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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책임을 가르는 화살의 시위를 우리가 당기다 - 영화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

서사와 반전을 이용하여 관객의 추측을 부수다.

by 승아영 에디터
2026.10.12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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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이 영화라는 매체를 채택하여 작품 안팎에 있을 ‘주체’들에게 어떠한 토대를 제공하는가.
       
      OTT가 발전한 근래라면 말이 달라지기야 하겠다만, 본래 영화라는 것은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을 우선으로 염두에 두는 매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의 매체라는 건, 간단히 설명하자면 서사를 전달하는 미디어를 말한다.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 웹소설, 웹툰, 게임 등의 것들도 전부 각각의 매체다. 각각 다 다른 형식으로, 다 다른 방식을 이용하여 관람자에게 서사를 전달한다. 대체로 활자가 찍히는 책이나 활자가 비춰지는 휴대폰을 이용해 매체는 서사를 전달하곤 한다.
       
      그런데 영화는 다르다. 조금 더 특별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한손으로 쉽게 쥘 수 있는 직사각형의 스크린(휴대폰)이나 가정용 냉장고의 반 정도되는 크기의 스크린(티브이)으로 서사를 전달하는 그 어떤 매체들보다 더 다르게. 영화는 압도적인 크기의 스크린 앞에서 관객이 이미지와 사운드, 서사를 경험하길 바란다. 극장에서 감각하는 것들은 일상에서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을 능가한다. 어쩌면 이게 감독들이 서사를 영화로 만드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접할 때보다 훨씬 더 다른 감각의 차원에서 느끼고 경험하도록.
       
      그래서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는 꽤 오랫동안 관객의 머릿속에 남는다. 극장이라는 장소가 관객이 그럴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오랫동안 남는 그것들은 자연스레 관객에게 때때로 인생에 관한 어떠한 토대를 제공한다. 영화라는 경험과 극장의 감각으로부터 비롯된 토대. 감독들은 관객이 이것들을 형성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본래 「치이카와」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나가노’에 의해 연재되던 만화였다. 그런데 그것이 인기를 얻어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된 것이다.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하는 일은 일본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 극장판 버전으로 나오는 작업도 어쩌면 그렇게 신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왜 이 에피소드를 하필 영화로 만들었는가’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채택하고 있는 연출과 음향, 편집, 카메라 기법을 이용하여 이 에피소드의 어떠한 것을 작가 ‘나가노’는더 특별하게 포착하고 싶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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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이카와」의 작가 나가노의 세계관 속에선 어떤 캐릭터건 나쁘지 않다. 이는 곧 마냥 악의를 지닌 채 행동을 하는 캐릭터가 없다는 말이고, 또 다르게 말하자면 어떤 캐릭터건 함부로 탓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나가노는 작품을 감상하는 자들이 작품 내에서 누군가를 쉽게 단죄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건, 원작 「치이카와」와 영화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 속 캐릭터에게 역시 그러하다.
       
      영화는 주인공 ‘치이카와’와 그의 친구들 ‘하치와레(가르마)’, ‘우사기(토끼)’에게 특별한 초대장이 떨어지면서 영화는 서사를 시작한다. 섬에서 간단한 토벌만 해주면 100배의 보수와 한정음식을 제공하겠다는 초대장 문구에 혹해 치이카와와 친구들은 섬으로 향하는데. 도착한 후에야 그들은 이 전단지에 있는 내용의 대부분이 속임수이며, 결코 간단치 않은 몬스터 ‘세이렌’을 토벌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접한다. 보상은 겨우 섬의 특산품. 하지만 여기서 치이카와 일행은 물론이고, 이 영화의 시선조차 거짓을 고한 섬 주민들을 감히 탓하지 않는다. 주민들에게는 그렇게라도 도움을 구해야만 했던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선은 서사의 메인 안타고니스트인 ‘세이렌’과 사건의 진상이자 범인인 ‘한잎’과 ‘두잎’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는 관용으로 확장된다.
       
      결국 영화는 그 어떤 캐릭터도 탓하거나 단죄하지 못하도록, 그 여지조차 남기지 않으면서 선의와 악의의 경계를 흐트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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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과 ‘진실’이 있다. 사실(Fact)은 주관적 해석이 배제된 ‘일어난 일 그 자체’를 말한다. 그리고 진실(Truth)은 그 이면의 맥락을 꿰뚫어 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사건의 진짜 얼굴’과 같다. 사실만 모아두면 때때로 우리(관객 혹은 청자)에 의해 왜곡이 발생하지만, 진실은 그 행위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서사를 완성한다.
       
      영화 속 치이카와를 비롯한 일행들이 목도하는 것은 사실(세이렌의 습격과 인어를 살해한 한잎)이지만, 관객이 도달한 곳은 그 이면의 진실(우연히 비극을 맞이한 우정과, 우정을 지키기 위한 한잎의 선택)이다.
       
      세이렌의 습격을 피해 숨어든 어떤 주민의 집에서 하치와레가 <전설의 동물 도감>을 통해 ‘사실’을 발견하는 지점은 ‘영웅의 여정’ 작법에서 흔히 쓰이는 장치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들이 어떤 단서를 찾아내며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는 전형적인 전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이 익숙한 장치는 일종의 타당성을 쥐여주는 계기가 된다. 관객과 인물들에게 누군가를 마음 놓고 탓할 명분. 즉, ‘낙인의 타당성’을 쥐여주는 계기인 것이다.
       
      당초, 세이렌은 친구(인어)를 죽여 영생을 얻어낸 범인만 찾아주면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밀었다. 하치와레 또한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며 사태가 끝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자 범인인 한잎과 두잎은 끝내 스스로 자백하지 않는다.
       
      그 순간, 무고한 주민들을 괴롭히는 줄로만 알았던 세이렌에겐 정당한 복수라는 관용이 부여되고, 끝까지 침묵을 지키는 한잎과 두잎에겐 모든 비극의 원흉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애초에 이들이 영생을 욕심 내어 인어를 죽이지만 않았다면 이 섬에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고, 치이카와 일행들이 위험을 겪을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가까스로 세이렌을 몰아낸 뒤 열린 축제의 밤, 모닥불 앞에서 치이카와가 한잎과 두잎을 다시 마주할 때 영화는 이 손쉬운 단죄를 다시 한 번 막아낸다.
       
      치이카와는 알고 있다. 한잎과 두잎의 집에 떨어져 있던 인어 비늘. 그리고 무엇보다 쓰러진 두잎의 몸에 건전지를 끼워넣자 거짓말처럼 두잎이 다시 살아나던 기묘한 광경. 치이카와는 ‘사실’을 목도했다. 그리고 이것을 정확히 아는 건 관객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잎과 두잎을 향해있던 단죄의 화살이 치이카와라는 주체의 윤리적 시선을 향해 방향을 바꾸게 된다. 세이렌까지 물러난 판에 범인인 한잎과 두잎은 끝까지 함구할 게 분명하고, 이 사실을 밝혀내 폭로할 캐릭터는 이제 치이카와 뿐이기 때문에.
       
      치이카와는 고민한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음에도 이걸 묵인할 것인지, 폭로할 것인지 말이다. 그간 많은 주민들이 죽었다. 한잎과 두잎의 선택 때문에. ‘사실’과 ‘진실’이 있다. 사실(Fact)은 주관적 해석이 배제된 ‘일어난 일 그 자체’를 말한다. 그리고 진실(Truth)은 그 이면의 맥락을 꿰뚫어 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사건의 진짜 얼굴’과 같다. 사실만 모아두면 때때로 우리(관객 혹은 청자)에 의해 왜곡이 발생하지만, 진실은 그 행위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서사를 완성한다. 영화 속 치이카와를 비롯한 일행들이 목도하는 것은 사실(세이렌의 습격과 인어를 살해한 한잎)이지만, 관객이 도달한 곳은 그 이면의 진실(우연히 비극을 맞이한 우정과, 우정을 지키기 위한 한잎의 선택)이다.
       
      세이렌의 습격을 피해 숨어든 어떤 주민의 집에서 하치와레가 <전설의 동물 도감>을 통해 ‘사실’을 발견하는 지점은 ‘영웅의 여정’ 작법에서 흔히 쓰이는 장치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들이 어떤 단서를 찾아내며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는 전형적인 전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이 익숙한 장치는 일종의 타당성을 쥐여주는 계기가 된다. 관객과 인물들에게 누군가를 마음 놓고 탓할 명분. 즉, ‘낙인의 타당성’을 쥐여주는 계기인 것이다. 앞서, 세이렌은 친구(인어)를 죽여 영생을 얻어낸 범인만 찾아주면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밀었다. 하치와레 또한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며 사태가 끝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자 범인인 한잎과 두잎은 끝내 스스로 자백하지 않는다.
       
      그 순간, 무고한 주민들을 괴롭히는 줄로만 알았던 세이렌에겐 정당한 복수라는 관용이 부여되고, 끝까지 침묵을 지키는 한잎과 두잎에겐 모든 비극의 원흉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애초에 이들이 영생을 욕심 내어 인어를 죽이지만 않았다면 이 섬에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고, 치이카와 일행들이 위험을 겪을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가까스로 세이렌을 몰아낸 뒤 열린 축제의 밤, 모닥불 앞에서 치이카와가 한잎과 두잎을 다시 마주할 때 영화는 이 손쉬운 단죄를 다시 한 번 막아낸다.
       
      치이카와는 알고 있다. 한잎과 두잎의 집에 떨어져 있던 인어 비늘. 그리고 무엇보다 쓰러진 두잎의 몸에 건전지를 끼워넣자 거짓말처럼 두잎이 다시 살아나던 기묘한 광경. 치이카와는 ‘사실’을 목도했다. 그리고 이것을 정확히 아는 건 관객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잎과 두잎을 향해있던 단죄의 화살이 치이카와라는 주체의 윤리적 시선을 향해 방향을 바꾸게 된다. 세이렌까지 물러난 판에 범인인 한잎과 두잎은 끝까지 함구할 게 분명하고, 이 사실을 밝혀내 폭로할 캐릭터는 이제 치이카와 뿐이기 때문에.
       
      치이카와는 고민한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음에도 이걸 묵인할 것인지, 폭로할 것인지 말이다. 그간 많은 주민들이 죽었다. 한잎과 두잎의 선택으로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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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이카와」는 일본말인 치이사이(작다)와 카와이(귀엽다)가 합쳐진 말로, 국내에서는 그 어감을 살려 ‘먼작귀(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로 번역되었다. 작품은 이름 그대로 작고 소중한 캐릭터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린다. 이 작품이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는 데에는 이러한 요소들도 한몫 하는데, 이와는 역설되는 ‘현실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한 것도 인기를 얻은 것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노동과 아르바이트, 그것을 통해 얻는 쥐꼬리만한 소득. 게다가 주택청약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나름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를 본뜨지는 않는다. 때문에 캐릭터들은 비대한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과도한 고민 없이 순수하게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는 오히려 기존의 「치이카와」식 전개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그건 ‘딜레마’에 있다. 앞서 말했듯, 그간 큰 고민 없이 살아왔던 치이카와는 이 영화에서 이르러 처음으로 윤리적 딜레마를 겪는다. 기존의 「치이카와」식 전개에는 캐릭터들이 딜레마를 겪을만한 사건과 사고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 딜레마야말로, 에피소드를 20분씩 나누어 회차를 진행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짧은 컷으로 나누어 회차를 진행하는 만화로는 담아낼 수 없는, 나가노가 이 에피소드를 영화로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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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이카와는 고민한다. 우물쭈물 망설이며 서로 붙어있는 한잎과 두잎의 앞에 서서, 증거가 될 비늘이 들어있는 가방을 만지작 거린다. 단죄의 화살이 한잎과 두잎에게는 물론이고 치이카와에게 까지 향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때, 여기서 영화는 ‘진실’을 보여준다. 치이카와 몰래, 시위를 당기던 관객들에게 말이다.
       
      한잎과 두잎이 차마 입밖에 내미 못한 이면의 진실. 바닷가에서 한잎과 두잎이 타고 있던 배를 세이렌이 의도치 않게 전복시키면서 두잎이 사경에 이르렀고, 자신의 친구를 살리기 위해 한잎이 세 마리의 인어 중 하나를 죽여야 했다는 참혹한 전말을 말이다. 이 서사가 플래쉬백 되면서 영화는 우리에게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한잎과 두잎에게 향하던 화살이 방향을 잃는다.

      가해자와 피해자. 알고보니 피해자였던 가해자, 가해자였던 피해자. 피해자였던 가해자가 저지른 악의적 살해, 가해자였던 피해자가 저지른 선의적 살해. 이 모든 경계가 이 진실로 인하여 희미해진다.
       
      선의와 악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의미와, 법률적으로 쓰는 의미가 다르다. 악한 의도, 나쁜 마음이라는 뜻하는 ‘악의’는 법률적으로 ‘행위 함에 있어 그 효력과 발생을 알고 있었음’을 말하고. 선한 의도, 착한 마음을 뜻하는 ‘선의’는 법률적으로 ‘행위 함에 있어 그 효력과 발생을 몰랐음’을 뜻한다.
       
      그렇다고 했을 때, 가해자였던 피해자 세이렌이 두잎을 의식불명 상태로 만든 게 선의적 행동인 것이고, 피해자였던 가해자 한잎이 인어를 죽인 것은 악의적 행동인 것이 되는데. 그런데 진실을 알았을 때, 과연 이들의 행동을 단순히 선의적이고 악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의식불명 상태로 만들고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앞서, 진실을 알게되었을 때 그렇게 단순한 차원에서 쉽게 단죄할 수 있는 것일까.

      이윽고 카메라는 고민하는 치이카와의 얼굴에서 멀어지고, 그 위로 올라간다. 그러면 한잎과 두잎, 치이카와, 그리고 치이카와에게 다가오는 하치와레의 모습을 오버헤드 숏으로 잡는다. 치이카와에게 향하던 화살까지, 모든 화살이 다 방향을 잃는 순간. 한잎과 두잎처럼, 치이카와에겐 하치와레가 있다. 만약 한잎과 두잎에게 일어난 일이 치이카와와 하치와레에게 똑같이 일어났다면, 치이카와는 그 선택을 안 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치이카와는 선택한다. 말하지 말자.
       
      진실을 모른 채 사실만 알고 있는 치이카와의 선택은 과연 악의일까 선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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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머물던 지역을 떠나 낯선 섬에서 미스터리하고 위험한 존재들과 마주하며 고군분투하는 치이카와의 이 모험은, 앞서 말했듯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을 대부분 그대로 채택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출발-입문-귀환’의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영웅은 모험을 통해 얻은 지혜나 보상을 가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결말을 일군다. 영웅의 여정 구조를 대부분 따라가고 있는 이 영화는, 이 지점에서 어긋난다. 치이카와는 아무것도 얻지 않는다. 얻는다고 해봤자 그 섬의 특산품 재료들. 양념장이나 식재료같은 것들 뿐이다. 그거 말고는 보물이나 새로운 깨달음 없이 돌아온다.

       

      애시당초 치이카와는 영웅의 여정 중 ‘영웅’과 거리가 멀다. 단순히 영웅적 모먼트가 없다는 게 아니고, 영웅이 될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말이다. 「치이카와」의 세계관이 그러하듯, 치이카와는 큰 결핍이나 내적 고통을 안고 있지 않다. 그러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캐릭터가 이 작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세계관 속 캐릭터들이 전부 소박한 일상 속에서 확실하게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치이카와는 간단한 5급 자격증도 삼수하기에 이르렀으니 숨겨진 지능이나 재능이 크게 없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영웅의 조건인 ‘타자에 대한 이타심’ 또한 사실 「치이카와」 속에서 모몽가를 제외한 캐릭터들은 모두 지니고 있는 조건이다. 본 작품의 세계관 속에서는 큰 욕망과 욕심을 지닌 캐릭터들은 죄다 괴물화 되곤 하는데, 모몽가는 괴물이었던 캐릭터가 순한 캐릭터의 모습을 빼앗은 것이니 조금 다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치이카와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고, 역시 특별한 영웅이 되지 못한 채 그대로 돌아온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결국 방향 잃은 화살을 관객에게 돌리고야 만다. 그간 이 작고 소중하고, 보잘 것 없는 순수한 존재들 속에서도 쉽게 낙인과 단죄의 판단을 내리던 관객에게. 그 무엇보다 더, 타자에 대한 이해가 어쩌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작가 나가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머릿속 어딘가에 기억으로 남아 있다가, 그 기억이 훗날 무언가를 만들 때 토대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나 역시도 어린 시절 봤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다른 매체들과는 다른 스크린으로 차원이 다른 감각을 경험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비교적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나가노는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를 관람한 관객들에게 어떤 토대가 남겨지길 바랐을까.

       

      나가노가 말하는 “무언가”는 어떠한 창작작품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 무언가를 창작할 땐 그 주체가 평소 무엇을 생각하고 사유하느냐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니 결국 ‘토대’인 것이다. 무엇을 토대로 삼느냐에 따라 창작할 주체가 바뀐다. 창작하는 ‘나’라는 주체도, 내가 창작할 ‘주인공’이라는 주체도. 그리고 그걸 감상하게 할 ‘관객(독자)’라는 주체도. 그리고 여기서 결국, 토대는 단순히 창작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앞선다.

       

      우리는 요즘 너무나 쉽게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쏜다. 그것은 우리의 눈 앞에 ‘스크린’이 존재할 때 더더욱 그러하다. 사람이건 캐릭터건 상관없이. 화면 안팎에 있는 타자를 향해, 너무 손쉽게 말이다. 행위에 대한 책임은 있을지 언정, 그것이 손쉽게 무언가를 질타하며 낙인 찍을 명분이 되지 않기를 나는 물론이고, 어쩌면 이 영화도 바랄지 모른다.

       

      큰 스크린 앞에서, 큰 음악과 사운드, 인물의 심리를 밀도 있게 포착하는 카메라 앵글. 이 모든 것들 채택하고자 영화로 만든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는 우리에게 각자 다른 토대가 되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같은 뿌리를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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