주민들이 자신들이 기억하는 고향을 말하는 순간에는 그들의 투박함에 마음이 울린다. 동시에 하제마을의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유대를 느끼며 이토록 첨예하고 빼곡하게 채운 스크린을 부분 부분 인상적이었다 하기 조심스러워진다. 마치 영화 <침묵의 친구> 속 토니처럼 자신만의 고독과 슬픔을 자연과 고향에 대한 존중으로 풀어내는 이들을 감히 판단할 수 있을까.
〈회생〉: 다큐멘터리는 어디에 있는가
<회생>은 평생을 걸쳐도 갚기 힘든 빚을 진 아버지와 그의 빚을 갚기 위해 법무사사무소에서 함께 일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 위 시대의 사건과 슬픔이 따라온다. 영화 속 대사처럼 불행이 풍년이다. 시인을 꿈꾸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작은 법무사사무소에서 일하기를 다짐하고 몇 년을 내리 함께한다. 아버지가 죽을지 모른다는 슬픔과 분노. 서로만 아는 그 감정을 제쳐 놓은 채, 직장 동료로 삶을 이끄는 부자의 모습이 서글프면서도 정겹다. 기분이 상해 차에서 밥을 먹는 아버지와 굳이 문을 열어보는 아들. 누가 아버지고 아들인지 분간이 가지 않기도 하다. 업(Karma)을 함께 짊어지기를 택한 그 모습을 보며 온갖 세상의 편린들이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여진다.
<회생>은 종종 유머를 통해 심각한 분위기에서 효과적으로 탈출하지만, 이 화면을 보는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수많은 우연으로 다다른 삶에서 우리는 자주 비극과 마주친다는 것을 힘겹게 이겨낼 수 있는 종류의 어려움도 있지만 어쩌면 당신이 평생 업보로 가지고 살아야 할, 당신의 잘못이 전혀 아닌 끈적한 비극은 삶의 모퉁이마다 모두를 기다리고 있을 테다. 그렇기에 이 다큐멘터리 속 인물이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받아들임으로써 쥐어지는 자유에는 그만한 고통과 인내가 따른다. 누구보다도 회생 절차를 잘 알고 있을 아버지가 자신의 빚을 생에 걸쳐 갚아 나가길 선택한 데에는 그 수용의 희망이 있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두고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베트남전에서 살포된 고엽제로 생긴 피부병 때문에 온갖 약에 집착하는 할아버지, 가족의 희망이었지만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 그리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그들의 삶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는 아들이 한 화면에 등장할 때, 이 야속한 운명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영화를 여러 번 떠올릴수록 이들을 그렇게 부르기가 조심스러워진다. 할아버지의 병도, 아버지의 빚도, 아들의 선택도 생을 구성하는 아주 구체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들의 삶에 함께 한숨 쉬고 웃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 삶에 어떤 첨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큐멘터리는 그사이 어딘가에 있다. 타인의 삶을 전부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없는 애매한 거리. 그래서 영제인 ‘Karma’는 영화가 말하는 ‘빚’의 의미를 조금 더 넓혀 보게 한다. 여기서 업, Karma는 갚아야 할 금전적인 채무만이 아니다. 가족에게 이어지고, 시대를 통과하여도 삶에 남아 있는 것이다. 지리멸렬하게 나를 나로 만들어낸 삶의 빛들을 <회생>은 담담하게 내보인다.
자신의 것이 아닌 빚을 다하기 위해 비구니의 삶으로 돌아간 어머니의 얼굴에는 이상할 만큼 평온함이 있다. 끝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동시에 영화의 말미, 범종을 울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의 모습은 속세의 어려움과 법무사사무소의 하루를 잠시 잊은 것처럼 고요하다. 그의 말처럼 ‘빚을 갚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이 삶을 살아보기로 한 사람의 얼굴. 그것은 회생 절차를 마친 뒤 연신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만큼이나 뜨거우면서도, 열반에 다다른 이의 모습 같기도 하다.
계속 살아가는 일,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 <회생>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그 길고 긴 과정의 한 일면일 것이다. 모든 삶에 반드시 회생이라는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오지 않음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살아낼 수 있다는 의미를 끌어내는 이 다큐멘터리를 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좋다’고 말하기에는 미안할 지경이다.
〈관리처분계획-미아리 텍사스 편〉: 다큐멘터리는 무엇까지 보여주어야 하는가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분명 우려스러운 순간들이 찾아온다. 화면 속 이들의 안위가 걱정되고 들여다보고 싶다. 많이 보여준다는 건 누군가에겐 일상인 삶을 전시하는 일이 될까 봐. 화면 속 누군가를 좇은 눈은 종종 갈 길을 잃는다. 〈관리처분계획-미아리 텍사스 편〉을 보기 전에도 비슷한 걱정이 되었다. 다큐멘터리는 사회에서 부정되고 지워지는 존재들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보여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카메라가 얼굴과 삶을 더 많이 보여줄수록 정말 존재가 드러나는 것일까. 삶이란 건 정지하고 끊어낼 수 없는 것인데, 이런 화면을 통해서만 존재를 깨닫는다면, 그것은 그 너머의 관객들조차 이들을 가리는 데에 동참하는 건 아닐지 궁금하다.
영화는 계속해서 짧은 몽타주와 사진을 이어가고, 소리를 찬찬히 담는다. 화면에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아도 관객은 스크린 너머에 일어나는 일을 짐작할 수 있다. 파쇄된 종이를 맞춰보듯, 대응하지 않는 사진과 목소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영화는 호소하지 않는다. 그저 기록하며 성 노동자의 곁에서, 편에서 이들의 말을 듣고 카메라를 들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보며 묘한 감정을 느낀다. 아마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생겨나는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삶을 전부 알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 생겨나는 공감과 연민이 있다. 삶의 터전을 잃고, 동시에 세상이 배척하는 곳이 고향이자 일터이기에 외면받는 것이 익숙한 여자들의 음성. 미아리 텍사스가 투쟁의 현장이며, 고향이자 일터인 그 모습들에. 그럼에도 사람 냄새가 나는 그 음성들이 자꾸 떠오른다.
〈관리처분계획-미아리 텍사스 편〉에서는 이들의 존재를 아주 조금씩 드러낸다. 목소리로, 주변 소음으로, 몽타주로, 화면의 한쪽에 언뜻 비치는 모습으로. 어쩌면 보여준다는 것은 모든 것을 공개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관객이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취급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괴롭다. 오랫동안 지워지거나 부정되어 온 존재들을 떠올릴 때면 그 사실에 부채감을 느낀다. 우리는 왜 이들을 모르는지. 고민은 관객과 사회의 몫이다.
세 편의 다큐멘터리가 남긴 것은 각각의 답이라기보다 비슷한 종류의 거리감이다. 관객은 화면 속 삶을 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이해하려 하지만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카메라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남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관객은 믿는다. 그리고 느낀다. 한마디의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운 사람들을 대변하고,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고르고 있는 사람을 보여주고, 우리가 잊어버린 존재들을 카메라에 가득 담아냄으로써 말한다. 어떤 카메라는 요동치며 대상과 함께 호흡한다. 소리치고 뛰고 외면하면서 충실히 그 생동을 담아낸다. 그 성질이 어떻듯 간에 사람을 울리는 다큐멘터리는 모두 비슷한 힘이 있다.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그 힘. 모르는 일이 아니게 되는 수많은 삶과 사실을 직면하게 한다. 관객을 동조자로 함께 끌어들이며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