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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부동산 영업사원들의 실적 경쟁, “글렌게리 글렌 로스(Glengarry Glen Ross)” [공연]

사원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무엇이었나

by 정진형 에디터
2026.08.1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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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ld Vic 전경. 사진: 직접 촬영.

 

 

지난 6월 4일부터 7월 16일까지 런던 워털루역 인근에 위치한 극장 디 올드 빅(The Old Vic)에서 연극 “글렌게리 글렌 로스(Glengarry Glen Ross)”가 상연되었다. 미국 극작가 데이비드 머멧(David Mamet)이 쓴 작품으로, 영국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뒤 1984년 퓰리처 드라마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1980년대 미국 부동산업계 영업사원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번 공연은 여성 배우들이 원작 희곡의 남성 캐릭터들을 각색 없이 연기함으로써, 기존 작품이 지닌 시사점과 더불어 실험성도 보여준다.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로 인한 갈등이 심화된 21세기에 80년대 후반 영업사원들의 고군분투를 담은 연극의 시사점은 무엇일까.




시카고 부동산 회사에서 벌어진 실적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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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시카고에 위치한 한 부동산 회사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회사는 직원들에게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한 달 내에 최고 실적을 올린 사원은 명품 자동차 캐딜락을, 2등은 고급 식기 세트를 받게 되지만 하위권에 머문 나머지 두 명은 해고당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소식을 접한 사원들은 저마다의 행동을 취한다. 회사의 젊은 에이스 리차드 로마는 소심한 남성 고객과 계약을 성사시키며 영업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오랜 기간 부동산 영업사원의 커리어를 이어왔으나 슬럼프에 빠져 실적이 부진한 셸리 레빈은 회사의 사무팀장 존 윌리엄스에게 구매 잠재력이 높은 고객 명단을 달라며 뇌물로 회유한다. 자기 밥그릇이 우선인 데이빗 모스는 가늘고 길게 살아가려는 소시민적 사원 조지 애러노에게 사무실의 고객 명단을 훔쳐 경쟁사에 팔아넘길 것을 제안한다.


다음 날, 사무실은 데이빗의 계획대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경찰은 사무실에서 사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고객 명단을 경쟁사에 넘기는 역할을 맡았을 뿐, 실제 도둑질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무실을 털어간 이는 데이빗이 회유했던 조지였을까?




소모품이 된 사원들, 실적 경쟁의 본질은 무엇인가?


 

작품에서 벌어진 사건은 크게 두 가지다. 생계가 걸린 실적 경쟁과 그로 인한 사무실 도난 사건이다. 그러나 극이 결말을 향할수록 누가 캐딜락을 거머쥐고 누가 고객 명단을 훔쳤는지 추측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갈등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일종의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개인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셸리는 극에서 자본주의의 소모품으로 전락한 대표적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오랜 시간 영업사원으로서 부동산 업계에서 커리어를 이어 온 데 자부심이 있는 인물이다. 왕년에는 글렌 로스 농장을 팔아 좋은 성과를 기록한 적도 있다. 그러나 실적이 부진한 시기가 찾아오며 악순환이 시작된다. 신규 계약을 수주하지 못하자 회사는 그에게 토지 매매에 관심이 없거나 구매 능력이 부족한 저품질 고객 명단만을 주었고, 실적을 올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실적이 저조할 경우 해고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이러한 그의 처지는 젊은 에이스 리차드 로마와 대비되며 더욱 안타깝게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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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들통나고 망연자실한 셸리.

 

 

궁지에 몰린 셸리는 조지 대신 데이빗의 계획에 가담하여 사무실의 고객 명단을 훔친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가 존과 대화를 나누던 중 전날 밤 사무실에 있었던 사람만 알 수 있었던 정보를 실수로 언급하며 허무하게 드러나 버린다. 부동산 업계 세일즈맨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늙은 사원을 몰락시킨 것은 회사도, 동료 직원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자주 언급하는 특정 단어는 셸리가 사무실을 턴 사실이 밝혀지기 전부터 직원들이 회사의 소모품처럼 이용되고 있음을 관객에게 암시한다. 극 초반 셸리는 존에게 ‘양질의 고객 명단(Leads)만 있으면 충분히 실적을 올릴 수 있다’라고 말하며 구매 잠재력이 높은 신규 고객의 연락처를 넘겨 달라고 요구한다. 또한 데이빗과 셸리가 경쟁사에 팔아넘기려 한 자원 또한 고객 명단이다. 따라서 어쩌면 회사의 수익을 좌우하는 것은 영업사원 개인의 영업 능력보다 매물을 구입할 가능성이 높은 고객 정보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일 수도 있다.


결국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실적 경쟁은 누가 1등을 차지하든, 누가 떠나게 되든 모두에게 기만적인 게임이 된다. 회사가 효율적인 예산 운용을 위해 특정 부서의 구조조정을 감행하는 것은 상식적인 결정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존의 성과를 토대로 대상자를 선별하여 해고를 통보하는 대신, 노력하면 회사에 남을 수 있다는 여지를 주었다. 이를 통해 회사는 영업 능력이 좋은 에이스 1인과 실력은 평범하지만 충성도 높은 직원을 쉽게 선별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직원들이 해고를 면하기 위한 공격적인 영업 활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구매 능력이 낮은 고객들로 구성된 저품질 명단으로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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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사무실장 존, 우: 리차드 로마.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경쟁구조에 대한 영업사원들의 분노는 사무실장 존에게 향한다. 특히 셸리는 존이 뇌물을 대가로 고객 명단을 넘길 것을 거절하자 그가 자신처럼 회사에 돈을 가져다주지도 않으며 비서 일이나 하는 쓸모없는 인물이라며 비하하기 시작한다. 그가 말한 대로 존은 회사의 행정 업무를 수행할 뿐 영업사원들을 해고하기로 결정한 이가 아닌데도 말이다. 나아가 이는 후반부 셸리의 도둑질이 존에게 들통났을 때 그 어떤 제안과 호소도 통하지 않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구도는 자본주의 체제의 압력이 특정 개인의 악의보다 광범위하고 비가시적인 구조를 통해 작동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편 실적 1위를 차지한 리차드 역시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다. 뛰어난 실적으로 당장의 경쟁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그의 가치 역시 결국 회사에 가져다주는 실적에 의해 결정된다. 언젠가 실적이 부진해지거나 그보다 젊고 뛰어난 영업사원이 등장한다면 그 또한 셸리와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결국 이 경쟁의 본질은 캐딜락을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희생양이 되는 순간을 얼마나 늦출 수 있는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연극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 여성 배우들이 연기한 남성 캐릭터


 

런던 소재의 극장 디 올드 빅(The Old Vic)에서 상연된 이번 연극의 또 다른 특징은 원작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 캐릭터를 여성 배우들이 연기했다는 점이다. 특히 셸리를 연기한 인디라 바르마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오베린의 정부 엘라리아 샌드 역을 맡았던 배우였기 때문에 더욱 반가웠다. 등장인물이 전원 남성이었던 희곡을 여성 배우들로 캐스팅한 데에는 몇 가지 실험적 의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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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고객을 회유하는 리차드 로마.

 

 

작품은 1980년대 남성 영업사원들의 남성성을 빠른 템포의 잦은 욕설이 담긴 대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여성 배우들이 재현함으로써 관객 스스로 ‘남성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만들었다. 리차드 로마 역을 맡은 로사 살라자르는 극에서 스모키한 화장과 함께 왁스로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가죽 소재의 검은 트렌치 코트를 입어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른 인물과 논쟁을 벌이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에서는 발을 쿵쿵 구르며 실패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젊고 겁 없는 남성 영업사원을 표현했다. 그녀가 표현한 리차드 로마는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 기질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형성된 관념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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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인디라 바르마의 셸리 레빈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동시대 여성들이 극의 인물들에게 자신을 투영할 수 있도록 공감의 범위를 확장했다. 인디라는 셸리 레빈이 지닌 ‘남성성’ 대신 그의 삶을 표현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였다. 갈색 톤의 차분한 투피스 정장과 책상에 앉을 때 착용하는 안경은 로사가 보여주는 리차드의 폭발적인 카리스마 대신 오랜 기간 업계에 몸담은 중년 사원의 관록과 고고함을 자아냈다. 또한 극 중 허리와 고개를 꼿꼿이 든 채 빠른 템포로 대사를 읊는 배우의 자세에서는, 실적 경쟁이라는 위기가 닥쳐도 끝내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셸리의 면모가 드러났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사무실을 도둑질한 이가 셸리임이 밝혀졌을 때 더욱 처절하게 무너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인디라 바르마의 셸리는 성별과 관계없이 업계에서 오랜 시간 쌓아 온 경험의 가치가 수치와 비용으로 평가되는 과정에서 쉽게 무너지는 개인들의 애환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극 “글렌게리 글렌 로스”의 한국 상연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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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글렌게리 글렌 로스”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여러 시사점을 제공한다. 여전히 개인의 삶과 자부심의 가치는 수치로 평가되고, 과열된 경쟁 환경을 조성한 시스템 자체에 대한 비판 대신 세대, 성별, 인종 등을 기준으로 나뉜 개인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며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극장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배우들이 참여한 버전을 보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영어에는 ‘He’와 ‘She’처럼 특정 성별을 명백하게 지칭하는 대명사가 있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그러한 표현들이 보편적인 구어체로 사용되지 않는다. 원작의 말맛을 살리기 위해 ‘그’, ‘그 자식’, ‘영감탱이’와 같이 남성을 지칭하는 표현을 인위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겠으나, 성별이 언어에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영어 원문에 비해 한국어 공연에서는 성 의식적 캐스팅의 효과가 덜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한국어의 언어적 특징을 살려 여성 직장인들의 서사를 새롭게 담아낸 “글렌게리 글렌 로스”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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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게리 글렌 로스 영화 포스터.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영업사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글렌게리 글렌 로스”는 올해 3월 스튜디오 블루에서 열흘간 상연되었으나 현재는 연극 일정이 없다. 다만 유튜브와 일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1993년에 개봉된 영화 “글렌게리 글렌 로스”를 볼 수 있다. 영화판에서는 실적 경쟁을 통보한 부서장급 본사 직원이 등장하는데, ‘ABC, Always Be Closing(항상 계약을 성사시켜라)’라는 대사를 남기며 초반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구체적인 줄거리를 알고 싶다면 영화판 감상을 추천한다.

 

 

스틸컷 출처: The Old V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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