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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담백하게, 이모저모 뜯어보기 [전시]

색면에서 번짐까지, 윤형근의 화면을 천천히 들여다보다

by 김민주 에디터
2026.09.24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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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1928~2007)의 개인전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가 PKM갤러리에서 열린다. 작가가 실제로 살고 작업했던 서교동 자택 ‘윤형근의 집’이 2026년 9월 처음 대중에 공개된 것을 기념해 마련된 전시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주요 회화와 한지 작업 등 30여 점을 통해 윤형근의 화면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처음 마주쳤을 때

       

      전시장에 들어서면 화면 전체를 가르는 색면이 가장 먼저 시야를 채운다. 밝은 색과 짙은 색이 나뉘고, 그 사이의 여백이 화면의 분위기를 잡는다. 처음에는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뿐이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엄버가 가장 눈에 띄고, 울트라마린이 쓰인 작품도 군데군데 보인다. 두 색이 겹친 자리에서는 먹빛이 돈다. 윤형근은 울트라마린을 하늘에, 엄버를 땅에 대응시켜 '천지문(天地門)'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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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선 전시장은 편안한 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낡은 지도와 색이 바랜 책 표지의 빛깔과 닮은 색이었다. 밀색과 엄버 계열은 평소에도 눈이 가는 색이지만, 이 작품들의 색에는 그와 별개로 오래된 것에서 연상되는 안정감이 배어 있었다. 거친 천의 질감까지 더해져, 오래된 문서의 글자를 크게 확대해 걸어 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 색감은 물감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화면에 사용된 천의 질감과 색, 물성이 재료와 함께 어우러져 보인다. 어쩌면 화면의 색은 조색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탕에서부터 올라온 색에 가까웠다.

       

      이 첫인상을 '좋다'는 말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준을 하나 정했다. 의미를 미리 붙이지 않고, 작품에서 확인되는 것만 본다. 담백하게 보기로 했다.

       

       

       

      가까이에서

       

      몇 걸음 다가서자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타났다. 시원하게 뻗은 붓질 사이에 작고 검은 물방울 같은 점이 튀어 있었다. 캔버스 앞면에서 옆면으로 발길을 돌리니 물감이 번져 스며든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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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걸음 다가서 보니 화면은 단순한 하나의 색면이 아니었다. 짙은 색면 사이에는 방향이 일정하지 않은 번짐이 있었고, 수직으로 뻗은 선 사이로는 다른 방향으로 퍼져 나간 자국이 보였다. 이 자국들은 색면과 따로 놓여 화면의 규칙을 살짝 비껴나 있었다.

       

      번짐의 정도와 방향은 작품마다 달랐다. 특히 짙은 엄버와 밀색 사이의 미세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색면이지만 그래픽처럼 딱 떨어지지 않았고, 색의 농도와 번짐의 차이만으로 화면 안에 볼거리가 여러 겹 생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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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은 색의 수직 면은 절벽과 겹쳐 보인다. 검은 면 넷이 화면 아래에서 솟아 좌우로 두 면씩 짝을 이루고, 바깥쪽 면은 캔버스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있다. 왼쪽 두 면은 오른쪽보다 한 단 높은 자리에서 끝났고, 그 사이로 밀색 바탕이 넓게 비어 있다. 높이가 다른 두 벼랑이 골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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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작품에는 울트라마린과 엄버, 밀색빛의 배경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이 화면 앞에서는 파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모래 위를 덮으며 들이치는 파도처럼 여러 색이 포개진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파랑이 어디서 끝나고 엄버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선으로 짚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파도에는 짙은 파랑과 옅은 파랑, 거품이 섞인 색, 모래와 만나 초록빛을 띠는 색이 함께 있다. 파도가 한 번 지나간 모래에는 젖은 자국이 남는다. 이 작품의 색도 깔끔하게 나뉘지 않고 스며들고 겹치며 하나의 장면을 이루었다. 파랑 위로 엄버가 비치는 자리에서는 색이 한 톤 가라앉았고, 밀색과 맞닿는 자리에서는 파랑이 옅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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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획과 번짐은 윤형근이 물감을 묽게 희석해 여러 겹 덧칠하는 방식과 이어진다. 묽은 물감은 천의 섬유 속으로 스며들고, 색과 색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풀어진다. 캔버스 옆면까지 남은 자국, 방향이 제각각인 번짐, 같은 엄버 안의 농담 차이도 모두 이 과정에서 나온 결과다. 물감이 묽을수록 천은 더 깊이 머금고, 덧칠이 쌓일수록 색은 층을 이룬다. 작가가 정하는 것은 물감의 농도와 덧칠의 횟수이고, 물감이 천의 결을 따라 어디까지 퍼질지는 천이 정한다. 화면에 남은 흔적이 완전한 통제의 결과도, 단순한 우연도 아닌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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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멀어졌을 때

       

      그렇게 한참 가까이에서 살펴본 뒤 다시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에서는 선과 점, 붓질과 번짐으로 나뉘어 보였던 것들이 다시 하나의 색면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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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단순한 색면이던 화면이 가까이서는 수많은 흔적으로 채워져 있었다. 반대로, 점과 번짐, 붓질 사이의 결은 멀리서 색면의 농담으로 읽혔다. 가까이서는 낱낱이 흩어져 보이던 것이 물러서면 한데 모였고, 다시 다가서면 낱낱으로 풀어졌다.

       

      절벽을 보던 눈이 파도로 옮겨 갔고, 오래된 문서를 보던 눈은 다시 색과 재료의 관계로 돌아왔다. 절벽이라 하기에는 가장자리가 번져 있었고, 파도라 하기에는 면이 곧게 서 있었다. 어느 쪽으로도 화면이 다 설명되지 않아, 무엇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화면 앞을 오가며 계속 살폈다. 한 걸음 다가서면 붓질의 결이 보였고, 한 걸음 물러서면 색면의 무게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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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며

       

      그동안 추상회화와 단색화 앞에서는 작품의 의미와 미술사적 맥락부터 확인했다. 이미 정리된 설명을 따라가며 작품을 이해하려 했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뒤로 미뤄두었다. 이번에는 규칙을 세웠다. 먼저 색면을 보고, 가까이서 붓질과 번짐을 따라가고, 다시 물러나 작품 전체를 살폈다. 그러자 단순해 보였던 화면에서 물감의 농도와 튄 점, 천에 스며든 자국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절벽도 파도도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내가 붙여본 이름이었다. 가까이에서는 붓질과 번짐이, 멀리에서는 색면의 무게와 재료의 관계가 드러났다. 하나의 해석으로 화면을 규정하기보다 거리를 바꾸어가며 다시 바라보자, 처음에는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이미 존재하는 의미를 확인하는 일만큼, 눈앞의 것을 직접 살펴보는 과정도 필요하다. 누군가의 해석을 따라 작품을 규정하기 전에 색과 붓질, 재료의 흔적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 그렇게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작품은 설명으로만 알던 대상에서 직접 마주한 대상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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