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사람을 살린다. 그런데 때때로, 돈은 사람을 죽인다.
생계를 위해 버는 돈이 도리어 사람의 생(生)을 생(牲), 곧 제물로 바치게 만든다. ‘자본’이라는 불가항력적 가치 앞에서 이것은 그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일까.
1. 유행과 트렌드를 익숙한 스토리에 압축하다.
지난 10월 30일, 넷플릭스(Netflix)에서 드라마 <꿀알바>가 공개되었다. 회당 40분 남짓, 8부작이라는 짧은 호흡을 택한 <꿀알바>는 매회 새로운 아르바이트 현장을 펼치는 옴니버스 구조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 중심에는 빚에 몰린 청년 변혁준(이재욱)과, 사라진 오빠를 쫓는 동생 변지윤(김민하)이 있다.
드라마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해보자면 이러하다. 주인공 ‘혁준’은 쌓이는 빚과 거듭되는 취업실패, 여기서 몰려오는 좌절감을 더 이상 부담하지 못해 한강으로 향한다. 그렇게 다리 위에서 떨어지려던 찰나, 빚을 전부 갚을 자신은 없지만 스스로 죽을 자신은 더 없었던 혁준은 결국 난간 철골을 붙잡으며 죽는 데 실패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수상한 전단지를 하나 발견한다. ‘마지막 반전의 기회! 초고액 일당 알바’. 그 길로 그는 전단지에 적혀있던 ‘거미인력’ 사무소로 향하게 되고, 본 드라마는 인력사무소에서 초고액의 시급을 받기 위해 초위험 알바에서 사투하는 혁준의 생존기를 따라간다.
아르바이트에 성공할 때마다 시급의 곱으로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으로, 자꾸만 혁준은 고위험 아르바이트를 수행하러 향하는데. 거기서 그는 정신을 잃고 실종되는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동생 ‘지윤’이 실종된 혁준을 찾아내기 위해 추적하기 시작하면서, 이윽고 두 남매가 함께 기상천외한 일에 휘말린다. 혁준과 지윤은 각각 그리고 같이 이 ‘거미인력’과 ‘위험 아르바이트’, 그리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친부’에 관한 진실로 한 걸음 다가간다.
가족 구성원이 함께 연대하면서 적과 위험에 맞서 사투하는 이야기는 꽤나 흔하다. 그러나 본 드라마만의 조금 더 특별한 지점은, 미스터리한 ‘아르바이트 에피소드’에 있다.

8부작으로 구성된 드라마는 꽤 빠른 호흡으로 남매를 위험 속으로 몰아넣는다. 1화부터 거미인력의 제안을 수락하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로 한 혁준은 곧바로 편의점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편의점에는 지켜야 할 기묘한 ‘수칙’이 있다. 이 수칙은 근래에 핫한 반응을 얻고 있는 ‘나폴리탄 괴담’을 연상케 한다. 이뿐만 아니다. 그 밖의 이야기에서도 도시전설과 다양한 괴담을 연상토록 하는 아르바이트 에피소드가 있으며, 유명한 배우들이 각 에피소드의 보스 혹은 기믹을 맡으면서 재미를 한층 더한다.
예컨대, 근래에 꽤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씨네필’을 유머 포인트로 다룬 부분도 있다. 영화관 아르바이트 에피소드 중 조현철 배우가 씨네필 관객 기믹으로 등장하여, 지윤에게 전문적인 영화 지식이 필요한 질문을 쏟아내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이 시청자에게 독특한 유머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처럼, 드라마는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옴니버스식으로 괴담/도시전설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시청자들에게 회차마다 각기 새로운 긴장감과 도파민, 짜릿함을 선사하며, 자칫 뻔할 수 있는 ‘돈 버는 이야기’를 낯설게 만든다. 그러나 이 괴담들은 재미를 위한 장치에 그치지 않는다. 규칙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괴담의 문법은, 수칙을 어긴 개인에게 사고의 책임을 돌리는 노동 현장의 논리와 꼭 닮았다.
2. 보편의 고통에서 한 걸음 깊이 들어가다.
이 드라마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돈 버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드라마다. 결국 혁준과 지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에 처하게 되는 것도, 결국 ‘돈’ 때문이다. 돈을 벌어야 하므로.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돈과 생계의 문제는 드라마에서 자주 다루는 결핍 요소 중 하나다. 영상매체 중 거의 가장 대중의 입맛을 고려하는 드라마에서 돈과 생계를 자주 다룬다는 건, 그만큼 이것들이 모든 사람들이 겪는 ‘보편의 문제’라는 것이다. 살기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 대부분의 대중이 겪는 가장 보통의 고통이다. 우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누구나 돈을 번다. 여기서 오는 여러 스트레스와 고통이 가장 대중적으로 공감받기 쉬운 정서인 게 당연하다. 그런데 드라마 <꿀알바>는 단순히 돈으로 인한 고통에서 멈추지 않는다. 돈에 의해 소실되어 가는 인간들. 그들의 인권은 물론이고, 갉아 먹히는 그들의 목숨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가장 명확하게 돈을 벌고자 혈투하는 이들이 있다. 혁준과 지윤. <꿀알바> 속 메인 캐릭터인 두명이기에 어쩌면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이들이다. 그런데 종종,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또 다른 참가자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편의점 알바생 최희동(최현욱), 제약회사 꼰대 과장 조준섭(윤경호), 건설 현장의 인부들과 작업반장(고창석), 병원의 임상시험 연구원들과 임상시험 지원자들, 놀이공원 인형탈과 그 담당자(박경혜) 등등. 이들과 혁준의 관계는 대개 같은 ‘을과 을’의 관계일 때도 있지만, 때때로 ‘갑과 을’의 관계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돈을 버는 중에, 돈을 벌고자 찾아온 사람들이 죽는다. 갑으로 보였던 이들 또한 결국 괴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추후에 “필요한 희생” 혹은 “필요한 제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것들을 필요한 희생이라 말하며 지시를 내렸을 제일 상층부의 누군가는 모습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꿀알바>는 단순히 돈을 버는 과정에 처한 인물들의 고단한 모습만을 다루지 않고, 돈과 자본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들을 밀도 있게 포착한다. 단순히 괴담이자 도시전설을 통한 도파민 콘텐츠인 줄만 알았던 이야기에서, 본 드라마의 메시지가 자꾸만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노동자들의 희생과 목숨값. 자본의 가치 앞에서 세워진 명확한 권력관계. 을과 을의 싸움.
3. 반전의 변주를 통해 경고하다.

초현실적인 사건이 자꾸만 발생하는 이 드라마에서, 그 무엇보다 현실일 수밖에 없는 내막이 드러난다. 음연주(고민시)의 과거 진실이 이에 해당한다. 그간 거미인력을 둘러싼 끊이지 않는 사고와 기이한 소문의 전말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다니던 음연주의 과거가 후반에 이르러 공개되는데. 그런 그녀가 겪었던 일이 바로 ‘경일방직 투쟁’인 것이다.
1970년대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동일방직 투쟁’에서 영향받은 경일방직 투쟁. 열악한 노동환경과 노동권에 관해 소리쳐 외치던 여공들을 회사와 공권력이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그 일. 투쟁하던 경일방직 여공들이 무참히 짓밟히던 중, 사물함에 숨어있던 연주는 그대로 음의 세계로 떨어지는데. 여기서 밝혀진다. 음연주가 사람이 아닌,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음연주는 마냥 무서운 흑막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여태껏 드라마 안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갔듯, 그녀 또한 경일방직에 의해 희생당한 노동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로서 겪었던 음연주의 고통은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녀가 그간 정체를 숨긴 채 혁준과 지윤을 이용하여 맹목적으로 해왔던 일에 대한 강렬한 당위성을 말이다.
음의 세계의 문을 열면서 거미인력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 경일방직의 탄압을 온몸으로 겪었던 연주에게 있어 ‘착취의 굴레’를 끊어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정체가 탄로나는 순간, 그간 남매가 겪었던 괴물들 또한 사실 ‘희생당했을 노동자’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이 떠오른다. 경일방직의 여공으로서 희생당했던 연주의 정체가 괴물이었다는 사실과, 거미인력 사장이 종종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한 대가’라며 소수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태도에서 근거가 드러난다. 이것들은 작품 내에서 ‘반전’의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본 드라마에서 이 반전은 놀라움이나 공포에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 <꿀알바>는 이 반전으로 연민과 경고를 함께 건넨다.
4. 현실과 연결될 때 비로소 기억해내다.

그렇다면 드라마 <꿀알바>는 이러한 반전을 통해 우리에게 무얼 경고하고 있을까.
위에서도 말했듯, 본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경일방직 투쟁’은 과거 1970년대의 한국에서 일어났던 ‘동일방직 투쟁’을 연상토록 한다. 그리고 거기에, 그간 괴물들의 정체에 대한 암시가 반전을 통해 드러난다. 그간 알바처에서 혁준이 겪어왔을 수많은 괴물들. 그것들이 전부 같은 노동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 말이다. 이것들을 드라마 <꿀알바>는 켜켜이 쌓아 노동 착취와 희생의 주제에 관해 밀도를 높인다.
그렇다면 다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난 22년, 평택 SPL 제빵공장 직원의 기계끼임 사망 사고를 비롯한, SPC 기업의 노동자 사망사고이다. '필요한 희생'이라는 사장의 말은 드라마 속 대사로만 남지 않는다. 2022년 10월 15일, 평택 SPL 제빵공장에서 20대 노동자가 소스 배합기에 끼여 숨졌다. 지난달 4주기를 맞았지만, 그 뒤로도 SPC 계열 사업장에서는 노동자 사고가 이어졌다. 우리의 과거엔 경일방직 투쟁이 있고, 수많은 SPC 노동자 사망 사고가 있다. 그간, 정확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노동자 사고와 투쟁이 있었다. 이외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이 사망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잊는다. 자꾸만 사고가 반복된다.
살아가는 대다수의 대중은 노동자에 해당한다. 노동자라는 건 즉, 일(노동)을 하고 받은 돈으로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혁준도, 지윤도, 연주도, 드라마 안에 등장했던 대부분의 인물들도. 그리고 우리도. 모두가 노동한 값으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같은 입장의 누군가가 처절히 냈던 목소리를 잊고만 산다.
사람은 노동한 값으로 ‘먹고 살아가야’ 한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고 바쁘기에, 하루마다 발생하는 사건사고에 대해 꾸준히 경각심을 유지하는 데도 꽤 많은 힘이 든다. 그렇지만, 잊어선 안 된다. 우리와 같은 그들의 무고한 희생과,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희생을 지시하는 진짜 '갑'의 존재를 말이다. 기억은 다음 희생을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들의 죽음을 기억해야만 하고, 애도해야만 한다. 그래야 살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에 대한 무심(無心)을, 사람끼리 더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
5. 때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보다 온(溫).

거미인력 사장이 연주에 의해 사라진 뒤로, 그간 있었던 기상천외한 일들 또한 전부 사라진다. 다시 취업난에 빠진 혁준은 면접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리 위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여성을 마주한다. 마치 거미인력 전단지를 발견하기 바로 직전, 다단계 기업 면접에서 뛰쳐나온 혁준이 다리에서 떨어지려던 것처럼. 여성은 떨어지려고 한다. 혁준은 떨어지려는 여성을 다급하게 붙잡는다. 왜 붙잡냐며 홧김에 따져 묻는 여성에게 혁준은 우물쭈물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그런 어영부영한 혁준의 모습을 바라보던 여성은 눈물을 뚝 그친다. 그러더니 신발을 신고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조용히 떠난다.
드라마 <꿀알바>의 하위장르 중에는 ‘생계형 호러’라는 것이 있다. 실제 있는 장르명이 아니다. 공식 장르가 아닌 홍보 문구에 해당한다. 그런데 어쩐지 이 장르명이 마냥 낯설지 않다. ‘생계형 호러’라는 단어가 이 드라마에 꼭 들어 맞는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장르는 우리 삶에도 적절히 어울린다. 장르명을 넘어서, 때때로 나 또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호러로 느껴질 때가 있다. 생계를 잇는 일 자체가 때로는 그 어떤 괴담보다 무섭다.
우리는 살기 위해 돈을 번다. 돈을 벌어야 기본적인 의식주를 갖추면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런데, 돈을 벌며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가끔 참 버겁고 무섭다. 버겁다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에 목매며 살아가는 게 그러하다는 것이고. 무섭다는 것은 노동 자체가 무섭다는 것이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데, 노동을 해도 다쳐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돈을 버는데, 역설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 종종 우리 사회에선 일어난다. 그만큼 생계는 고단하다. 자본이라는 불가항력 가치 앞에서 이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어쩌면 드라마 <꿀알바> 또한 이것들의 호러적 요소로써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또 이따금씩, 살아가는 데 있어 돈보다 무언가 더 절실해질 때가 있다. 자살하려던 여성을 붙잡은 혁준의 안쓰러운 손 같은 것. 그리고 그 손에서 느껴지는 온(溫). 돈은 사람을 살린다. 돈으로 사람은 생계를 유지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정말 때때로, 돈보다 이런 온(溫)이 사람을 살릴 때가 있다. 이것으로 버텨 낼 때가 있다.
자본은 무거우며 차갑고, 참 어렵다. 그런데 그런 자본의 냉혹함에 지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손’이라는 생각이 든다. 혁준이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내어주는 행위 말이다. 자신의 온기를 내어주며 연대하려는 조그마한 동작 하나가, 불가했던 모든 것들을 찬찬히 가능토록 만들지 않을까.
그러니 잊지 않는 것, 같은 노동자로서 서로에게 무심해지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온(溫)이다.
돈과 온은 첫소리 하나가 다를 뿐이다. 돈이 사람을 죽이는 자리에서, 온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