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나게 한 판 노는 '연희집단 The 광대'의 공연이 돌아왔다. THE 광대의 공연이 유독 기대되었던 것은 오래전 보았던 광대 탈놀이 <딴소리 판>의 흥겨운 여운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풍물과 탈춤, 무속, 남사당놀이를 오늘의 감각으로 풀어내는 이들의 무대에서는 전통이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놀이가 된다.
이번 <광대 올림픽 : 희로애락> 역시 그랬다. 무대 위에는 전문 연희자뿐만 아니라 중랑구에서 살아가는 신중년 시민과 일반 관객이 함께 올랐다. 누군가는 광대가 되고, 누군가는 그들을 응원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날 무렵에는 그 구분조차 무의미해졌다. 그날 국립극장 하늘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꺼내 보인 광대였기 때문이다.
“그저 희로애락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잘 넘기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 용용 김용훈 광대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모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마주하는 광대였다.
관객이 무대 위로 입장하는 순간
공연은 예정된 시작 시각보다 15분 먼저 시동을 걸었다. 관객은 예매 단계에서 ‘응원단’과 ‘광대선수’ 중 하나의 역할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응원단은 객석에서 공연을 바라보고, 광대선수는 공연 전부터 무대에 올라 광대들과 함께 움직이며 무대를 완성하는 구조였다.
희·로·애·락을 상징하는 네 명의 광대가 서로 다른 색을 입고 등장하자 광대선수들이 눈 앞의 광대를 따라 일렬로 따라갔다. 사람들은 앞선 이의 동작을 따라 하며 발로 땅을 밟고, 몸을 흔들고, 감정을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네 개의 선은 원형무대를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흐트러지고 다시 이어졌다.
무대에 오른 광대선수에게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낯설고도 신기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한편 응원단석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경험도 특별했다. 배우가 아닌 평범한 관객들이 원형무대를 가득 채우자, 각기 다른 몸의 움직임은 하나의 불규칙한 문양처럼 보였다. 완벽하게 맞춰진 군무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생생했다. 누군가의 몸짓이 뒷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움직임이 또 다른 사람에게 번져 나가면서 낯선 사람들이 잠시 하나의 집단이 됐다.
또한 입장 전부터 모든 관객에게 지급된 응원풍선(별칭 팡팡이)도 단순한 소품 이상의 역할을 했다. 객석에서 같은 박자로 팡팡이를 두드리고 흔들며 광대선수들을 응원하자 무대와 객석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대감이 만들어졌다. 관객이 공연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연이 계속되도록 힘을 보태는 존재가 된 것이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을 통과하는 몸
우리의 인생에는 희로애락이 찾아온다. 다만 공연의 순서처럼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이 차례대로 방문하지는 않는다. 기뻤다가도 느닷없이 분노하고, 슬픔 한가운데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광대 올림픽 : 희로애락>은 이 복잡한 감정들을 머리로 설명하기보다 몸으로 겪게 한다. 이 공연에서 광대란 감정을 능숙하게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감정을 기꺼이 통과시키는 몸이다.
‘희’에서는 흥겨운 음악과 함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춤을 췄다. 응원단도 객석에서 같은 동작을 따라 하며 기쁨에 동참했다. 기쁨은 혼자 간직할 때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할 때 더 커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로’는 등에 붙은 ‘화딱지’를 떼어내는 움직임으로 표현됐다. 신중년 광대와 광대선수들은 가방을 멘 채 서로의 등에 붙은 화딱지를 떼어 주었다. 혼자서는 제대로 볼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분노를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내려놓는 모습이었다. 분노를 무조건 참거나 없애야 할 감정으로 다루지 않고, 함께 발견하고 떼어내는 장면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화딱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이어진 ‘애’에서는 마음속 슬픔을 종이에 적어 파도란 이름의 연줄 위에 걸었다. 종이의 일부는 찢어 슬픔의 조각으로 내어놓고, 남은 조각은 고이 접어 다시 마음속에 넣었다. 모든 슬픔을 완전히 비우고 떠나는 결말이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어떤 슬픔은 꺼내놓는 것 조차 힘들기도 하다. 우리는 마음을 조금을 꺼내어 다른 사람과 나누고, 아직 놓지 못한 슬픔은 다시 품은 채 살아간다. 공연은 그 미완의 상태까지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마지막 ‘락’에서는 기쁨과 분노와 슬픔을 모두 안은 사람들이 풍물 장단 속에서 한바탕 어우러졌다. 전문 연희자와 소리꾼, 신중년 광대와 일반 관객이 한 공간에서 함께 뛰고 춤췄다. 즐거움이 앞선 감정들을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다. 분노와 슬픔을 지나온 몸이기에 마지막의 흥은 더욱 깊고 뜨거웠다. 결국 즐거움이란 아무런 슬픔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여러 감정을 품고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인지 모른다.
평범한 시민의 삶이 공연이 될 때
<광대 올림픽 : 희로애락>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주체 지원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공연이다. 또한 3년간 이어진 ‘신중년과 함께하는 <모두 광대> 프로젝트’의 마지막 무대이기도 하다. 2024년에는 <나는 광대> 전시·발표회를 열었고, 2025년에는 야외 쇼케이스 <우린 광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2026년, 14명의 신중년 광대가 연희집단 The 광대와 함께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며 3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무대에 오른 시민들은 전문 배우가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정주부로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어릴 적 품었던 무대의 꿈을 뒤늦게 펼치는 이들도 있었다. 자신의 끼를 마음껏 드러내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긴장과 행복, 그리고 묘한 해방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익숙한 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만날 법한 사람들이 무대에 오르자 공연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곧 나의 이야기가 됐다. 능숙함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들의 동작과 연기는 다소 어설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어설픔 덕분에 감정들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완벽하게 연출된 인물보다 실제로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보여주는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은 무대와 객석의 벽을 허물고 진솔한 감동을 주었다.
연희집단 The 광대의 손다은 총괄 PD는 '신중년 광대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진솔한 희로애락을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공연에서 시민은 전문 예술가를 보조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무대 위 언어로 바꾸고 공연의 중심을 지키는 창작의 주체였다. 중년 이후의 삶을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도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감정도 영원하지 않기에
공연의 끝에서 광대는 출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출입구를 나서면 우리의 공연은 끝나지만, 여러분의 희로애락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말을 들은 순간 우리에게 주었던 희로애락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광대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몸과 마음을 맡기자 내가 지나온 삶의 희로애락도 하나씩 떠올랐다. 이렇게 가공되지 않은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느껴본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감정을 눌러두는 일에 익숙하다. 기쁨은 지나치게 들뜨지 않도록 줄이고, 분노는 관계를 망칠까 숨기며, 슬픔은 약해 보일까 삼킨다. 그렇게 묵혀둔 감정은 사라지는 대신 몸 어딘가에 쌓인다. <광대 올림픽 : 희로애락>은 무뎌진 몸과 마음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한바탕의 처방전과 같았다. 특히 우리 전통의 장단에는 쌓아둔 감정을 터뜨리고, 숨겨둔 나를 사람들 앞에 꺼내놓게 하는 힘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우리 민족의 ‘흥 DNA’는 단순히 잘 놀고 잘 웃는 성질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을 함께 견디고 감정을 공동체의 에너지로 바꾸는 능력일 것이다.
“인생은 희로애락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 광대올림픽 작·공동연출 김서진
기쁨과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노와 슬픔 역시 삶을 다채롭고 깊게 만드는 감정이다. 또한 어떤 감정도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감정은 찾아왔다가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또 다른 감정이 도착한다. 삶은 어쩌면 그 모든 감정을 피하지 않고 느낀 뒤, 몸 밖으로 잘 통과시키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전통연희가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만나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앞으로 내게 찾아올 희로애락도 밀어내기보다 그 감정마다의 가치를 인정하며 반갑게 맞이해 보려 한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 모두 기쁨도, 분노도, 슬픔도, 즐거움도 기꺼이 통과시키는 광대가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